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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2 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2. 2010.01.20 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철도가 마산에 남긴 흔적

역사/1900-1919 2010. 2. 2. 07:04
애초에 철도를 연구하려는 목적은 근대화의 역사에서 철도의 개발은 각 나라의 원시적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시장의 발달과 자원 개발(수탈)을 촉진시켜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마산과 삼랑진 사이의 철도 건설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여 하였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철도의 등장은 철도를 매개로 한 좌석의 평등성(양반 상놈,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동일한 위치에서 앉아서 서로 담론을 나누거나, 아니면 적어도 눈을 마주치면서 장시간 있어야 된다는 사실 그 자체), 시간과 공간 개념의 변화도 중요한 인식세계의 변화를 촉진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당시 1904년 정도의 철도의 속도가 시간당 20Km, 최대 50Km까지 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당시까지 나온 어떤 운송수단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사람의 걷거나 달리는 속도가 최대 8Km정도, 따라서 대개 하루에 40-50Km가 최대한 속도였고, 말을 타고 달리더라도, 대개는 50Km 정도의 속도로 전진하였었다.  징기스칸의 말달리는 속도도 빠르다고 하더라도, 말이 휴식을 취하고, 먹이를 먹고, 적의 저항에 부딪치고, 말에 탑재한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었다. 아무튼 기차의 등장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시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변화였다.  물론 이런 변화가 이미 영국에서는 1825년경 시작되었지만, 마산에서는 1905년에 마산선이 등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산선은 애초에는 우리나라의 철도의 선각자인 이기종이 시작하였으나, 자금의 부족, 특히 외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본 자금에 의존하여여만 하는 상황에서 의지만 갖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자금, 조선왕조 세력의 후원으로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일본인의 자금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는 일본의 경우에도 철도 선로 자재는 해외에서 수입하던 시기였고, 또한 철도 기관차나 수송용차 등 거의 모든 것을 해외에서의 수입에 의존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외환이 필요하였다.  또한 측량기사, 터널 공사, 교량공사, 궤조부설, 기반조성 공사, 운영에 관한 상황 등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경인선을 개설하였고, 경부선 공사가 진행중이었지만, 이에 대한 노하우를 아직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은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군용을 목적으로 한 것에 대핸 대한제국정부의 전폭적인 협조를 빌미로, 일본의 육군이 강제로 빼앗아서, 공사를 진행한다.  당시의 경부선, 경의선, 마산선 공사로 인해 일본의 철도건설업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그 근거는 한국인을 활용한 인력과 대한제국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토지를 거의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정도의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였기에 세계에서 당시까지의 기록에는 가장 싼 철도를 부설하였던 것이다.  그 이익은 대한제국 인민들의 원시적 자분축적이 아닌, 일본의 원시적 자본축적에 기여하였고, 철도 운영의 각종 기술을 익히는 장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외무성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그 중에서도 아시아 관련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의 인터넷으로 들어가면, 마산 사삼랑진간 군용철도 부설 1건이라는 114쪽 분량의 자료가 뜬다.  여기에는 1904년 8월 3일부터 1905년 8월31일까지 외무성이 주고받은 서류가 철해져서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일본어의 붓글씨체로 쓰여져 있고, 독해에 능하지 못해 완전히 해석하면서 읽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면, 이 자료는 마산에서 번역, 해석하여 자료로서 공간했으면 한다.  지도도 5장이 첨부되어 있다.  마산의 정거장 부지에 관한 것들이다.  정거장 부지 지도를 보면, 장군천의 하류는 현재 시청 옆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대 다파트 방향으로 흐르던 것을 시청방향으로 직선화 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 현재의 장군천 시장 앞의 길은 있었고, 새로 현재 시청 앞길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도정거장 부지는 각국조계지를 경계선으로 하여, 현재의 시청앞 길과 철도가 만나는 지점까지 소위 신마산 전체를 아우르는 정도의 규모를 지녔었다.  정작 실제로 정거장 시설로 사용한 것은 시청옆의 부터 각국조계지 경계선까지 인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이 부지는 대부분 논이었고, 여기에 정착한 사람들은 현재 추산동 무학국민학교 뒷산 중턱, 신월동(정거장 부지 경계선 바로 바깥), 그리고 반월동 부근에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따라서 정거장 부지 용지를 매입하려면 이들 소유의 부지와 마을을 매입하여야 하는 문제가 얽혀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정부와 협의를 해야하지만,사실상, 일본이 위협을 내세우고, 협상을 벌이는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하였다.

현재의 마산의 도시구조를 보면, 구마산(원마산)에서 3.,15의거탑을 지나면서 부터 정거방 부지, 각국조계지, 그리고 경남대학교 부근부터는 공터, 다시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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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서 근대는 일제의 수탈이었다.

역사/1900-1919 2010. 1. 20. 20:43

일제가 조선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던 시기에 마산은 러시아, 영국,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해군에서는 남포에, 러시아 부영사관에서는 율구미를 중심으로, 애초에는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연결하는 군항으로, 후에는 저탄장, 제빵소, 해군 병원의 기지로 생각하여, 이곳을 사들였다.  일본은 애초부터,  부산을 보완하는 무역항, 그리고 진해의 해군기지를 보완하는 군항으로서 마산을 지목하고, 끈질기게 마산의 외서면 지역(신마산)에 조계지, 전관거류지를 만들고, 후에는 러시아의 율구미 장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일인 부호들을 동원하여 땅을 사들였다.  영국도 19세기 말에는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까지 한반도에 탐을 내었지만, 결국은 남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보아전쟁에 전력을 쏟느라,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이제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진행되지만, 결국은 러시아는 만주에 집중하고,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는 과정을 겪게된다.

20세기의 초엽에는 구마산(원마산)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이 수입품 장사(주로 면제품)와 한일 상인들의 미곡 수출이 주된 상업활동이었다. 그러아 이후 특히 1904년 초이후에는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고, 일본육군이 군항을 만들고, 마산선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땅을 빼앗기고, 철로 부지의 조성, 궤도 부설에 일본인의 건설업자들의 하청 노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 철도건설지역은 1904년 2월에 맺은 한일 협정서에 따라, 그리고 대부분의 철도 주변 부지는 관리하느 나라의 군사적인 통치와 사법체제의 적용을 받는 점에 따라, 노무자들은 일본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즉 법을 어기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일본 영사관에 송화되어 처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조선정부가 러일전쟁을 위한 철도건설에 적극협력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선정부의 권유로 마산의 주민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후에는 중앙 마산지역(즉 철도 정거장 부지 약 40만평, 장군동에서 반월동 정도까지)의 도로 건설에서도 마산 주민들이 노역으로 동원된다.

땅을 빼앗겨서 이에 대한 소송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철도 부지나 정거장 부지의 경우에, 조상의 묘지나 옥토를 강제로 팔아야 되는 경우가 많아 창원 감리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미 1904년말에 들어서면, 조선왕조에는 재무와 외무 분야에 고문정치가 행해지고 있고, 1905년 말에는 을사보호 조약에 의거하여,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 되어서 일본인들의 횡포에 대해서 일본 이사청(일본 영사관)에 호소 해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들은 조선인민을 착취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부업에 많이 진출하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에는 토착상인을 상대로 일인들이 대부업에 종사하여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5년 1월에는 화폐개혁으로 일본의 화폐와 같게 만드는 조치가 발생하여 금융공황이 초래되고, 일제의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일본 거류민들 계통의 은행들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된다.  이시기에 일제는 신마산 지역에 전당포를 많이 설치하게 된다. 
 
일인들은 또한 이미 1905년이 되면, 사실상 조계지 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역, 군사지역 등에서는 완전히 독자적인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징세도 조선왕조의 권한이 미치미 못했다. 관세권도 외국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조선왕조는 지방지배체제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관리들의 부패와 탐관이 횡행하고 있었다.  아니 일제에 빌붙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도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는 제조업분야에서는 주조, 정미 등, 그리고 상업 분야에서는 일단 신마산 지역에서는 자체의 시장을 개설하고, 구마산 지역에는 서서히 침투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통분야는 하루에 2회정도 왕복하는 부산과 마산과의 철도, 인력거의 등장을 볼 수 있었고, 신마산 지역의 영화관 등장,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화류계의 등장과 더불어 구마산지역으로 침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근대의 물결은 일본의 착취와 약탈과 더불어 마산에 들어 오게 된다.  물론 마산의 유지들도 역시, 상업에 종사하고, 금융업에도 진출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인쇄소도 만들고, 야학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나, 다른 전통적인 지역에 비해서는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마산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육군 군항으로 도시가 성장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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