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3.04 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2. 2013.02.25 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3. 2013.02.09 히틀러 연설의 특징

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역사/1930- 2013. 3. 4. 16:54

 

(1) 극단주의자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Braunthal, 1956).

  (2) 파펜 시기: 1932720일에 파펜은 연립정부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라운을 물리친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입장과 비슷하게 당장의 실업문제가 심하므로, 미래에 문제가 심각하면 파업을 하겠지만, 현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도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당장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조합, 정당 그리고 철의 전선들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떠 보았다. 대개는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철의 전선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일반 파업이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주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자, 곧 이어서 파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되돌이켜 보면,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민당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바이마르 정권 기간 내내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aunthal, 1956).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무행동의 결정은 후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데 저항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Braunthal, 1956).

  (3) 술라이혀 시기: 1932123일에 파펜정부를 승계한다. 술라이혀는 독일 장성들이 이끄는 노동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은 히틀러의 등장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직노동자들과 교섭에서 술라이혀는 장단기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술라이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대 노조인 ADGB와 만났으나, 오히려 노동조합과 사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당할 것을 우려해서 논란을 벌인 끝에, 사민당과 노조는 정부와의 연정을 거부했고, 이 상태에서 술라이혀 정부는 출범하였다(Braunthal, 1956).

  1932-33년 초에는 실업율이 40%에 육박 (안병직, 2002: 227).  특히 청소년들의 실업율, 도시지역의 실업율이 높았다실업율과 나치의 등장은 관계가 있으나, 직접적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율이 높은 지역은 공산당이 강세.... 공산당원의 80%이상이 실업자들. 일부는 나치의 친위대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민당의 지지세력은 취업노동자들 (안병직, 2002: 233). 실업자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원자화되었다 (안병직, 2002: 235).  나치의 지지세력은 실업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소규모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농촌의 농업노동자, 혹은 철도나 우편 등 공공부문에 취업한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대도시나 공업화된 지역보다는 농촌이나 지방 중소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병직, 2002: 239).

  (4) 히틀러시기: 대부분의 일반 당원이나 노조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또한 히틀러의 등장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조직하라, 그러나 시위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131일자 노조의 결정에는 새로운 히틀러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하려고 한다고 정하였다. 2월중 까지만 해도, 노조는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으로 결정하였다. 3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폭력을 앞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봉급생활자 노조에서는 정치적인 결정의 영향은 노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10일 후에 개최된 ADGB 노조도 역시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공식적인 결정이후에 지방 노조의 소식지들은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견해의 표현을 자제하고 경제적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는 노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노조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못했다. 노조의 신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기에 이들 소식지들도 논조에 조심스러워 했다. 이어서 히틀러 정부는 공장 내 평의회에서 ADGB구성원들을 몰아 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일부는 특히 전통적인 숙련 노동자들은 나치와 협력하려고 했다. 노조는 나치의 대표자와 회담을 통해 입장을 드러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328일에 AFA 노조는 정부에 새로운 노동자 조직 방침에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점증했다. 415일에 정부가 조직하는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노조는 노조원들 개인이게 일임한다는 선언하였다. 때로는 나치의 이념에 동조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전 기간을 통해 나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Braunthal, 1956).

  19333월에 실시된 종업원 평의회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해산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73.4%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나치가 내세운 공장세포 NSBO11.7%의 지지율을 보였다 (안병직, 2002: 240).

    참고문헌

안병직, 2002, “바이마르 시대의 노동계급과 노동운동,”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Gerard Braunthal, 1956,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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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역사/1930- 2013. 2. 25. 12:14

 서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는 폐기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적 언어나 관행은 지속되고 있다. 이의 근원은 바로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간다. 즉 서구가 산업혁명을 이루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선구자적 인종 결정론은 당시에 고비, 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18531855)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비노의 이론은 Nicholas S. Timasheff, 1955/1961, Sociological Theory: Its Nature and Growth, 사회학이론, 수도문화사: 74-76를 참조).

 이 이론은 가장 자명한 명제로 (1) 문명의 흥망이나, 국가의 흥망은 우세한 인종의 혈통 순수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에 널리 인용되던, 서구의 진보론을 거부하고, 서구는 현재 팽창하면서 인종이 혼혈이 되어서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고비노는 독일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좀 더 혼합종이기 때문에 불란서인들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실로 우월한 민족은 영국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그는 논하였다” (Timasheff, 1955/1961: 74). 그에 의하면, 북구 유럽 사람들과 북부 독일, 그리고 영국인들이 가장 순종인 백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후에는 미국, 독일 발달하자, 이론을 수정한다. 백인이 다른 인종과 합쳐도 백인종의 우월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두 번째 명제로는 아리안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주요한 문명들은 백인종의 최고의 줄기를 이룬 아리안인종이 달성한 것이었다” (Timasheff, 1955/1961: 75). 이는 물론 사후적인 설명이다. 즉 과거에는 백인종보다도 우월한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명은 백인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하므로, 아리안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한 문명이고, 따라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우월주의는 두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즉 저열한 인종은 우월한 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동시에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이 부족하므로, 저열한 인종의 영토를 침략하여 이들을 몰아 내는 것은 문명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나치의 인종이론가인 Hans F. K. Günther는 아리안 인종중에서도 노르딕 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고, 이는 독일 게르만 민족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 1922, Rassenkunde des deutschen Volkes, 독일민족의 인종과학). 즉 아리안 인종이 코카사스 산맥 아래에서 시작하였다면, 게르만 종족은 민족 대이동시기에 고트, 반달족 등의 이름으로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종족이다. 아리안 종족에는 아시안 아리안 즉, 셈족까지 포괄하는 것이었으나, 나치의 지도자들은 아시안 계통의 아리안 족은 배제한다. 그러나 나치의 갈고리 상징모양 (불교의 상징을 방향을 바꾼 모양)이나, 스스롤 정당화할 때는 힌두교의 베다, 시들을 인용하였다.

 (3) 당시에 인종이론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현실에서의 이종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고비노 이론은 프랑스에서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의 상상을 황홀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퍼져 있던 진보이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Timasheff, 1955/1961,: 75-76).

 독일은 고비노의 이론을 이어받아 Houston Stuart Chamberlain (1855-1927)19세기 말에 독일에 소개한 소개하고, 독일어로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결국 프러시아의 빌헤름 2세와 그의 주변에 영향을 주었고, 후에 나치는 이를 취하여 인종이론에 기초한 침략, 우생학적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챔버린이 1899년에 발간한 책은 그 후 10년간에 걸쳐 약 6만부가 판매되었고,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만부가 판매되었고, 1938년까지 25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즉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향을 주어 1924년의 이민제한법을 정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4) 아리안 우월주의는 반대로 흑인과 유태인은 열등민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애초의 고비노나 챔버린의 반유대주의에서는 주장되지 않았지만, 나치 시기의 이론가인 군터에 의해 제기되고 이론화되었다. 즉 고비노는 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에서 오히려, 유대인들은 어려운 자연조건에서도 이를 극복한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민족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자치에 의해 편집되었다. 챔버린의 경우에도 유태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중세이후 반유태주의 정서는 독일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 경쟁관계에 의해 더욱 촉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항하여 발생하였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인이나 금융업 등에 중사하였으므로, 이 분야의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인들의 배척을 받았을 것이다. 나치의 이론가인 군터도 유대인들의 특성을 상인정신을 가진, 그리고 기교가 많은 무역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85년에 Josiah Strong 목사가 인종주의 사상을 배태하였다. 반유대주의적 사회적 분위기는 프랑스의 드레퓨스 사건, 그리고 러시아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중의 학살과 박해가 일삼아 졌다. 당시에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된다.

 (5) 히틀러는 1938년부터 시작된 체코 침입, 그리고 1939년의 폴란드 침입에서 같은 아리안 계통의 인종끼리 침입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 체코 민족은 아리안 계통이기는 하지만, 폴란드는 1939년 침략 당시에 하위 인종으로 다시 규정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는 물론 독일 거주인들 Sudeten문제로 침략하기는 했지만, 역시 인종적으로 몽골계통이 섞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하여 아리안 인종에서 철회하고, 침략 대상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러시아를 침입할 때는 슬라브 민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하위 인류에 속하므로,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쟁포로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 Lebensraum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슬라브 민족이 살던 지역으로 참략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 민족이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전쟁 말기 병사의 숫자가 부족해 지자, 슬라브 인종도 전쟁주인이 아니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을 일부 변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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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연설의 특징

역사/1930- 2013. 2. 9. 15:37

(1) 작은 거짓보다는 큰 거짓을 말하라.

거짓을 말한다면, 큰 거짓을 말하라. 큰 거짓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감정적 성격에서 소화될 것이기에, 더 큰 확신의 힘을 갖고 있다. 커다랗고 자명한 거짓은 기억에 남으면서도, 거짓일까 의심하기가 어렵고, 그런 것을 거짓으로 날조했을까 의심하기도 어려워 진다.

(2) 잘못을 인정하지 말아라.

  주저하지 말라, 말한 것을 덧붙이지 마라, 절대로 다른 편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마라,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여 대조시켜라”.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선거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체계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한편으로 치우치게 하라. 적에 대해 굽힘없이 공격할 때는,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에게 정의가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격을 중간에서 멈출 때는 성공을 하기 어렵다. 이는 대중들이 자신의 말이 정의로운 것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Bullock, 1952: 3).

  (3) 모호하게 반복하라.

  다양한 표현이 서로 중첩해서 나타나 더욱 모호해진 내용은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히틀러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 특정 부분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청중의 머리에 주입시키려 했다” (김종영, 2010: x).

  1932년말 뮌헨의 오스트리아 총영사가 히틀러에 대해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 그는 선전할 때 우선 부정적이고 비판적 측면이 강조되도록 조절하고, 긍정적 측면은 윤곽만 제시해서, 그 계획이나 약속의 실행 가능성을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 있는 다수를 끌어 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김종영, 2010: 55).

  단순반복의 효과, “”예컨대 청중이 동일한 내용을 한 세 번쯤 듣게 되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네 번째 들을 때는 벌써 생각하기 시작한다. 연사가 말하는 것이 청중자신이 이미 오랫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김종영, 2010: 30).

 

  히틀러에 당하지 않으려면

  (1) 수사와 논리의 훈련을 받아라.

  언어와 사고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히틀러의 연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몸서리치거나 웃으면서 피할 것이다 (Olden, 1981, Hitler: 84).

  (2) 자극적인 것만 찾지 말고 스스로 미래의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왜 대중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여겼는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자극적인 에너지에 눈이 멀었고, 나이든 지식인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더욱 보수화했다” (Heiden, 1936, Adolf Hitler: 94).

  (3)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히틀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범죄국가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어느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늑대가 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우리 속에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이히만과 같은 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 늦기 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둔 명확한 규범으로 통치하는 그런 국가만이 역사의 정의가 불의로 바뀌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크놉, 1998/2011: 28).

 

참고 문헌

Bullock, Alan, 1952, Hitler: A Study in Tyranny, New York의 축약된 것이 John L. Snelled., 1959, The Nazi Revolution: Germany’s Guilt or Germany’s Fate?, Boston, D.C. Heath and Company: 1-8에 수록된 것을 참조

Knopp, Guido, 1998/2011,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서울, 울력

김종영, 2010, [히틀러의 수사학] 서울, 커뮤니케이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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