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2.22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2. 2009.06.28 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3. 2009.04.04 왜 침을 뱉을까?
  4. 2009.01.03 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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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은 언제 시작하였나?

역사/19세기 2009. 6. 28. 20:33
한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어떤 일을 하였고, 모자라는 물건들은 어디에서 구했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지리적, 사회적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가를 이해하는 것일 필요할 것이다.  19세기 마산이라는 도시를 보면, 인근에 창원 도호부가 있었고 창원도호부는 창원면지역이다,  전에는 교통이 낙동강과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으니, 낙동강 가인 현재의 동읍이나, 대산면(당시에는 아마도 김해지역)이 번창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닷가는 마산포쪽에 세금을 거두는 창고가 있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생긴 원산 울산 방면의 교역을 위해 마산항이 동해와 서남해를 연결하는 포구 시장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마산은 포구와 다른 항구와의 시장 정도로서 기능하였다.  마산의 중심지는 진동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진해가 오히려 중심지였다.  따라서 현재의 마산은 하나의 마산이라기 보다는 진동지역의 진해와 신마산에 들어닥친 러시아, 영국, 일본의 조차지와 전관 거류구역들, 그리고 구마산은 포구와 세곡항, 창원도호부, 진해 동부의 웅천, 현재 함안 지역인 칠원 지역등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당시의 교통이 아직 걸어다니거나, 아니면 보부상, 수레나 우마차 정도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거리감이 현재보다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라 수 있을 것이다.

창원 도호부는 조선 19세기에는 여전히 상당한 경남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진주나 진남(통영)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광공업, 염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여좌역(북면), 낙동강변의 교통 수로가 활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창원의 중요성은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마산의 행정 중심지는 진동(진해현)이었고, 현재의 진해는 웅천이었다.  현재의 진해는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도시였고, 마산의 일본인 전관지역이나, 조차지 역시 일제가 만든 전형적인 일본식 도시였다.  따라서 진해와 신마산은 사실상 한반도에 존재하는 도시 형태 중에서 가장 일본적으로 계획되어 만들어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진해현(진동)은 10일장도 서고, 주위의 중심 시장으로 기능하였고, 상당한 정도 다른 지역과도 연계되는 시장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 역사의 이해에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객관적으로 상설 시장이 없었고, 5일장 내지 10일장, 아니면 포구에 있는 부정기 시장만 존재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18세기에 비해서 시장의 숫자가 거의 늘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고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의 생활을 보면 시장과 화폐에 관한 것이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이 늘지 않았고, 거래되는 물품이나 화폐(곡물, 동전, 은)이 포편적이지 않았다는 점과 주요 대외무역품은 은, 인삼, 곡물 등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여도, 국내 시장은 상당한 부분 이미 화폐화되어 화폐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마산은 포구와 세곡선의 항구, 그리고 동해안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교역장소로서 중요해서 도시로서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는 또한 인근의 지역과 연계가 되어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진동과 창원도호부가 역시 그런 독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을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선조 지리정보시스템에 현재의 구산면이 따로이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다.(칠원으로 쓰여져 있는데 아마도, 구산의 착오인 것 같다).  구산은 창원이나 진해와는 다른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며, 진해도 현재 당황포가 진해 영역으로 되어 있다.  구산은 아마도 거제와 연계되는 봉수대나 연락처로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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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침을 뱉을까?

역사/19세기 2009. 4. 4. 13:10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위중에 독특한 것이 침을 자주 뱉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래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또한 보도에 따르면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결핵에 걸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연간 6만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가래침을 뱉는 습관과 결핵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을 삼가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침을 뱉는 것은 서양에서는 결핵균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히 금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타구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손수건을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지난해에도 북경 올림픽 때 중국 당국이 거리에 침뱉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였고, 싱가폴에서는 벌금을 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길거리에 침뱉은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다.

침을 뱉는 것은 사회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분 나쁜일이 있을때 침을 뱉는다.  그것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뱉는 것이 가장 의미가 강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침을 뱉을만한 사회적 의사표현을 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결핵이 많이 퍼지는 사회적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물론 19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결핵이 많이 퍼진 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먼지때문일 것이다.  공장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각종 건설공사에서 생기는 먼지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순수히 인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공장과 국가의 필요성때문이다.  자본가들은 폐결핵에 걸린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들에게 전염을 시키고 노동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2세 노동자들을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할 것을 겁내하였다.  국가는 특히 전쟁시기에 군인들사이의 전염을 겁내하였고, 그래서 마산에도 1941년에 일본 상이군인들을 위한 결핵요양소가 생긴 것이다.  마산에도 또한 현재 마산대학교의 전신인 마산간호전문대학이 현재 마산의료원 터에 1956년에 개교하여 주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마산은 1910년에 진주에 생긴 국립병원 자혜원에서 만든 병원을 1914년에 세웠다.  이것이 현재 마산시청 근처의 마산의료원이다.  이후 유명한 문인들이 마산에 요양차, 대개는 결핵때문에 찾아 머물렀다고 한다.  나도향도 1920년대에 마산에 내려와 요양을 했다고 한다.  이후 아마도 1941년에 현재의 결핵병원 위치에 결핵 전문 병원을 일본상이군인을 위해 지은 것 같다.  아무튼 마산은 우리나라에서는 요양이 필요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바닷가의 공기기 결핵 치료에 좋다는 생각, 그리고 따뜻한 기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육군병원, 철도병원 등도 이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도 육군 병원은 마산 인근에 위치해 있다. 

마산은 온화한 기후, 바닷공기를 기반으로 해서 전통적으로 발달했던 의료 도시로 만드는 것도한 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마산이 전국에서 가장 조용한 도시가 되었다고 마산시나 신문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가장 잠이 잘오는 도시, 또는 미세먼지가 적은 도시를 선정하여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것이 있다.  나는 마산시가 현실을 인정하여 무리하지 말고, 오히려 마산은 조용한 도시, 먼지가 없는 도시, 온화한 기후를 가진 도시, 바닷가 공기가 상쾌한 도시라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도시 발전 전략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구와 개발를 하기 좋은 도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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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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