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시기마다 호기심과 얘기하는 친구들의 대화주제, 실제로 접하는 정보들이 다르다. 그리스 신화를 직접 읽은 기억은 없다. 초3, 초 6짜리 손녀 손자와 얘기하는 것도 버겁다. 아마도 나는 고등학교 1, 2학년, 그리고 대학교 1, 2학년정도 (1968-1972년정도)에 교양서적을 읽은 것 같다. 초등시절에는 (국민학교, 1959-1964) 학원사에서 나온 문학작춤 전집과, 위인전을 주로 읽었다. 그리스 신화속 인물을 접한 것은 까뮤의 시지프스의 신화 정도, 그리고 친구들과 만나면, 프로메테우스, 시지프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리스 신들에 대해서 친구가 전해주었다. 그것도 신들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자신들의 연애이야기를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전하는 형식이었다. 아마도 1960년대의 우리의 사조는 실존주의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도 실존주의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였다. 야스퍼스의 원자폭탄의 미래 (형이 사 놓은 책을 잠시 펼친 적이 있다, 사상계사 문고판, 영문 축약본을 번역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아마도 1950년대에는 (나에게는 초등 1년이전 시기인데) 대전 거주시절인데, 기억에 좋은 종이로 원자폭탄이 투하되면 대처하는 요령이 적힌 것을 기억한다. 폭탄 투하한 방향으로 쳐다보지 마라, 언덕을 방어삼아 숨고 (폭풍을 피하라는 뜻인 걸로 이해). 아무튼 그런 삐라는 본적이 있다. 정보검색을 해보니 확인이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투하시 대처요령을 훈련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검색되었다. 오리처럼 책상밑에 들어가 고개를 쳐박는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존주의는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나왔지만, 원자폭탄을 목도한 시점에서는 더 절박하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개인들의 무력감이 절박하게 표출 된 것이 실존주의였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겪은 직후였고, 무고한 이웃과 혈연들이 생명을 잃는 경험을 한 것이 1950-60년대에 실존주의 에 경도케 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위해 좋은 일만 해주었는데도,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시지프스는 운명을 벗어나려고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국 그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책하며,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당시의 우리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 인간을 위해 하는 행위가 오히려 벌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었고, 시대가 바뀌면서, 기본 사실적 내용은 바뀌지 않으면서, 주석은 바뀌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신화를 연극의 형태로 상연하면서, 정치적인 색깔은 심해졌을 것이다. BC 4백년대에 그리스 연극은 축제기간에 1만명이상이 관람하는 공공 행사였으며, 내용에 대해서 관람객인 시민들은 즐기고 있던 음식을 던지고, 여유하면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형태였기에 비극의 작가들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용과 형식은 단순하나, 진행방식을 통해 (가면, 스토리 텔링, 합창과 춤) 극적인 효과와 새로운 해석을 유도하였다. 프로메테우스가 아주 인기있는 작품은 아니나,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을 통해 어느정도는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그리스 민주주의는 비극을 통해 발전하였다고 하고,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은 장엄하고, 힘이 있고, 고뇌하는 형태라 초기의 인기가 후에 지속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우파의 모임은 시끄럽고, 고함치고, 격정적인 분위기인데 비해 좌파의 모임은 논리적이고 설명하는 스타일이라 지루하다고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몇년전 금강보의 해체여부에 대한 공청회에서 나온 이야기). 그리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정을 통해 선출되어 독재로 나아가는 와중에 디오니소스 축제와 연극 공연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을 보면, 정확하게 비극의 발전과 민주정의 발달을 일치시키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대중적인 집회자리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보면,민주정이 대중조작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랜 역사가 있는것 같다. 대중 집회도 없는 왕정보다는 낫다고 정도로 평가한다. 대중이 모이는 것이 반드시 민주정의 핵심요소는 아니고, 여기에서 숙의가 가능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닽다. 1만명 이상이 모여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아마도 그리스에서도 작은 마을 수준의 축제가 순차적으로 올라와서 아테네 축제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공적인 연극은 도시로 순회해서 공연하기도 했으므로, 그리스인들에게 아직 문자로 된 스토리가 없고 (파피루스를 사용해서 책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구전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연극이야말로 그리인들이 공동으로 즐길수 있는 시민적 서사였던 것으로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