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1.16 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2. 2009.01.14 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길이다.
  3. 2009.01.03 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역사 2009. 1. 16. 16:12

조선의 탄생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설된 상황에서
이미 여진족, 왜구, 홍건족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려왕조 대신에 국가 재건의 차원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 좁은 국토라서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너질 왕조가 너무 오래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아마도 지방이나, 상업의 약화가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조선 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문화나 재정이 튼튼한 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웃나라나 서구의 역사에 빗대어 보거나, 원나라 지배이전의 고려시기의 해양상업의 발달에 비추어 본다면 퇴보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계가 고려 왕의 명령을 어기도 모처럼 만에 찾아온 중국 대륙과의 호쾌한 전투를 마다하여 유약한 이성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성분이나 그의 경력을 보면 한반도의 변경을 오가면서 여진족, 홍건족, 왜구를 물리치면서 지역을 누빈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약한 그릇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다만 명나라를 섬기고,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삼음으로써, 국민들의 개방적인 기상이 취약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명나라만 하여도 남송을 이어받은 명나라는 초기에는 해양상업에 대해 금지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동아시아(남중국해) 해상 무역권을 발달시켰다.  물론 우리나라도 소극적으로 이 때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무역을 한 흔적이 있고, 심지어는 태조때에는 태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물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들 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무역을 청해와서 한 소극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라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공포, 삼별초 난에 대한 해상 세력에 대한 공포감이 강하여 해상무역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세종때 대마도를 정벌하면서도 왜구가 한반도를 공격할 것에 우려를 심히 하였다.  물론 조선조에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고려말에 비해서는 왜구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왜구는 이때(설사 일본의 공식적인 나라와는 구분한다고 하여도) 중국의 해상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중국도 1300년대후반과 1400년대 초반을 통해 동남아의 말라카, 인도의 갤리컷에 진출하였다.  조선만 여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선전기의 역사에서 서구의 르네상스, 지구상의 발견, 상업의 부흥 등의 근대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안에 고려때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무역과 제국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세종조의 시기에 나타났던 문예부흥, 국가 기틀의 마련이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너무 좁은 평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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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길이다.

역사 2009. 1. 14. 18:38
서양에서는 중세가 마감되는 1350년경부터 날씨는 차가와지기 시작하지만
르네상스라는 문화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문화권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서 망명해온 인적 자원과 문화적 영향을 보강하고
몽골 제국의 탄생으로 용이하게 된 동방무역을 통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므로서 유럽이 세계 역사를 지배할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영향력 약화, 이슬람이 강대해졌다가 다시 약화되는 시기, 유럽의 민족국가가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나는 가끔 우리는 이 시기에 무엇을 했던가하는 자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나라는 물려났고, 그러나 명나라가 들어서서 조선을 지배하려고 한다.  바깥 일본 열도에서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왜구가 날뛰고, 각지의 장군들이 서로 지역을 기반으로 쟁투를 벌이게 된다.  한 일본인이 이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반도에는 당시에 일본의 지역의 장군들과 같은 사람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일본은 1600년경에 되어서야 전국이 통일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등장하지만 이는 곧 명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적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1400년대는 한반도에서도 문예부흥, 국가의 기반을 정립하는 시기가 된다.  조선조 역사에서 조선 전기가 조선 후기에 비해 국가가 더 강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1500년말에 벌어진 전국 통일의 시점에서 오오다 지역(지금의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역)을 공격하는 풍신수길은 10만 군인을 동원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할 때에도 역시 15만 군인을 동원하므로,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는 정도가 나온다.

임진왜란 2년전인가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이들의 국력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신들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해외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한반도가 완전히 일본에 먹히는 1910년경에도 한반도에는 2만정도의 병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는가?  조선 전기의 내부 상황은 내부적으로 초기의 개국공신들과 왕권, 그리고 새로운 사림 세력들, 재지 토호 세력들이 상호 각축을 벌이는 양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내부적인 정치적인 다툼을 위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실질적인 경쟁과 다툼 보다는 정치적인 타협와 야합을 통해 인민 착취의 균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이 시기가 융성했던 한 시기라고 평가할 수있을지 몰라도, 세계사에서는 뒤떨어지는 시기가 된 것이다.

일본의 한 영주는 이미 1500년대 초반에 푸르투갈의 무역을 받아들였고, 일본의 왜구들은 중국 해안가에 진출하고 심지어는 동남아까지 진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은 1400년대에 정화 원정대를 아프리카 동쪽까지 보내던 시기이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4군 6진을 설치할 동안이다.   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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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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