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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파괴자로 동원된 대학 체육 선수들

역사/1900-1919 2010. 1. 11. 15:24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생은 아직 대중 교육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Veblen이 지적한 대로 고등교육이란 하나의 사치품이나 신분상징을 의미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대학이 이미 세워졌다.
그러나 대중들이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대학은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 상류층의 남성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미국은 20세기 초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와 같이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극심하게 발생한다.
이들 파업은 주로 탄광, 부두, 철도 노동자 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계급의 보편성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주거지를 기반으로, 그리고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연대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여기에 부두와 철도 노동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자로서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노동계급의 전위부대를 이루었다.

또한 20세기 초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1930년대의 대통령이 아닌)이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 특히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공식화하였고, 하와이를 침탈하고, 필리핀 전쟁을 통해 미국령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일본을 지지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미국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미국이 조선왕조를 도와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이미 1900년에 들어서면, 먼로주의의 태평양적용을 선언하고, 이는 곧 태평양 연안이 미국의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불안 요인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현재 하와이에 대해서는 병합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과하였다.  반면에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였지만, 금년이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전혀 사과의 움직임은 없고, 다만, 더욱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는 움직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보인다(일본 세카이 잡지 2010년 1월호의 특집은 한일 병합 100주년이다.  와다 하루키, 강상중, 그리고 젊은 다른 교수 한분의 대담이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대학생들 특히 대학의 체육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남성적인 우월성을 내세우며 1900년대 초반의 미국에서 파업 파괴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아르바이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익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아직 대학에 노동자 계층의 자녀가 입학하지 못했으며, 교수들도 신분보장이 되지 않았으므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우기 체육선수들은 남성성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능력을 과시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도 이를 부추기고 있다.  당시의 노동자들의 파업을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대부분 이들에 의해 쉽게 파괴되었고, 사업주들도 체육선수들의 근육적 능력을 신뢰하여 자주 요청하었다.

나는 같은 맥락을 아니지만, 1999년 9월 마산시 코아 양과점앞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 올린다.

참고 자료:
최정수, "T. 루즈벨트의 먼로 독트린과 '세계전략'", 서양사론 73호: 29-57
Stephen H. Norwood, 1994, "The Student as Strikebreaker: College Youth and the Crisis of Masculinit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Journal of Social History, Winter: 331-349
Melvyn Dubofsky, 1995, "Labor Unrest in the United States, 1906-90", Review XVIII, 1: 1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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