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BC'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3.10.05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2. 2010.07.02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타난 민주주의
  3. 2008.11.15 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4. 2008.10.17 인류의 역사
  5. 2008.10.17 우주와 지구의 역사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역사/BC 2013. 10. 5. 14:15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낭만적 민주주의였다고 평가할 수있다.  아마도 유권자 3만명 정도의 도시 (실제 거주인구는 15-20만명의 정도), 그리고 실제 집회에 참석하는 인구는 6천-8천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있다.  대개 약 170년 정도 지속했을 것으로 예측한다.  직접 민주주의는 세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민회 assembly에 참여하여 토론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들을 대표하는 council을 선출하는 것인데, 이는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첨에 의해 선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재판에서의 배심원인데, 이것 역시 추첨에 의해 선발되었다.  이중 assembly의 실제 운영방식을 살펴보면,

Josiah Ober, 1993, "Public Speech and the Power of the People in Democratic Athens", PS: Political Science & Politics, September: 481-485에 의거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은 약 150건의 직접민주주의 때 발언한 내용이 전해내려온다.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있다.

민회는 (시민모임)는 매년 40회정도 모였다. 모임은 7일전에 예고되고, 대개 반나절이 걸렸다. 모든 시민에게 공개된다. 아마도 3만여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개는 6천-8천명이 참석한다. 일찍 온 사람들에게는 하루 일당이 주어진다. 매 모임의 안건은 미리 500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council에서 결정된다. 이들 council 구성원들은 추첨에 의해 연간 복무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들 council은 안건에 대해 추천하는 답을 내놓기도 한다.

집회에는 대개 20-25%정도가 참여하지만, 사실상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전에 발언하는 사람들이 당일에 예상되는 사람이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석하기에 특정 계층이 과잉대표되거나 과소대표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당일 회의의 사회는 하루동안만 하게되며, 이는 추첨에 의해 선출된다. 의장은 당일의 안건의 순서를 정하여 공지한다. 만일 안건에 대한 council의 추천이 있다면 공지하고, 의견을 구한다. 누구나 발언할 권리가 있으며, 이때 반대의견, 수정의견, 완전히 새로운 안건으로 제안할 수 있다. 이는 동료 참석원들이 이들의 발언을 들어 주는 한에서 이루어 진다. 구성원들이 발언자의 발언에 대해 지루하면, 소리를 질러 내려오게한다.

발언자들이 모두 발언이 끝나면, 손을 들어 찬반을 묻게 된다. 단순다수결로 결정하고, 이것이 끝나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아테네 사람들은 중요한 안건을 결정한다. 외교문제, 세금징수 등. 실제로 이 집회에서 제안되고 채택된 법률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김봉률, 2011, [어두운 그리스 - 사유와 젠더, 민주정의 기원] (경성대출판부)이 하고있다.  두가지이다.  하나는 이들의 민주주의가 결국은 전쟁을 위한 민주주의였다는 점, 그리고 추첨제에 의한 council구성은 실은 민중의 권력이 선출직 장군에게 옮아가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고, 교수신문에 저자가 쓴 서평을 읽고 옮긴다.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주도했다는 걸 알면서 그 침략전쟁을 치고 나간 주체인 민회가 민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정과 추첨제, 토론과 자유가 이 전쟁에 복무하도록 결국 짜여졌다면? ...노예사냥, 약탈, 여성지배, 무역이 목적이었던, 풍요로웠던 고대 아테네를 지배했던 전쟁은 그 자유의 절정이었다...페리클레스 시대 민회는 페르시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언어, 같은 신화를 지닌 헬라스 도시국가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전쟁에 골몰한다"

이에 대해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실은 전쟁에 인민의 노력(귀족의 군대에서 민중의 군대인 보병, 다양한 계층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성공적인 운영이 가능한 해군의 전함 운영)을 동원하고, 재산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에 대해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전쟁은 항상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도 하였고, 발전시키기도 한 역사를 상기하려고 한다.  즉 외부의 위협에 맞서 민주주의는 대개 단일의 전제자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전쟁은 대중의 호응을 얻고, 희생을 요구하여야 하기에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촉진시킨다는 두가지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만 지적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를 논한 사람들은 직접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의회의 안건만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법의 집행 앞에서 인민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기에 인심을 얻기 위해 부를 분배하고, 명예와 덕을 쌓으려고 노력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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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에 나타난 민주주의

역사/BC 2010. 7. 2. 10:29

1차세계대전후의 서구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피는가 했더니, 전체주의 파시즘 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도 대부분, 명백하지는 않지만, 민중들의 암묵적 승인과 가장 광기어린 방식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논하면서 위기의 징후는 항상적으로 있어왔다.  아니 민주주의란 위기를 내포한 제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 제어하는 방식으로 숙의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내실화를 주장한다.  아무튼 민주주의는 그 제도자체만으로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BC 4-5세기 경, 인구 50만명 규모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다양한 정치체제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민주주의를 겪은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데마고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사형에 처하게 된다.  소위 다수의 횡포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아니 다양한 의사표현이 억제당하게 된다.  이를 기록한 것이 국가론 8장이다.  물론 이 장에서는 유능하자들에 의한 지배체제인 아리스토클라시, 명예를 존중하는 정치체제인 Timocracy (물론 이제도는 스파르타를 염두에 두고 용기와 재산을 명예로 규정하고 있다), 과두제(금권정치), 민주제, 독재(전제)를 들고 있다.  이중 흥미를 끄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와 평가이다.

"민주제란 빈민들이 승리하여 반대파의 일부는 처형하고 일부는 추방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시민권과 통치권을 평등하게 분배해줄 때 생긴다.  따라서 민주제의 국가에서는 추첨에 의하여 치자들이 선출되는 것이다"(557a).  이런 제도에서는 "교만을 교양이라고 부르고, 무질서는 자유라고 부르고, 파렴치는 용기라고 부르면서 찬사와 아첨의 말을 퍼부우는"(561a) 사람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상황에서는 다시 참주제, 독재체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움은 불필요한 욕심을 낳고 이러한 욕심에 의한 경쟁은 다시 부와 재산, 탐욕의 경쟁이 나타나서, 오히려 독재 등장의 토대가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대중 스스로 독재를 원하고, 독재자는 민중을 이끌기 위해 전쟁을 유발한다는 지적이다(567a).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철학의 등장이 결국, 우매한 민중을 깨우치는 수단으로 나왔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 깨우치는 방식을 취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통해 철학이 등장하였다는 점은 현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민주주의의 제도만이 최선의 제도는 아니고, 민중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을 때에는 결국 스스로 독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교시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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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교류는 자유로왔다.

역사/BC 2008. 11. 15. 13:17
역사서술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삼국 초기 이전단계는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BC700년경부터 역사시대라고 칭할 수있을 지 모르지만.
선사시대에 대한 역사 해석은 순전히 발굴된 유물과, 드문드문 남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들, 아니면 민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설화, 기록된 설화 들을 보고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정도의 시기에 이르르면 같은 땅에 살았다는 것 외에 나와 같은 핏줄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모호해 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선 통제가 거의 없었고, 아니 국경선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한반도의 경우에는 국경선 내에 주민들을 가두어 놓는 주민등록제도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국경선의 개념이 없이 자유롭게 필요에 따라 이동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또한 정착식 농업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는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이동하고, 기후에 따라 이동하고, 수렵과 채취를 곁들인 생활이었다면 당연히 이동을 전제로 자시의 삶을 꾸렸을 것이다.

이동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의 유물, 벽화의 비슷함, 다른 지역의 산물이 이동하여 나오는 정도 등을 파악한다면 일본의 큐슈지역은 가야에 해당하는 지역고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중국의 산동반도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인근의 섬들과 이동이 많았을 것이고, 중국의 요서지방은 요동을 거쳐 대동강변까지, 아니 더 나아가 울산지역까지도 비슷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동은 대규모로 정치나, 기후상의 변화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다. 단순히 한 부족 단위로 경제를 위해 이동하는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의 주민들은 국경의 거리낌이 현재보다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보다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우리는 이동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이동할 때마다 국적을 의식하고, 강요당하고, 민족의식을 재현하는 각종 인공건조물에 세뇌당하고, 따라서 우리는 좁은 영토주의에 사로 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히려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좁은 영토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한층 cosmopolitan 적인 사고와 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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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역사/BC 2008. 10. 17. 15:26

역사라는 표현이 인간이 인간의 과거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한다고해서, 현재의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슬기슬기 인간)가 스스로 기록하지 않은 과거에 대해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이 동물과 아니 유사한 다른 동물과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슬기 인간 중에 현존 인류를 표현하는 슬슬기인간이 아닌 또 다른 현존 인류의 친척인 Homo sapiens idaltu (나이들은 현명한 인간)은 오래 사라졌다. 다만 현존 인류는 2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화석으로는 13만년전 것이 발견되었다), 유라시아에는 4만년전에 넘어 온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한반도 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 중의 하나로 북한의 덕천군 승리산과 평야의 만달리 유적에서 발굴된 유골을 치고있다.  현재 우리의 직접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북방 몽골 인종은 약 2만 7천년전에 바이칼 호에서 사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1만년전에 한반도로 들어와 신석기 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북방 몽골족이 들어오기 전에 토착인이 이미 살았을 것이나,이들은 신석기 몽골족의 신석기 문화에 동화되어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석기 문화는 현존 인류와는 수백만년전에 이미 갈라져 나온 네안데르탈인이 발달시킨 것으로 보이고, 이들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년전에 현존 인류와의 경쟁에서 져서사라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에서 신석기 문화의 등장이 바로 현존 인류의 등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현존 인류는 약 7만년전에는 물론 아직 유라시아까지 오지 않은 시절에는 지구상에 약 2천이 생존하고있었다.  1만 2천년 전에는 이미 지구상에 1백만명으로까지 개체가 늘어났다.  약 1만년전에는 약 5백만명으로 늘어나서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지구를 지배하였다는 말은 인간이 기본적인 특성인 뇌의 용량과 직립으로 다닌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특징은 바로 이 두가지 생물학적인 특징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고, 음식을 요리하며, 자신의 옷을 지어입는 유일한 동물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이다.  침팬지와 인간과의 차이는 현재 살아있는 인간간의 차이보다는 10배정도 크며, 들쥐와 생쥐와의 사이보다는 1/10정도 차이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전자는 유사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67억명의 인류는 자연 생태계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공격자이며, 인간을 먹이로 삼는 동물이 없는 상황에서 아마도 인류 생태계는 수백년 사이에 파괴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간의 역사를 공부하기 보다는 이제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살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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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지구의 역사

역사/BC 2008. 10. 17. 14:54
우주와 지구의 과거를 말하는 것에 대해 역사라는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튼 우리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이라는 자연 피조물은 지구의 자연을 가장 잔인하게 약탈하는 종족으로 기록되어 곧 대규모의 자연변화를 야기시킬 것으로 예상하고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접경지역에 건설된 거대 강입자 가속기가 가동에 들어감에 따라 우주가 탄생한 최초의 1조분의 1초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재생하는 실험이 금년말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부 유럽에서는 여기에서 불랙홀이 생겨서 지구가 삼켜질 것이라고 믿고 있어서 지구 종말론이 새삼스럽게 거론되는 모양이다.  물론 과학자들은 이런 것이 나타난다고하여도 그 규모가 작아서 지구를 삼킬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하고 한다.  아무튼 우주의 탄생이 재현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과학자들도 일부가 이 실험에 참여하면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주는 137억년전에 탄생한 것으로 1927년경부터 빅뱅이론에서는 주장하고있고, 이를 대부분 정설로 받아들이고있다.  물론 최근에 호킨스는 여러개의 우주를 가정하고 있지만, 아무튼 우리가 사는 우주는 137억년정에 탄생한 것은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후 대폭발후 1조분의 1초: 우주의 가장 기초적인 원소인 Quark, 이들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Gluon, 그리고 전자와 neutrino(중성미립자)가 뒤섞인 상태.  이때의 온도는 10의 32승의 섭씨 도로 추정한다.
이후 10만분의 1초 - 3분: 우주는 식어서 1조 섭씨 도가 된다. quark가 3개씩 짝을 이루어 양성자와 중성자로 변화, 이들은 다시 서로 결합하여 원자핵을 이룬다.
38만년후: 원자핵이 전자와 합하여 원자가 되고, 수소와 헬륨 상태가 된다.
2억년후: 중력에 의해 수소와 헬륨이 뭉쳐져서 수많은 별들이 탄생한다.

45억년 전에 지구의 탄생: 별로서 탄생하고 남은 잔해들이 미쳐 별로 뭉치지 못하고, 굳어져서 행성으로서 지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지구가 현재와 같은 기온을 갖는 상태가 되기까지에는 약 5억년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즉 이때 부터 지구에는 산소를 통해 숨쉬는 생물이 만들어 진것이다.  이후 약 4억 5천만년전 부근, 3억년전 부근, 1억 5천만년전 부근부터 최근 1만년전 사이에 빙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는 대체로 현재의 기후와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바다의 깊이를 보면, 약 2만년전부터 급격히 수면이 상승한다.  즉 현재보다 120미터 정도 낮은 상태에서 약 1만 5천년전에는 2만년전보다 30미터 정도 상승하였고, 그 이후 급격한 상승이 이루어 진다. 약 8천년전에는 현재보다 14미터 정도 낮은 상태였고, 그후 1천년을 통해 급격히 수면이 상승하여 많은 땅이 침수된다.  아마도 빙하기가 끝나면서 얼음이 녹은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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