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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제와 도덕경제를 뚫고 나오는 상품경제의 싹들

역사/17-18세기 2009. 2. 10. 16:19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국가 조공체계나 도덕경제를 벗어나서, 유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국가의 조공이나 공동체를 벗어나고, 그렇다고 자연경제에서도 살지 못하는 유랑민화한 집단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자연이상의 빈번함, 그래서 나타나는 식량의 부족,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 압력의 강화, 아무튼 살기 힘들어진 생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토지생산력을 높이고, 경작지를 넓히고, 새로운 구황작물을 도입하여는 시도도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민화를 떨쳐낼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농경지의 광작화, 집약적 농업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의 집약적 필요성, 신분체제의 와해, 국가의 감시체제와 약화,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1700녀대 후반 들어서면 아주 자연스럽게 임노동자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시초는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임노동자군은 또한 화폐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정부에 내는 세금, 그리고 군역과 부역을 대신하는 사람을 사서 쓸수 있는 제도, 또는 포나 쌀로서 내는 방식의 등장, 정부의 일에 대해서도 일용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방식의 등장은 임금 노동자의 등장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도시 지역, 특히 서울 지역은 이미 1700년대를 넘어서면 약 2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상당수는 임금 노동으로 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경우에도 전문적으로 임금노동만으로 생계를 영위한 사람들이 발생할 정도로 임금노동의 수요는 상당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임금노동의 존재가, 아니 무산자층의 존재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발전의 단초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 노동은 화폐 소득을 매개로 하여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구매아여야 하므로 자연히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5일장이 서고, 행상들이 많아지고, 고정적인 상점들도 들어섬으로써 상품 경제는 어느정도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적인 수요 정도로는 대량생산이나,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여 대량으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명히 보부상과 같은 아니면 보다 국제적인 무역을 행하는 상인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생산에 직접 나선 것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미약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초기 단계의 화폐, 이에 따른 국제 국내적인 시장의 형성, 화폐의 원재료를 생산해내기 위한 광산의 개발, 국가와 양반수요를 위한 전문적인 생산체제의 구축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보이나,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것은 아직 부족했다고 보여진다.  즉 의복생산의 단계로 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의복생산은 자족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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