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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00-1919 2019. 8. 4. 12:34
르이빈이 파벨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파업을 하기는 힘들걸세! 돈 몇푼에 눈이 뻘게지긴해도 겁은 많거든. 삼백명이나 따라오려나? 그 이상은 어려워. 쇠스랑 하나로 퍼 올리기에는 퇴비의 양이 너무 많아. 말은 잘했는데, 마음을 못움직였어. 심장깊숙이에 불을 댕겨야 해"...
시조프 영감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무덤이나 가야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소? 무릎꿇고 벌벌기면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며 살지 않았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요. 젊은이들을 보구려. 사장하고 대등하게 말하잖아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르이빈이 중얼 거렸다. "자넨 이제 틈새를 메우는 시멘트와 같네! 파벨, 자넬 대표로 뽑자고 소리치던 사람들을 보았지? 사회주의자니 선동가니 하면ㅅ허 수군대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어! 당장 해고당하기는 싫고, 자네가 길을 열어주면 따라가겠다는 거지". (고리키, 1906/2006, 어머니, 푸른 숲: 82-83 => 원문을 축약한 것).
"You cannot get them to strike!" said Rybin, coming[Pg 90] up to Pavel. "Greedy as these people are for a penny, they are too cowardly. You may, perhaps, induce about three hundred of them to follow you, no more. It's a heap of dung you won't lift with one toss of the pitchfork, I tell you!"
Pavel was silent. In front of him the huge black face of the crowd was rocking wildly, and fixed on him an importunate stare. His heart beat in alarm. It seemed to him as if all the words he had spoken vanished in the crowd without leaving any trace, like scattered drops of rain falling on parched soil. One after the other, workmen approached him praising his speech, but doubting the success of a strike, and complaining how little the people understood their own interests and realized their own strength.
Pavel had a sense of injury and disappointment as to his own power. His head ached; he felt desolate. Hitherto, whenever he pictured the triumph of his truth, he wanted to cry with the delight that seized his heart. But here he had spoken his truth to the people, and behold! when clothed in words it appeared so pale, so powerless, so incapable of affecting anyone. He blamed himself; it seemed to him that he had concealed his dream in a poor, disfiguring garment and no one could, therefore, detect its beauty.
He went home, tired and moody. He was followed by his mother and Sizov, while Rybin walked alongside, buzzing into his ear:
"You speak well, but you don't speak to the heart! That's the trouble! The spark must be thrown into the heart, into its very depths!"
"It's time we lived and were guided by reason," Pavel said in a low voice.
"The boot does not fit the foot; it's too thin and[Pg 91] narrow! The foot won't get in! And if it does, it will wear the boot out mighty quick. That is the trouble."
Sizov, meanwhile, talked to the mother.
"It's time for us old folks to get into our graves. Nilovna! A new people is coming. What sort of a life have we lived? We crawled on our knees, and always crouched on the ground! But here are the new people. They have either come to their senses, or else are blundering worse than we; but they are not like us, anyway. Just look at those youngsters talking to the manager as to their equal! Yes, ma'am! Oh, if only my son Matvey were alive! Good-by, Pavel Vlasov! You stand up for the people all right, brother. God grant you his favor! Perhaps you'll find a way out. God grant it!" And he walked away.
"Yes, you may as well die straight off!" murmured Rybin. "You are no men, now. You are only putty—good to fill cracks with, that's all! Did you see, Pavel, who it was that shouted to make you a delegate? It was those who call you socialist—agitator—yes!—thinking you'd be discharged, and it would serve you right!"
(Gutenberg 프로젝트에서 인용한 영어번역문에서 인용).
교양 2014. 3. 27. 11:09
이번 학기부터 학교에서 교양기초교육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그 동안 운영되던 교양기초교육부를 처나 단과대 수준으로 승격시키고, 교수학습센터는 독립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조치이다. 그 동안 경남대에서도 교양 기초과목을 전체 졸업 이수학점 130학점에서 30학점이 될 만큼 수량적 측면에서 증가되어 왔다. 그러나 현금의 기초교육의 내실과 교야에 대한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즉 고등학교에서 이수한 학력으로는 대학의 전공과정에 진입하기 어려운 사정에서 기초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교육에서 교양과 인성이 강조되는 사회적 수요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제 경남대 교양기초교육의 3주 반이 지나면서, 그 동안 현황 파악, 체제 정비에 시간을 바쳤다면, 이제는 조금 큰 틀에서 과연 경남대에서 어떤 교양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을 할 시기가 된 것 같아서, 오늘 아침 서재에 꽂혀있는 서적 중에 헤겔(1770-1831)이 1818년 베를린 대학에서 행한 교수취임 연설문을 접하게 되었다. 우선 드는 의문은 우리나라의 경우에 교수 취임연설문이라는 제도적 관행도 없고, 이런 종류의 취임 연설문이 어느 정도 유용성이 있나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물론 당시에는 프러시아 제국의 대학제도에서는 대개 한 교수가 하나의 강좌를 맡고 있으며, 이는 2개 이상의 강좌를 요청하면, 거절하는 것이 관례인 것 같다. 물론 현재는 독일의 정교수들도 하나를 맡지는 않고, 2-3개의 강좌를 맡는 것이 관례이지만, 적어도 1970년대 대학교육이 대중 교육이 되기 전까지는 교수의 권위가 막강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사회학의 경우에도 막스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논한 것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서양의 학문 제도와 대학제도를 도입해서 운영하고있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경남대 교양을 논하면서, 헤겔로부터 끌어 오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유쾌한 일을 아니지만, 그래도 헤겔을 읽고 보니, 교수 취임 당시에 프러시아제국이 초한 사회적 현실에서 철학이 행해야 할 일을 제시한 점에서 그냥 철학 일반을 설파한 것이 아닌,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대해 철학이 행해야 할 소명을 말하고 있어서 그것이 마치 경남, 아니 대한민국, 지구적 시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경남대 교양에서 제시해야할 목표가 있는 것으로 보여 느낀 소감을 말해 보고자 한다 (G.W.F. Hegel, 1818/2004, [교수취임 연설문], 책세상).
헤겔은 당시에 독일이 처한 상황을 반철학적 사조가 팽배한 시기로 규정한다. 물론 당시 독일은 프랑스 나폴레온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절치부심하던 상황이었다. 헤겔이 스스로 자부하듯이 독일은 사상적, 사유적, 철학의 본류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을 간과하지는 말지만, 그렇다고 헤겔의 철학적 사유 자체를 독일 국수주의의 표현이라고 폄하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는 당시의 시대 상황(23쪽)을 (1) 정신의 궁핍함과 일상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것, (2) 사건들의 공허한 자만 Eitelkeit (영어로 vanity)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신의 궁핍함에서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단순히 이성이라고 하면 규정이 어려워 진다. 사유적 이성을 조금 더 진전된 형태이다. 즉 즉자적 이성이 아닌 보다 심오한 사고의 과정과 단계를 더 나아간 이성이라는 뜻으로 일단 해석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성적인 사유이자, 감성적이고 사념적이며 주관적인 것이 섞여있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면서 스스로를 전개시켜 나가는 사유입니다” (29쪽). 또는 반성적 사유로 규정하기도 한다. 즉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반성적 사유라고 지칭한다. “인간 속에 본능적으로 있는 이성적인 면과 이것을 향하는 반성적 사유가 인간을 이 현상 세계에서 보편자와 근원자로 인도하며, 근거와 원인들, 법칙들에 대한 탐구로 인도하며, 이렇게 변화무쌍한 가운데 지속하는 것ㅇ데 대한 탐구로 인도합니다” (31쪽). 즉 정신은 바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성과 이성적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반성적 사유가 당시에 궁핍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을 바로 일상에의 몰입에 의해 더욱 조장된다는 것이다. 왜 일상에의 몰입이 이성과 반성적 사유를 방해하는 것일까? 이는 반성을 통해 이성을 작동시켜,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보편자, 근원자, 근거와 원인들, 법칙들로 나아가는 사유의 과정을 방해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헤겔은 당시 베를린 대학에 헤겔의 철학 강의 그 중에서도 첫 개설강좌인 자연법학 Wissenschaft des Naturrecht (knowledge of natural law 자연법 학, 실증법학에 대비되는 용어)을 개설하면서,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즉 청년의 정신을 주장한다. 즉 대학에서 수강하는 청년들에게 청년의 정신을 가질 것을 주창한다. 청년이라는 존재는 시기상 “아직까지 궁핍한 제한된 목적의 조직에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사심없이 학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시기”라고 규정한다(27쪽). 여기서 학문적인 일이란 직업으로 앞으로서 학문에 종사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대학이라는 테두리에서 제공하는 학문의 맛을 들이고 수업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청년은 “자만이라는 부정적인 정신에도 아직 얽매이지 않고, 단지 비판만 하려는 악착같은 노력이 지닌 몰내용성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기”라고도 규정한다. 따라서 청년들은 “건강한 가슴으로 진리를 열망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청년이야말로 철학하기에, 반성적 사유로 이성적 사유를 하는데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헤겔은 청년들인 수강생들에게 부탁하기를 “학문에 대한 신뢰와 이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즉 일상적인 궁핍함에서 나와서, 이성적인 사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면서,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진 위대한 힘인 이성적 사유, 반성적 사유에 대한 힘을 믿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진리에 대한 용기와 정신의 위력에 대한 신뢰는 철학 연구의 제일 조건입니다”(27-28쪽). 믿음과 용기를 말하고 있다. 나는 항상 책을 읽는 용기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데, 영어권에서는 어릴 때부터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즉 독서는 용기있는 자만이 할 수 있고, 독서는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므로, 대단한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한다. brave라는 영어 표현이 육체적인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는 점을 전재한다면, 용기를 갖고 독서를 하자는 표현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사유적 반성과 이성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헤겔의 의도가 나타난다고 보인다.
이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반성적 사유를 행하는 것, 세계사의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고, 자신의 사유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의 반성적 사유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을 갖고 나의 이성적 능력을 함양시킨다면, 세계는 다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인간이 세계를 이성적으로 주시할 경우에만, 세계는 인간에게 이성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30쪽). 나도 경남대 교양기초교육원에서 의사소통에 기반한 기초, 전공에 앞선 학문적 기초, 자유시민적 교양, 사회생활에 앞선 도구적 교양 등을 염두에 둔다면, 주위의 교수님들과 학생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요청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는 우리 모두가 대학에서 반성적 사유에 기반한 이성의 힘을 길러 사회에 진출하는 대학의 이념을 주창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역사/20세기 2013. 10. 29. 15:52
지난 금요일 10월 25일 금요일 오후 4-6시에 경남대 인문관 101강의실에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 (1993년)을 모시고, 경남대 인문학 명사 강좌를 개최하였다. 중간고사가 있는 주일의 금요일 오후라서, 학생들의 참석이 어려울 것이라고 학생회에서 우려를 전달하였다. 한선생님의 일정을 고려해서 그리했기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그래도 학생들이 사회학과의 경우 현재 85명 재학생에 20여명이 참석하였고, 질문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강연중에 역사적인 사실과 평가를 하시면서, 민족 자주의 입장에서 평화적인 상생을 주장하셨기에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우리 교수들을 혼내셔서 그런지 학생들이나 일반 청중들은 교수가 어른 교수님으로부터 꾸중 듣는 모습이 생소해서 흥미로왔다고 강연후에 전해 들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경상대나 경남대에 있는 제자들이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쓰하시고, 그러나 청중들은 한완상 선생님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민족과 사회적 실천에 대해 말씀하시는 모습을 감동을 받았다고 역시 나에게 전했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전달될 모르지만, 사람이 특히 지식인이나,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감동적인 모습인 것 만은 사실이다.
최근에 나온 저서에 사인을 해주시면서, 날자는 2013년 10월 26일로 기록해 주시고, peace maker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peace maker는 이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2000년에 안기부장)이 저서에서 사용했던 말이다. 즉 임동원은 peace keeper가 아니라 peace maker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한민족의 번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구권이 망한 시기에 북한은 남북 관계의 개선을 간절히 소망하였다. 이유는 중국과 소련이 한국과 국교정상화하는 상황, 그리고 사회주의 권이 개혁 개방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체제 유지와 개혁개방의 물꼬를 트려고 했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내걸고 있던 세력들은 남북한의 화해 협력을 바라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노태우 대통령 말기에 남북 협상이 완료되었고, 비핵화 선언이 나왔던 것이다. 1992년에 조치를 취하려던 이인모 장기수의 북한 송환은 다시 미궁에 빠져 버린 상태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는 점을 천명하고, 한완상 교수님이 통일원 장관 겸 부총리가 되면서 전격적으로 3월에 이인모씨의 송환이 이루어 졌다. 그 이후 보수언론에 의해 한완상 총리는 좇기는 신세가 되고, 김영삼 대통령도 역시 여론의 악화를 염두에 두고 과감한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 당시에 서울 광화문 정부 종합청사에서 부총리 님을 만난 나는 약속도 없이 찾아간 제자에게 1시간 이상을 할애하시면서, 현재의 상황을 셜명해 주셨고, 바깥에서 도와달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방관한 기억을 갖고 있다.
통일원이 대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고, 안전기획부에 의존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따라서 주도권을 갖고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동원의 책에 지적되었고, 1993년 가을에 감사원 감사를 통해 밝혀진, 안기부의 대통령 청훈 묵살, 왜곡, 지연 등의 문제점이 사실상 안기부는 남북 화해를 대통령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방해하고 있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한완상 전 통일원장관께서는 책을 통해서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로 표현하셨다. 강연 말미에 발악이 아닌 발선을 하자는 말씀을 하셨다.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오고, 선 순환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은 이것이 신뢰프로세스다. 엄연한 국제관계에서는 다소 낭만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우리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강소국의 전략으로는 염두에 두어야 할 전략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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