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9. 26-10. 6 박정희의 의사결정

역사/20세기 2020. 1. 26. 17:52

이 시기는 사실상 공작정치에 의한 신민당 내분, 박정희의 두번에 걸친 (국군의 날, 개천절 기념사) 정국에 대한 견해 발표, 10월 4일 국회에서 유정회가 주도하고, 공화당이 따르는 가운데 김영삼 의원의 제명, 이에 대한 미국무부의 유감 표명 (10/4, 10/5), 유감표명에 이은 주한미국대사의 본국소환 (이는 1958년 보안법 파동시에 소환한 이래 두번째), 케네디의원의 한국정부 비판, 10/6 한국 외무부의 미국무성 미판에 대한 성명 발표. 그리고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시기에 10/7일 김형욱 전 중정부장에 대한 처리 공작이 개시되었을 것을 추정한다.

박정희의 의전기록을 보면, 정치공작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담당한 곳으로 보인다.  하루에도 몇번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서 보고를 한다.  9/25 화  오존 10:20-10:45 (25분), 오후 1시 15분-1:23 (8분간), 오후 4시 5분 - 4; 30분 (25분); 9/26 수, 오전 9시 17분- 9: 40 (23분); 9/28 금 오전 9: 25-9:40 (15분), 오후 4시 20분 - 4: 40 (20분); 9/29 토 오전 9시 17분 - 9:57 (40분), 오후 12시 5분 - 12: 11 (6분간); 10/2 화, 오전 9시 40분 - 10: 20 (40분간), 오후 3시 30분 - 5:25 (배드민턴, 김계원 비서실장, 의전수석과 같이); 10/4 오전 9시 40분 - 9: 57(17분간), 오후 3시 55분 - 4시 45분(김계원 비서실장과 같이, 이후 유혁인 정무 1수석을 추가- 박정희가 불러서 김영삼제명에 대해 의논을 한 것으로 추정); 10/5 금 추석,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같이 오찬 11:50-1:20pm

반면에 김재규 중정부장은 공작의 실행부분만 담당하거나 아니면 담당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9/28 금 오후 3시 40분 - 3: 55 (15분간 보고); 9/29 토 오전 10시 15분 - 10: 33 (18분간) 김계원, 정무1수석 유혁인과 같이 보고; 10/2 화, 오후 12시 20분 - 1:25 (1시간 5분간) 오찬; 10/5 금 추석, 오전 11시 50분 - 1:20pm (1시간 30분) 오찬; 10/6 토 오전 9시 50분 - 10시 10분 보고 (김계원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 1수석과 같이).

실제 정당을 담당하는 정무 1수석의 역할은 실행역할보다는 조언을 듣는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   9/29 토 10:15-10:33 (비서실장, 중정부장과 같이), 오전 10시 35분 - 11:47 국방장관, 합참의장, 안보특보의 회의중에 잠시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 10/4 목 오후 3시 55분 - 4:45에 차지철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에 15분정도 불려가서 의견 개진; 10/6 토에 오전 9시 50분 - 10:10 감재규 중정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에 동석하여 보고.

비서실장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 아울러 미국의 대응에 대해 이를 조언할 사람을 전혀 부르지 않고 정보라인에서 결정하여 이를 외무부에 통보한 것으로 추정.  부분적으로 김치열 법무와 상의 (9/27 목 오후 4시 5분 - 4:45분, 40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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