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14 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2. 2009.03.03 미국이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다.
  3. 2009.03.01 1800년대의 세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역사/1900-1919 2010.01.14 08:39
학교 연구실에 있다 보면, 불청객들이 자주 찾아든다.  대개는 구걸, 책이나 교육자료 판매, 카드나 보험상품판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주부들이 있다. 방학중에는 가족중의 자녀와 같이 주부가 찾아와서는 신문을 들여 놓고는 사라진다.  이 신문은 화광신문이다.  화광신문은 일본의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다.  마산에는 해운동 세관 건너편에 돌로 지어진 웅장한 멋진 건물이 창가학회의 센터인 것 같다.  표시는 SGI로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정보를 찾아보니, 일본의 일련정종의 교리를 따르는 집단이고, 남묘호랑교라고 불리는 주문을 외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지원하는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에 일본에서 천황과 중국 부주석의 회견과 담화발표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인다는 비판을 받아 현 민주당 정권의 최대 불만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성사시킨 것이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는 원래 평화를 주창하는 단체이나 조직운영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합병하고, 이어서 한반도를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승리의 댓가로 아쉽기는 하지만, 사할린의 절반과 만주의 절반을 할양받는다.   이어서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하고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간도를 중국에 넘기고는 만주에서의 잇권을 보장받는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팽창능력이 단순히 군사력의 우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의 무장세력들을 해외로 팽창시키는데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즉 공식적인 그리고 민간 차원의 외교력이 강했다는 점을 여러면에서 드러내 주고 있다.  Shiosaki Satoshi, 2006, 日露戰爭: 또 하나의 戰, 아메리카世論을 動했던 5人의 英語名人, 祥傳社新書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관리들이 아닌 이들이 나서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이들의 여론에 힘입어 일본에 잠수함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국제적으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일본 국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미국이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왕조의 대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초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절차로 가게되는 데, 당시에 미국은 러시아와 주도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이준열사의 참석이 거절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국은 일찍이 러시아가 남아시아 방명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러시아 진출 저지를 막았고, 이러한 결과 러일 동맹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향할때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한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이동 경로를 일본에 통보해주고, 적대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한반도를 병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당시의 영국 외무상은 한반도 내의 모든 강대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주장하나, 한반도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영사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보낸다.  한반도의 영국 영사는 사실상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인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영국 외무상도 한반도내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 때에도 일본측은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위협을 들고 나오나 이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발틱함대과 극동함대가 괴멸당하고, 남은 것은 흑해함대정도 였으므로, 사실상 해양력을 약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일본의 해양력은 러시아를 능가하고 팽창하는 형편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있었다.  즉 러시아와 연대하면서 동시에 영국과도 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결국은 프랑스와 일본은 동맹을 맺고 프랑승 영토내의 독립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아시아 인들은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을 격퇴하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였으나, 곧이어서 일본은 아시아와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서양인들과 연대하여 아시아인들을 침략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 그 허울을 보게 된다.  요즘 일본은 아시아 통화기금, 아시아 연대론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고, 중국 역시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위해 역사, 사상, 경제, 무력 등의 다방면에 걸처 국가적인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현재 내가 객관적으로 국가 능력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조 시대의 왕조 전통에 사로잡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 관념이나 능력, 전통이 모두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등에 속속들이 당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참고문헌:
정애영, 2008,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 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61-84
박선영, 2008, "중화인민공화국의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 동북공정과 한국 학계의 대응논리: 1287-1358
김도형 기자, 2008, "연구자 기다리는 1430만건의 진실: 근대 일본 공문서 보고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겨레,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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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다.

역사/19세기 2009.03.03 15:45
미국이 한반도에 접촉한 사건들
1852년(철종 2년) 음 10월에 미국 포경선이 황해도 해주에 표착하다.
1866년(대원군 집정기) 음 7월에 미국 상선 제네랄 셔먼호, 평양에서 관민의 공격으로 전소되었다.
1868년(대원군 집정기) 음 3월에 미국의 군함 쉐난도아 호가 2년전 셔어먼 호의 생존자 수색을 위해 오다.
1871년(대원군 집정기) 음 4월, 淸나라 주재 미국 공사 로우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함께 군함 5척을 거느리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미국군은 강화도 광성보를 점령하였다(신미양요).  -> 지난 1996년(?)에 미국 와싱톤의 펜타곤(국방부 건물)의 지하에 지하철 역이 있다. 내려서 펜타곤을 관광하러 들어 갈수 있다.  물론 금속탐지기 같은 보안장치를 통과한 후에 들어갈수 있다. 이곳의 2층의 벽에는 지금까지 미군으로서 해외에서 미국을 위해 죽은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곳에 한국전쟁 Korean War이라고 쓰여져 있다.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알고 읽어보니 바로 신미양요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때 미국은 광성보의 장수기를 빼았았다.  크기는 가로 세로 3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장수기를 빼앗긴 치욕, 그 후에 미국이 한국에 반환하여 현재는 전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880년(고종 17년) 음 3월, 미국 해군준장 슈펠트, 군함 티콘데 로가호로 부산에 와서 통상을 청하다.  동래부사가 이를 물리치다.

1882년 (고종 19년), 음 4월 한미수호조규를 조인하다.
1883년 (고종 20년), 음 4월 미국 공사 프트가 착임하여 수호조교를 비준교환하다.
1885년 (고종 22년), 음 2월 미국 의사 알렌을 초빙하여 광혜원을 주관케 하다.
                           음 9월 미국인 메일을 총세무사에 임명하다.
1886년 (고종 23년), 음 3월 미국인 데니를 내무협판에 임명하다.
                            음 6월 미국으로부터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공원을 세우고 어학과 양학을 가르치다.
1888년 (고종 25년), 음 2월 鍊軍(군사 훈련) 교사 미 육군 소장 다이 등 3명이 내조하다.
1890년 (고종 27년), 음 4월 미국 해군 50명으로 궁권을 호위하였으나, 청나라의 항의로 철수하다.
1891년 (고종 28년), 음 6월 미국인 내무협판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 어선들의 제주도 출항 금지를 교섭하게 하다.
1892년 (고종 29년), 음 4월 미국인 모스를 초빙하여 철도부설을 계획하다.
1896년 (고종 33년 건양 1년), 양력 3월 미국인 모오로스에게 경인철도부설권을 허가하다.
1898년 (대한제국 광무 2년), 1월 미국인과의 공동 경영인 한성전기회사에 전차, 전기, 전화의 설치 출원을 인가하다.

이상의 기록을 미루어 보면 조선 왕조는 미국에 상당히 우호적으로 대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훈련도 맡기고, 일본과의 교섭에도 미국인에 의존한 것으로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양상이다.  물론 여기에는 청나라의 알선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서구 강대국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진 것에 비해 미국에 대해서만은 그런 의심을 별로 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은 1800년 초반에는 영국세력을 몰아내는 데 급급하였고, 이어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자체내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이어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서구 세력에 대해 아메리카에는 더 이상 손을 대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는 막강한 영국의 해군력에 의해 보장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체제의 확립, 그리고 서부 개척을 통해 신대륙에서의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에는 해외에 자원을 사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 시기에 고종은 미국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 기점으로 신대륙에서의 스페인 세력의 격퇴(쿠바 등)와 동시에 태평으로의 진출을 감행한다.  바로 1897년의 시점이다.  돌변한 미국은 1897년에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어서 필리핀 원주민의 독립운동을 배반하면서까지 1898년에는 필리핀을 미국의 영토로 만든다.  이제 본격적으로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지역의 공략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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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의 세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19세기 2009.03.01 16:35
1800년대에 나타난 역사적인 고민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1890년대 프랑스에서 나타난 드레퓨스 사건에서 나타난 국방부의 조사 은폐, 은폐를 역으로 이용하여 국가 주의를 강화하고 군인의 명예와 사기를 이유로 거짓을 진실로 꾸미고, 진실을 옹호하는 이들을(에밀졸라) 벌을 가하는 행태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서구 열강들이 지구에 독점적인 무역구조를 다투어서 만들어 내는 와중에 유럽에서 보면 극동에 해당하는 조선반도는 살며시 피해나간 이유도 궁금하다.  혹자는 조선반도는 노력에 비해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고 여겼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혹자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충분히 수탈할 수 있는 구조(중개무역)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무역구조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니면 중국과 일본을 대결하기에도 아직은 벅착 지정학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조선은 외세에 대해 봉쇄조치를 취했다가는 곧이어 무차별적으로 개방되는 상황을 맞게된다.  아니 조선은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중국을 통해서 외세와의 교섭을 위탁하거나, 아니면 왕의 측근에 외국인 고문을 임명하여 부족한 외교 교섭능력을 보완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조선왕조는 중국의존, 아니면 외국인 고문을 통해 외교 고섭을 선호하였고, 그 전략도 부국강병전략이라기 보다는 다른 외세를 이용하여 다급한 외세에 대처하려는 전략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믿을 외세가 없었다는 점이다.  믿을 외세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외교적인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국을 믿다가 일본을 믿다가 러시아를 믿다가 미국을 믿다가 그리고는 모두 당했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에서 1991년에 시작된 지방자치제도를 초기에는 모두들 민주주의 학교의 역할을 하리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곧 일년도 되지 않아 지역토호들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역할 아니면 중앙의 지배에 대해서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기능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교육장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나라에서 1950년에 이승만이 실시한 지방자치,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한 지방자치제도를 보면 곧 드러나는 데도 우리는 너무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수식에 속아 넘어 갔다.  나는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도 1800년대의 고민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한다고 본다.  민주, 자유, 공화라는 모두 별개의 말이라는 점이다.  민주는 하나의 정치적인 제도를 가리키며, 자유는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개념이며, 공화는 권력의 주체에 대한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반자유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독재(전제정), 반자유주의적 공화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현재의 우리의 경우는 경제적 자유, 그리고 시민적 억압이 민주주의(국민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라는 정당성을 바탕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혹자는 이럴 때 계몽군주적인 자유주의를 제시하기도 한다. 무식한 국민, 자유와 민주를 누릴 능력이 없는 인민에게는 전제적이나 독재정이 옳다는 것이다.  물론 현명한 군주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정조나 세종에 의한 시민적 자유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고민을 위해 역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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