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3.29 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2. 2009.03.24 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3. 2009.03.18 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4. 2009.01.29 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역사 2009.03.29 08:11
제목이 자칫 인종주의적인 표현이다.  물론 모든 백인이 모든 인디언과 흑인의 희생위에서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의 백인들도 노예, 특히 채무 노예로 살았고, 유럽대륙에서도 채무 노예와 동부 유럽에서는 농노가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 흐름, 즉 대채적인 흐름은 아프리카의 서중부의 해안가에서 잡해온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남미의 광산과 북미의 목화 플랜테이션, 아니 더 나아가 북미의 공장지대에서도 노예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혹자는 노예는 아주 오래된 전통적인 제도이므로, 노예가 신대륙으로 유입된적이 그리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족간의 전쟁을 통해 잡혀서 거래되었고, 실제로도 신대륙으로 백인 상인들에 의해 팔려간 흑인 노예들도 이들 아프리카의 부족들간의 내지 거래를 통해 수집되어 수송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수요가 대규모의 노예를 만들어 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동인은 자본의 등장, 돈을 버는 돈의 등장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착취가 가능한 수단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이 추상적인 논리에서는 자본주의의 착취의 기본 원리인 것으로 보이지만, 노예 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도 말할 수있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 유럽대륙의 일부 발달한 자본주의를 제외하고는 노예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공장노동 또는 플랜테이션, 광산 노동의 형태였다고 까지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상당수의 백인들이 농촌에서 쫓겨나고, 도시에 몰려들어 무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중 성공한 이들이 임노동자가 되었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자유노동자, 채무 노예가 되어간다.

흑인 노예들은 실제로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졌다.  영화 만딩고를 통해 보면 잘이해할 수 있듯이,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혔다고 다 신대륙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상당수의 국가들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 자체를 금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노예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한다.  즉 공식적인 금지가 현실적인 금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말이다. 잡힌 노예들 중에서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흑인들만 노예로 팔려간다.  실제로 노예들의 키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당시의 백인들보다도 키가 더 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인한 노예들도 보름내지, 한달정도 걸리는 신대륙으로의 여행에서 거의 선반에 쌓아놓듯이 운반하는 체제에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는 화장실 시설도 없었기에 상당수 아마도 30-40%정도는 죽거나 병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노예 장사가 이익이 많이 나기에 상당히 성행했던 것 같다.

남미의 경우에는 일찍이 노예제도가 발달하여, 광상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노예가 많은 도시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노예가 전체 도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하였다.  노예들중 일부는 채무를 갚거나, 노예들도 백인과 결혼하여 새로운 신분이 상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백인들 보다는 백인과 결혼한 흑인들이나, 인디언들도 상당수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노예를 거느리는 수는 많게는 수백명씩 거느리면서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20여명을 거느리고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예가 삶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가내 노동을 위한 노예도 상당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소작제도나 임차농이 발달해 있었다. 소작제도는 대개 수확량의 1/3을 지주에게 주고, 1/3은 농지 경작의 비용으로, 나머지 1/3을 소작농이 갖는 제도였다.  따라서 미국의 소작제도도 조선에 비해 전혀 착취의 정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심한 착취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차지농은 땅을 돈을 주고 빌려서 농사를 짓는 제도이다.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회사로부터 채무를 지게되고 이러한 채무는 자섹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어 결국 대를 이어서 채무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제도는 미국에서도 거의 196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법률적으로 불법화되고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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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역사 2009.03.24 08:27
19세기 세계적으로는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의 피해를 입은 계층의 반발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8세기부터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등장하고, 이에 따라 봉건제 농촌에서 소농이나 예속농으로 일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에서 임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유럽대륙, 신대륙, 그리고 나머지 제국주의 침탈의 대상이 되거나 아직 되지 않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장안노동, 노예노동, 농촌 노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임노동이 서서히 그러나 강고하게 등장하면서 공장에서 아니면 플랜테이션의 농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임노동의 형태와 동시에 존재하던 노예 또는 자유 노동자의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이다.

임노동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계층은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장인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장인과 도제제도를 통하여 제조직종의 특정분얄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인들이 공장제도를 통하여 기계를 도입하여 이제는 어린이나, 부녀자가 하는 노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잘 아시다시피, 기계파괴운동이 간헐적으로 그러나 이들의 반발에 의하여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19세기가 되면 일단 영국이나 유럽대륙에서도 장인노동은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정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사라진 나라이고, 유럽대륙은 그래도 서서히 파괴되지 않았나 싶다.  재미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들 장인 노동자들이 TRADE UNION을 세운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사용하고 노동조합의 명칭이다.  trade union이라는 말은 실은 장인노동자들의 단체임이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소극적인 그리고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주로 한다는 이유로 도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미국은 이들 장인노동자들이 독자적으로 19세기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주동한다.  이후에 서서히 숙련노동자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19세기 말에가서야 나타난다.

19세기는 실은 임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고, 장인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예노동이 판을 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않을까 싶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거래가 19세기 중엽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지되지만, 밀무역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고, 플랜테이션에서는 노예제도를 선호하고 있었고, 매매춘이나, 상당수의 가내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로는 채무노예라고 불리우는 노예들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신체포기각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노예는 아니지만, 이제 막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나, 농촌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이들은 자유노동자로 살아갔다.  자유 노동자라는 뜻은 이념적인 뜻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운 만큼 도시내의 각종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물장사, 오물치우는 일, 거리에서 사람들을 나르는 일, 짐을 나르는 일, 음식물 장사 등은 거의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심할 경우에는 매매춘으로 들어가거나, 그래도 편하게 다시 노예상태나 다름없는 가내일꾼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의 등장으로 고용된 신규 노동력은 어린아이들과 부인노동의 등장이다.  이들은 남성노동의 감소를 가져와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전략의 하나로 일단 아이들의 노동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인 노동의 등장은 가족의 전략에서는 가장 최후의 전략의 하나였다.  물론 일부 선진적인 영국의 도시에서는 부인노동자들이 선진 여성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노동운동을 벌인 일이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었다.  가장 노동운동이 덜 필요한 이들이 나선 노동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임금노동의 필요성이 적은 여성들이 나서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한계일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자신의 객과적 처지를 알수는 없고, 그들의 불만은 항상 상승하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집단과 비교하고, 그럴때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아주 피곤하게 종일 일을 하고 남들과 말할 기회도 없고, 세계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나, 인적인 조직적인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시간도 없거니나, 설사 불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 고립되어 집합행동을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국에서 일찍이 여성노동과 어린이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노동시간은 19세기 초에는 하루에 12시간을 넘어섰고,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하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에서는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외에 다른 생각이나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맺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독일을 선두로 해서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 등장한다.  맑스주의 이념이 공식적으로 인터내셔널을 통해 채책되고, 엥겔스, 그리고 카우츠키와 베른쉬타인을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현재의 독일의 사민당은 바로 1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에 사민당은 전체 유권자의 20%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농업문제, 수정주의 문제를 전환점으로 기폭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정당으로 지금도 유럽과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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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역사 2009.03.18 08:19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단축, 그리고 임금의 향상이라는 문명의 진보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의 진보라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곧 알 수 있다.  즉 소위 자유 노동자들 또는 자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나, 당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귀족이나 지주계급은 아니었고, 이제 장거리 무역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이들, 그러면서도 봉건의 속박에서 풀려난 계층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였다.

노예들에 비해서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19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노예제도가 철폐된 시기이다.  물론 프랑스는 조금 일찍, 미국은 남북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조선은 갑오경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예가 조선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에도 이미 19세기에 접어들면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 노예의 수도 격감하고, 그 값도 비싸진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폐지와 별도로 실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노예제도는 존속하기 어려워진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사건을 이해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동시간의 역사에서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중세시대나, 원시사회가 근대 문명의 발전단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의 노동과 풍족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짧은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 상태에서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해가 뜨면 일하기 시작하고, 하가질 때까지 일하고, 겨울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적어도 15분씩은 추가로 일하는 상태가 근대 초기의 모습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는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하루 12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19세기 초 이전에는 12시간 노동이 대부분이었고, 19세기 초에 일부 선진적인 자각을 가진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제한을 말할 때에도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의 상태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부녀자, 아동 가릴 것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ㅏ.

가장 심한 착취가 일어나고, 가장 일찍 근대 공장이 발달한 영국에서 비로서 정책적으로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부녀자 노동, 아동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작한 것이 12시간 노동제의 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새도 없는 부녀자, 어릴 때부터 공장에 들어와 10살이 넘으면 늙어버려 생식 능력이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을 두고는 건강한 노동자를 다시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말로만 자유노동자이지, 실은 노예의 특징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노예제도가 유지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아무리 쾌적하고 일생이 보장되는 삶을 누린다해도 노예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없었고, 결혼의 자유도 없었고, 그래서 가능하면 자신의 일대에서 이승의 고통이 종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노동시간은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하루임금제도를 채택한 곳에서는 하루에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일을 시키는 것만이 고용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이 오래 떠서 오랫동안 일을 시킬 수있는 여름에는 하루 임금제도를 채택하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성과급제를 실시하였다.  오늘날 5월 1일이 노동절이 된 것은 미국에서 1886년(?)에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였다.  현대인들은 일에 중독되어 사는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주로 미국, 영국의 청교도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다.  일어나서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일을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의 하나님의 소명처럼 여겼다.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이 일을 적게하는 사회라고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사회를 관찰하고 주장한다.  아마도 미국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분명히 과거에 비해서는 노동에 대한 관념과 여가에 관념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조선은 아직 19세기에 그다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일본에 지난해 말에 방문해서 오오다와라 성의 박물관에 가보니,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에 휴대용 해시계같은 것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시간관념이 일찍 발달한 것을 알 수있다.  우리의 경우에 조선시간 조정의 시간관념은 아직 아침부터 일찍 3-4시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오락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현재의 근무체제와 조선시대의 관료들, 아니면 공식 기관의 근무체제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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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역사/17-18세기 2009.01.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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