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3.15의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3.18 남파 앞 슈산 보이
  2. 2010.03.15 만인보에 나타난 마산의거
  3. 2010.03.10 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남파 앞 슈산 보이

교양 2010.03.18 10:08

역사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은 항상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은 항상 공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현장의 사실이 드러날 수록 드는 생각이었다. 어제 3.15 아트 센터 대공연장에서 문종근 제작 연출의 창작 뮤지컬 “삼월이 오면이”을 관람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오성원에 대한 기록과 후세의 평가는 그저 하나의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편입시키지는 못하였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시청앞에서 총을 맞고 죽어간 이들 가운데에는 의외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3월 16일부터 28일까지 마산에 머물면서 취재한 기록을 남긴 동아일보 이강현 기자는 “이번에 희생된 7명의 유가족집을 찾아가 보니, 공교롭게도 거의 모두가 조석을 걱정하는 빈한한 가정들이었으며, 그런 환경속에서도 부모들은 가르쳐 보겠다고 가진 고생을 무릅쓰고 피땀을 흘린 집안 뿐이었다”(1960. 4월 10일 발행한 잡지 [새벽] 5월호: 69).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어려운 집안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가장 격렬히 시위에 참여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룡 (1964, 3.15 마산의거의 역사적 고찰, 마산시사 사료집 제 1집, 마산시사 편찬위원회: 259)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3월 15일 최후까지 저항한 이들은 밤늦게 무학국민학교를 탈출한 50여명의 추산공원으로 올라가자, 창원군청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데모대와 합류하여, 같이 화장장(자산동)을 지나 서원골을 둘러, 계곡을 따라 내려와서 마포중학교(의신 여중) 교정에 집결하니, 200여명이 남았다. 이들은 “학생과 구두닦이, 직공 등으로 구성된 정예들이다”.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나, 열심히 살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던 이들이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가장 강렬히 희망하는 이들이 격렬히 저항하였고, 또 이들에 의해 3.15는 살아있고, 민주주의는 그 구렁텅이에서 구출된 것이다.

오성원 역시, 고은의 만인보에 등장한다(23 : 191). “살아 있을 때 국숫집 지나가면 국수가 먹고 싶었다 구름을 보면 구름이 되고 싶었다”. 어제 공연에서 오성원이 부른 노래 “빈 몸 하나”의 가사에 구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보리수 다방의 서마담이 성원이에게 국수를 제공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수와 구름. 먹을 것과 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국수와 꿈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까?

오성원은 구두닦이이다. 어제의 공연에서는 주제가로 꼽을 만한 노래로 나는 ‘슈사인 보이’와 ‘구두닦이 헌장’ 중에서 고르고 싶다. 구두 닦이 경력 5년차의 21세 오성원은 “14세 되던 해에 삼촌집을 나와 구두닦이로 자립생활을 하여왔다. 이날 밤 오군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가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원래 고아이니만치 누구하나 오군의 시체를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알게 된 동료 구두닦이들이 푼돈을 모아 광목도 끊고 베도 사고 관도 가져다가 오군이 어렸을 때 뛰 놀던 산 중턱에다 장례를 치러주었다”(이강현, 1960: 70). ‘담배 파는 10대의 직업 소년 10명은 담배장수 밑천의 한귀를 짤라 관을 샀다. 그들은 경관에 사살된 동료 오성원의 상여를 메였다. 10대 소년의 장열은 눈물 바다가 된 거리를 구비쳐 흘러, ’길가는 나그네여 여기 길잃은 민주주의를 찾으려다, 3월 15일밤 무참히도 떨어진 21년의 꽃봉오리가 누워 있음을 전해다오‘라는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설 무덤을 향하여 올라갔다“(김태룡, 1964:286-287). 1939년생, 창원 팔룡동에서 출생하여 다시 팔룡동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들이 길을 찾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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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에 나타난 마산의거

교양 2010.03.15 16:08
2006년 3월에 출간된 고은, 만인보 21-23권은 1960년대 전후의 혁명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때 혁명이라 함은 아마도, 1960년 3-4월 혁명과 1961년의 군사 쿠데타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고은 시인께서 그리 생각하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시집 3권에는 반복적으로 쪼는 지속적으로 마산의 열사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김주열과 그 일가를 그리고 있다.  시는 대개 당시 살던 사람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김주열에 대해서는  21: 28-30, " 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김주열의 형인 김광렬 21: 238-239, "경찰의 총사격이 이어졌다.  뒷산으로 흩어졌다.  주열은 없고, 광열은 있다."
김주열의 모친인 권찬주 여사 22: 28-29, "그 뒤 죽은 아들이 바다 및 홍합대신 떠 올랐다.  그 어머니에게 죽은 아들도 산 아들이었다."
김주열의 시체를 낚는 모습 21: 276-277, "김주열의 시체였다.  경찰이 던져버린 시체가 26일만에 밀려왔다.  26일만에 떠올랐다.  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어부 김기돈, 22: 26-27, "거룻배가 기우뚱 거렸다".

때로는 시나 문학이 사회과학이상으로 현실을 잘 표현한다고 느낄때가 있다. 역사적 감수성이란 오랜 정신적인 수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 같다.  아마 고은 시인은 1960년 3-4월 마산의거를 시대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개인들의 이력을 많이 들여다 보신 것 같다.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열사들은 사후에 너무 우상화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도 사람이었고, 무서웠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부모님들이 그냥 데모를 나가면 나가지 말라고 말리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데모도 하지 않으면, 비겁자가 되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우리를 저렇게 무시하는 데 사내자식이 배운 놈이, 아니 이 시대에서 두발 걷고, 눈을 뜨고 사는 놈이 그러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만인보에는 김효덕의 아버지, 21: 40-41,
김효덕의 어머니, 21: 214-215
김영호의 부친인 김위술, 21: 42-43
김영호(3.15에 사망), 21: 216-217
김영호 (마산 중앙중 3년)의 친구, 22: 25
의규군의 아버지, 21: 62-63
아버지의 염불 (전의규의 부), 21: 224-225
영준의 어머니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21: 220-221
김영준, 22: 103-105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21:60-61
김용실, 22: 66, 23: 168-169
김영길, 22: 77
효덕이, 22: 82-83, 90-91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21: 76-78
노원자 (마산 제일여고), 21: 80-81
김종술 (마산 동중 3년), 22: 19
김용준, 23: 64-65
구두닦이 오성원, 21: 46-47
오성원, 23: 191
박철수 (국민학생 사망), 21: 310-311
유대수, 22: 201-203
두 혼백, 21: 222-223
두 주검, 22: 119
화물차 감옥 (유병호의 경험), 21: 252-254
김평도 (총상), 22: 42-43
옥채금 (김평도의 부인), 23: 289-291

신형사 (마산경찰서 사찰계), 21: 245-246
박종표, 23: 80-81
등 이상이 마산의거와 관련된 인물들을 만인보에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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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시사 2010.03.10 10:44
어제 오후에 KBS창원 방송에서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방송작가가 김주열의 시체사진과 또 다른 사진을 들고 시민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냐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냐 하면 3인조 5인조의 상호 감시 투표를 생각해 낸 사람은 공산교육을 받고 그 수법을 모방한 것이고, 김주열을 사살하고, 시체를 유기하여 바다에 넣은 자도 일제시대에 한인을 고문하고 유기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투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산일보사, 1960,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마산의거와 4월 혁명의 성공(마산일보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16-17쪽).
"3.15 정부통령선거의 새벽 동녁은 텃다.  이날 아침 시내 47개 투표구에서는 상오 7시 부터 일제이 투표가 개시되었다.  투표소부근 및 10미터 통로지점에는 새끼줄을 늘려 놓고, 정복경찰관과 완장낀 종사원이 통행인들을 점검하였고, 투표소 경내와 입구부근에는 공무원 완장을 낀 종사원들과 사복경관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유권자들이 산발적인 투표를 했는가 하면, 일부투표소에서는 삼엄한 분위기속에 조직적인 시간별 방별투표로써 흰 자유당 완장의 남녀노장유권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반월동 제 1투표소의 경우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방별투표가 진행됨으로써 급한 용무로 아침 일찍 투표소에 간 유권자의 개별적인 투표로 거부했고, 번호표도 방장이 장악하고있는 관계로 시간전에는 개별적인 투표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반월동 제 2투표소에서는 산발적인 투표진행을 했으나, 기자의 투표광경 취재의 요청에는 불응했다.  간혹 사복경찰관들의 순찰차량이 오고가고 했는가 하면, 공무원 완장을 종사원들은 '뉴스맨', '후랫슈'를 극도로 저지하면서 투표소 부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마저, 꺼려하는 경향으로 전체 선거 분위기는 전례없는 공포 속에 몰아넣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야당참관인을 강제축출 한데 대해 소동을 야기시키는 등 어색한 일면도 보였다".

이러한 선거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자유당 조직위원장 이존화다(마산일보사, 1960: 118).  이존화는 "3.15 부정선거 강행에 있어서 3인조 및 5인조 공개투표의 창안자로 일약 유명해졌다.  애당초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그가 자유당의 조직위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자유당 내에서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3인조의 실시로 조직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했고, 이정권의 공신으로 등장했다.  이기붕은 그후 그를 지극히 신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공산교육을 받아온 자다.  남로당원으로서 대구 10.1 폭동 주모자라고까지 알려져 있다.  19세시에 고향인 완주를 떠나 만주에서 봉천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거기에서 공산당식 훈련을 받으며, 공산주의 정신에 침투되었든 자라 한다.  그래도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고 자부하면서 8.15이후 남로당원으로 암약을 해 왔던 것이다.  그후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6.25 당시에는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인조도 그의 공산당식 수법이 되살아난 결과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관제공산당 조직의 명수인 자유당의 조직원장까지 되었으니 자유당 안하는 사람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렸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공산당식 수법을 채용하면서까지도 정권을 연장해 보겠다는 자유당의 지긋지긋한 저의는 이미 민의가 그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일까?"(1960. 5. 29일 국제신문을 인용).

김주열을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자도 역시 일제시대의 악덕 경관이었다(사단법인 3.15의거 기념사업회, 2004, 3.15의거사: 394-395).   박종표는 일본 헌병출신이었다. 일정 때 그의 이름은 아라이(新正 )로서 아리이 고조라고 불리웠다. "그에게는 허다한 죄상이 있으나, 그 중에 정장호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1945년 6월 어느날,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장호의 집에 가서, 정장호를 체포하고,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게 만들고"는, 탈옥도주를 가장하여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던지고 말았다.  "집대문간에 들어서자 마자 정장호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정장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저승길로 떠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종표에게 김주열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것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경찰의 관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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