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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3 일본의 이중성
  2. 2010.01.14 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3. 2009.06.26 19세기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4. 2009.06.24 국가를 깨끗하게 만든 나라는 선진국이다.
  5. 2009.06.11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6. 2009.04.06 조선후기의 대외관
  7. 2009.02.04 일본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였나?

일본의 이중성

역사/1900-1919 2010.02.13 21:19
최근에 토요타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일본인들을 특징짓는 이중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일본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흠이 있다고 가져온 물건에 대해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곧 고쳐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개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고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 하나 비용을 받거나, 따져서 고쳐주게 된다.  일본인을 말할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안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말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겪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한 미소이면서 동시에 돌아서면 아주 차거운 표정들이다.  아무도 걸들떠 보지도 않으면서도, 직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근대사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만몽,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시베리아 출병이다.  이는 1918년에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외교에서의 이중전략이 시작된 시점으로 친다는 점이다.  이때 이중전략이라는 것은 이미 한국의 경우에는 1904-5년의 러일전쟁시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취했던 이중적인 정책에서 드러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열강들에게는 1918년 러시아 출병을 통해 드러난다.  즉 미국의 랜싱국무부 장관과 미국 주재일 일본대사 사이에 체결된 중국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권보장을 보호받는 조약(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호개방 조약이라고도 표현한다)을 말한다.  러시아와는 이미 1908년에 만몽지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보장받았고, 러시아 혁명중에는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와 만주철도회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상황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통해 1918년의 러시아 출병,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에도 남아서 (약 7만명) 거의 1923년정도까지 싸우다가, 곧바로 다른 나라에 앞서서 소련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는다(1926년).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과도 갈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이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컫듯이 일등국가가 되었다.  즉 1차세계대전후에 해군 군축을 논의하면서 미국, 영국의 톤수가 5, 그리고 일본이 3의 비율로 세번째로 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은 소위 일등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하면서, 바로 그 전날에는 미국과 평화를 논하던 일본에게 당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의 이중성은 세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일본은 대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선전포고를 감행하는 관행을 지닌 것 같다.

일본의 내부를 보면 이러한 이중성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1910년대의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분석한 것을 보면, 일본은 처음부터 국가 지상주의를 가르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에 더하여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을 가르친다.  따라서 사회성을 기를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일본의 교육에서도 경제학이나 국제관계학 같은 것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오로지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식으로 배우게 된다.  물론 이와 배치되는 경향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해외에서 배운 사람들도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는 대개 국가의 중요성을 개인보다 더 강조하고, 사회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이 소위 일등국민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은 채 지금껏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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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역사/1900-1919 2010.01.14 08:39
학교 연구실에 있다 보면, 불청객들이 자주 찾아든다.  대개는 구걸, 책이나 교육자료 판매, 카드나 보험상품판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주부들이 있다. 방학중에는 가족중의 자녀와 같이 주부가 찾아와서는 신문을 들여 놓고는 사라진다.  이 신문은 화광신문이다.  화광신문은 일본의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다.  마산에는 해운동 세관 건너편에 돌로 지어진 웅장한 멋진 건물이 창가학회의 센터인 것 같다.  표시는 SGI로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정보를 찾아보니, 일본의 일련정종의 교리를 따르는 집단이고, 남묘호랑교라고 불리는 주문을 외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지원하는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에 일본에서 천황과 중국 부주석의 회견과 담화발표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인다는 비판을 받아 현 민주당 정권의 최대 불만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성사시킨 것이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는 원래 평화를 주창하는 단체이나 조직운영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합병하고, 이어서 한반도를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승리의 댓가로 아쉽기는 하지만, 사할린의 절반과 만주의 절반을 할양받는다.   이어서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하고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간도를 중국에 넘기고는 만주에서의 잇권을 보장받는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팽창능력이 단순히 군사력의 우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의 무장세력들을 해외로 팽창시키는데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즉 공식적인 그리고 민간 차원의 외교력이 강했다는 점을 여러면에서 드러내 주고 있다.  Shiosaki Satoshi, 2006, 日露戰爭: 또 하나의 戰, 아메리카世論을 動했던 5人의 英語名人, 祥傳社新書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관리들이 아닌 이들이 나서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이들의 여론에 힘입어 일본에 잠수함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국제적으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일본 국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미국이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왕조의 대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초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절차로 가게되는 데, 당시에 미국은 러시아와 주도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이준열사의 참석이 거절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국은 일찍이 러시아가 남아시아 방명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러시아 진출 저지를 막았고, 이러한 결과 러일 동맹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향할때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한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이동 경로를 일본에 통보해주고, 적대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한반도를 병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당시의 영국 외무상은 한반도 내의 모든 강대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주장하나, 한반도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영사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보낸다.  한반도의 영국 영사는 사실상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인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영국 외무상도 한반도내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 때에도 일본측은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위협을 들고 나오나 이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발틱함대과 극동함대가 괴멸당하고, 남은 것은 흑해함대정도 였으므로, 사실상 해양력을 약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일본의 해양력은 러시아를 능가하고 팽창하는 형편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있었다.  즉 러시아와 연대하면서 동시에 영국과도 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결국은 프랑스와 일본은 동맹을 맺고 프랑승 영토내의 독립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아시아 인들은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을 격퇴하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였으나, 곧이어서 일본은 아시아와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서양인들과 연대하여 아시아인들을 침략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 그 허울을 보게 된다.  요즘 일본은 아시아 통화기금, 아시아 연대론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고, 중국 역시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위해 역사, 사상, 경제, 무력 등의 다방면에 걸처 국가적인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현재 내가 객관적으로 국가 능력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조 시대의 왕조 전통에 사로잡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 관념이나 능력, 전통이 모두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등에 속속들이 당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참고문헌:
정애영, 2008,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 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61-84
박선영, 2008, "중화인민공화국의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 동북공정과 한국 학계의 대응논리: 1287-1358
김도형 기자, 2008, "연구자 기다리는 1430만건의 진실: 근대 일본 공문서 보고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겨레,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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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19세기 2009.06.26 08:13

오늘의 정치를 보면 강고하게 대한민국의 전통은 역시 끈질기구나 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나는 지속적으로 왜 조선이 일본과 따지고 보면, 별로 경제력 그 자체만 본다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던 19세기에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갈리게 된었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날  적어도 일본이 대한민국 보다 일인단 국민 총샌산 면에서 2배이상 차이가 난다면, 조선조 시대에는 그저 20% 정도 더 많았던 수준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의 국가는 강하고, 도시는 번창하고, 사람들은 규율이 잡히고, 대외 문화의 유입도 풍부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곧바라고 생산력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에 의존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개인들의 이익 만을 위해, 고종도 오직 종묘 사직의 보전과 일척의 안일을 위해, 유학자들은 국가보다는 종묘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였던 것이다.  이완용도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현재 여의도 2배 정도의 이익을  취하면서 일본에 붙어 매국 행위를 자행하였다.  직접 세금을 일선에서거두는 수령이라는 직책을 팔고, 따라서 이들 수령들은 돈을 주고 산 수령직책에서 이익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년에 5번정도 수령이 바뀌었다고하니, 수령의 매관 매직을 통해 국가의 관료들이 이익을 취한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지키는 병사는 없었고, 오직 서울을 지키기 위한 강화도 병사와 서울의 궁궐을 지키는 병사만 있었고, 나머지 백성들을 지키지는 못해, 청군과 일본군, 프랑스군, 미군, 영국군, 러시아군들의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지켜줄 수 있는 조선의 군인들은 없었다.

관료들은 때로는 스스로 관변 단체를 구성하여 독립협회를 때려잡고, 다시 이들을 백성들이 몰아내는 상황이 연출되고있었다.  이는 독립이라는 말도 쓰지 못한던 때를 지나, 이미 외세에 찢기고 찢긴 조선왕조의 말기에 대한 제국을 세우고, 중국은 자주라는 말은 허용해도 독립은 혀용하지 않던 시기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져, 만민공동회도개최하고, 독립신문도 만들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던 기개를 북돋아 이를 국가의 기틀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국가 관료들이 조직한 관변단체에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며칠 전에 발생한 폭력적 관변단체가 시민들이 자발적 행위를 몰아낸 사건이 그대로 현재에도 재현되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의 백성들은 사법, 입법, 집행을 모두 책임진 수령에 의해 완전히 농락당하고있었다. 수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면, 그 자체가 범죄가 되어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백성들은 수령의 가학, 양반들의 농간, 지주들의 지세 징수 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현재 우리가 정부에 비판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공개적인 토론을 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이미 조선왕조때무터 존재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 계속되고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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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깨끗하게 만든 나라는 선진국이다.

역사/19세기 2009.06.24 08:02

개인이 잘 사는 나라는 많다.  설사 그 나라의 백성은 곤궁에 처해도 그 나라의 특정 개인이 잘사는 나라는 많다.  그러나 빈구격차가 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간의 적대감, 연대감과 인간성의 상실, 자연에대한 생태적관점의 부족, 신에대한 광적인 숭배가 자리를 잡고 있다.  19세기에 일본과 한국은 개인들의 삶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즉 일본이 조금 더 잘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저 조금, 약 20%정도 더 일인당 국내 총생산이 높은 정도이다.  현재에 비해서도 오히려 더 작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현재는 화폐가치로만 보면 2배이상의 경제적 격차를 보이고 있다.  쇄국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의 규모로 본다면 적어도 조선이나 일본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아니면 일본이 더 쇄국의 정도가 큰 것으로 되어 있고, 시장의 발달 수준도 비슷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현재도 일본에 비해 한국은 해외 개방의 정도가 훨씬 높다.  즉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량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한국에 비교가 되지 않ㅇ을 정도로 국내 소비의 비율이 높은 나라이다.  따라서 쇄국이나 개방이 경제발전을 가져온다고 보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조선과 일본의 미래를 가르게 되었을까?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본다면, 국가의 대외 통제 능력, 국가내의 지방분권의 정도, 다르게 표현한다면 국민들의 활력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을 보인다.  일본의 국가는 대외적으로 매우 개방적인 지정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쇄국을 하여도, 적어도 나가사키에서는 네덜란드와 청나라 무역선이 기항하고 있었고, 이를 철저히 관리하고 여기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1853년에 미국과 무역을 시작한 후 부터는 매우 적극적으로 서양의 산업기술을 받아들여,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산업화가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의지를 가지고 산업화를 시작하였고, 1840년의 중국의 아편전쟁(중-영전쟁), 1860년의 베이징 함락이라는 사건에 대해 일본은 군사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간취하였다.  이어서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국가체제로 나가는 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조선의 정한론도 이후에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반면 조선은 대외적으로 중국에 매년 조공을 보내고, 일본에 대해서는 1811년에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보냈고, 대마도에는 1855년 1858년, 1860년에 걸쳐 사신을 보내나, 여기에서 별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내적인 대처를 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미 망해가는 청나라에 기대는 정책, 자율적으로 대외적인 대처를 하려는 의지의 부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일방적인 정보, 위기를 대처하기 보다는 모면하려는 자세가 조선정부의 능력이었다.  이는 당시에 세도정치에 의해 정부가 유지되는 정통성없는 정치인들의 한계였던 것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몇몇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정책을 좌지 우지 했던 것이다.

대내적인 정치의 형태에서 조선은 내부의 능력을 호라용하지도 못하고, 소수가 의사결정을 장악하고, 이를 곗혹유지하기 위해 유능한 이들의 정치 진출을 막았다.  백성들의 진취성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폐색시키면서, 백성들은 국구의 정권, 왕조와 완전히 격리되거나,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에 어찌되었든, 신문을 통한 의사표현, 귀족원과 중의원의 구성, 헌법의 제정, 지방 각지의 번 세력들의 저항과 의사표출 등이 조선과는 다른 점이다.  이들 번들을 현으로 바뀌기 전까지 매우 독자적으로 대외적으로 교섭하고, 무기도 제조하고, 비공식적인 무역도 발전시키게 된다.  국가가 단일 명령체제가 아니라, 분권화된 체제에서 각자의 활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면, 지방의 활력을 살리고, 국가가 대외적으로 유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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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역사/19세기 2009.06.11 08:03
19세기 역사에서 안타까운 점은 왜 조선은 같은 조건 (쇄국)에서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느냐일 것이다.  분명히 조선과 일본은 쇄국의 측면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일본이 더 쇄국이 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 규모를 보면 조선왕조와 일본 토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비슷한 정도의 2%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부분적으로 화란(네덜란드)과 대외창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쇄국 이전과 이후의 국가의 능력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역량이 아닌 민간의 역량은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고, 물론 일본이 시장경제, 문화적인 활성화,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더 도드라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국내 경제의 활성화, 해외 문화의 유입과 국내의 고급문화의 융성, 마을 단위에서 보여지는 공동체 유제의 존속 등은 일본이 더 강고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의 국가 능력, 즉 과세와 징수, 강병정책,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해외 사례의 학습, 국민의 여론을 의식한 정치라는 면에서 일본은 한국의 정국(왕조 또는 국가 능력)에서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조선의 과세는 이미 1400년대에 최고의 융성을 보였다가, 1600년대에 전쟁을 기점으로 그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이러한 ㅅ상태를 1800년대까지 이어진다.  군대 역시, 고종도 여러차례, 서양의 무기체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왕실의 안위도 보존하기 어려울 만큰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례를 배우기 여러차례 정부주도로 파견하였으나, 이들이 정부에 보고한 것은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이었고, 정략적인 경우가 많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어었다.  일본의 경우에 어찌되었던 의회를 구성하였으나, 1897년 독립협회가 요구한 의회의 설립에 대해 고종은 거부하고, 오히려 탄압하였다.  일본측은 부국 강병을 위해서는 과세를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 인민들의 여론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생가하였다.  또한 일본은 천주교가 일본에 의료와 교육사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국가가 나서서 인민의 마음이 천주교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 나서서 의료에 교육사업을 선점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쯤 되면,그것이 아무리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위민 정책을 취했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여론 정치를 도입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는 여전히 국가의 능력을 키우기 필요한 것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미 대외적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종속이론가들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론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부국은 강병에서 오고, 강병은 대외관계의 전략적 조절 능력에서 온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자주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적인 정치적 사회적 통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내적인 통합이 되지 않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적대와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친다.  물론 객관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그 기반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국내 여론의 통합이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관건이 되는 점은 공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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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외관

역사/19세기 2009.04.06 16:56
조선은 1600년경을 전후로 해서 일본이라는 섬나라와 그리고 대륙에 있는 청나라(처음에는 후금, 그리고 나라이름이 변하여 청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많은 이들이 전쟁노예로 이들 나라에 끌려 갔다.  우리 지역(창원, 함안, 웅천)에는 주로 임진왜란와 정유대란때 일본의 남쪽지역(오사카)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조선 정부차원에서 통신사로 갈때마다 이루어지고, 상당수의 포로들이 송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 벌써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설사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하여도, 조선에 돌아올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일본에서 이미 가족을 형성하였으므로 그대로 살게된다.

일본은 당시에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고 있었고, 왜구라는 이름으로 중국 남부해안가,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무역에 진출하고있었다.  1600년대의 덕천 막부에서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지속하였고, 남부 중국 해안가와는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체제도 우리보다는 훨씬 질서있고, 문화도 발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세계지도를 갖고 않았던데 비해 일본은 이미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의도적으로 일본은 미개하고, 조선은 소중화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지만.  특히 1763-4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과 김인겸은 그들의 일본 기행 기록을 통해 일본의 문물이 발달하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조엄은 고구마를 도입하고, 뒤이어 수차(물레방아, 관개시설) 같은 것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1866년에 청나라 북경에 간 홍순학은 그의 나이 57세에 국가 책무로 갔으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는 것, 그리고 경기지역을 떠나본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6개월에 걸쳐 북경을 다녀오면서 안전부절못하고, 북경에서 본 것은 강대국 청나라를 본다.  그러나 생가해 보면, 당시의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두차레 겪고 난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공격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북경을 갔으면서도, 국제정세파악은 제대로 보지못하고, 부모슬하를 떠나는 것만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오늘 나는 세계지도를 본다.  북한이 쏘아올린 3단계 로켓 발사체가 어디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미국은 핵무기 확산저지의 기회로 삼고 있고, 일본은 해외팽창을 위한 군대보유를 금지한 헌법의 개정의 기회로 삼고 있다.  우리는 7월에 고층의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미사일 300Km이상의 사거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을 자기네 경제권 내에서 통제하려 할 것이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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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하였나?

역사/17-18세기 2009.02.04 15:15

일본 토요토미에 의한 임진 침략, 후금과 청나라에 의한 정묘호란 등의 두차례의 조선반도 침략은 조선을 일거에 약소국으로 전락시키고, 아니면 약속국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조선은 그 멸망의 시기까지 당시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서구 열강과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버퉁거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청나라, 일본, 그리고 조선이 각기 다른 길로 가게된 요인은 무엇일까

일본은 이미 1500년대 포르투갈로 부터 조총을 받아들이고, 전쟁의 소요돌이에서 전쟁무기와 실용주의적 경제관, 근검절약하는 습성, 인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능력 들을 발전시켰다.  이어서 토구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네덜란드에게만 무역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은광산을 개발하여 서구와 무역을 전개하고, 내적으로 외부에서 볼 때에는 온 나라가 하나의 군사 요새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민들의 법질서에 대한 복종의식이 강하고, 국가통치기구들이 상당한 정도 규율된 형태로 움직인다.  조선의 통신사가 오오사카에서 다음으로 이동할 장소로 물건을 보내놓고, 그것이 전혀 손상됨이 없이 도착한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도 일본에서 두차례 지하철에서 물건을 놓고 내린일이 있는데 빠른 시간에 찾아서 갖다주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 일이 있다.  물론 군사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제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문화된 군인의 수가 8만명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시의 활력, 규모, 상업의 발달, 인민들의 이동 등이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후금에서 청나라를 세운 이후에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서 적어도 17세기까지는 영토를 넘히는 작업에 몰두하고 실제로 현재의 중국의 국경선을 획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중국은 러시아와 부딪쳤고, 이에 러시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북부,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부근에서도 협상을 벌이고 자신의 영토를 확정하게 된다.  조선은 안탑깝게도, 영토 확정의 노력에는 나서지 못한 것으로 봉니다.  다만 청나라와 백두산 정계비를 통하여 영토획정에 나섰으나, 이 역시 현재까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혹자는 백두산정계비에 나타난 해석을 통해 요하, 할얼빈, 아무르 강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획정하는 것이 옳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아무튼 국경선에 대한 관심이 추세를 따라기 못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그리고 약 1만여명에 달하는 표류자들이 일본을 방문하였고, 또는 무역을 위해 대마도에 나간 상인들을 통해 일본의 현황을 보기는 하였지만, 소중화의식이나 문화적 우월의식을  표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소수가 일본의 문물의 발전에 놀라기는 하였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지만, 대부분은 시급하게 위협적이라고 보지는 않아서 심각하게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발전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의 능력배양에 미친 영향은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역시 17세기에는 자신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조선은 아직 소중화의식(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충성, 또는 주자학주의자들의 우세)이 남아 있었고 내부 파벌 싸움이 외부환경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싹튼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외를 비교하는 의식이 싹튼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에 비해서 늦었고, 서구는 이미 조선반도 주변을 프랑스와 네덜란드 배들이 넘나들면서 호시 탐탐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상인들, 해적들이 조선반도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아무리 영정조의 시기를 높이 평가한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1700년이 넘어서야 군사력이 임진란 이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너무도 늦었다, 느렸다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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