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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2 민족자본과 민족국가의 관련성
  2. 2010.02.18 식민지 이해법
  3. 2010.02.17 왜색 도시 마산의 독립만세운동 2
  4. 2010.02.16 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1
  5. 2010.02.16 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6. 2010.02.16 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7. 2010.02.15 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8. 2010.02.13 일본의 이중성
  9. 2010.02.12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10. 2010.02.12 노동자와 볼세빅

민족자본과 민족국가의 관련성

역사/1900-1919 2010. 2. 22. 10:27
민족자본을 우리나라사람들이 운영하는 자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조선인, 한국인이 운영하는 자본은 역사상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민족자본이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총독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군대와 세금 수취를 장악하고, 식민지 경영을 시작하였던 시기일 것이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귀족 관료층들, 지주계층들은 설사 일제가 1910년에 회사령을 통해, 한반도내의 회사의 발전을 억압하였다고 하더라도, 상업과 무역, 금융을 통하여 자본축적을 지속하려도 노력하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혹자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공평한 조건하에서 경쟁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근대적인 경제활동의 경력, 자본축적의 정도, 기업경영의 환경을 일본까지 쉽게 확대시킬 수 있는 일본 내지의 자본가들에 비해서는 열등한 상황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경우, 만일 우리가 민족국가체제하에 있었다면, 대부분의 후발 자본주의국가가 취했던 무역정책인 보호무역정책을 취하고, 국가가 우선적으로 민족기업을 육성하는 금융이나, 진입장벽같은 정책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등장은 1910년대에 한국인 기업에 이러한 보호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인 자본가와 직접적인 경쟁에 돌입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일본 자본가들은 총독부의 무력과 금융면에서의 혜택,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자본가들끼리의 모임을 통한 정보교류와 대정부 로비능력, 국가의 정책적인 사업(기반시설, 식산사업 등)에 우선권을 부여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에 공평한 기회는 곧 한국인 자본가들의 기업 설립이 일본인 기업 설립에 비해 1/3정도에 불과한 실적으로 바뀔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상당수의 기업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의 임대와 매매 등을 통해 이익을 집적하고, 여기에 금융적인 혜택을 통해서 자본축적에 성공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김성수 일가가 천석꾼에서 만석꾼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지방에서는 특히 우리지역은 구포지역의 저축조합, 부산에서 발의 된 경남은행의 경우에는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금융기관을 운영하는 사례가 된다. 아울러 쌀의 일본 수출을 통해 상업자본으로의 진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특히 1918년 일본에서 발생한 싸 소동이후에는 특히 격심하게 된다.

민족자본이 일본토지조사사업이라 쌀 수출을 통해 이익을 보고, 일제 통치에 협력하는 한편, 일본자본과의 직접적인 경쟁에 나선 경우에는 민족국가의 보호막이 필요하였음을 느끼는 경우도 많아진다.  특히 경상남도와 같은 국가의 변방에 위치한 곳에서는 국가의 보호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일본식민국가와 일본자본과의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경쟁에 노출된 경우에는 더 크게 민족국가의 보호막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안희제의 백산상회나 경남은행이 독립운동 자금의 흐름길이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이들의 회복움직임이 미약했고,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는 점은 민족국가로의 열망이 상대적으로 강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김영성, 1995, "사회경제적 건전성의 지역간 격차변동: 1915-43", 사회과학연구, 7호: 51-74
조기준, 1973,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Carol Joel Eckert, 1986,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The Kochang Kims and the Kyongsong Spinning and Weaving Company, 1876-1945],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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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이해법

역사/1900-1919 2010. 2. 18. 07:09
식민지 기간의 업적에 대해서 근대화로 보는가 아니면, 강제 수탈의 빼앗긴 40년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역사해석에서의 논란꺼리로 남아 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근거는 현재의 업보는 모두 과거에 근거하므로, 우리의 현재가 잘되고 있으므로(산업화, 경제성장, 민주화), 이것의 원인은 과거로 거슬러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럴 경우, 현재에 대한 평가, 그리고 과거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과거를 가리키는가가 논란의 핵심이 된다.  즉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과거의 긍정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해할 것이고, 만일 현재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과거도 부정적으로 볼수 밖에 없다. 

또한 과거를 조선후기,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 일제의 침략에 당하고 일제의 가혹한 침략이 자행된 198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아니면 일제가 한반도를 만주와 몽고, 연해주의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일본의 식량과 공업원료 생산지대로 개발한 1920년대와 30년대, 전쟁시기의 1940년대, 일제가 건설한 물적 기반이 와해되어 버린 해방이후와 한국전쟁, 거의 일제시대 수준에 머물러 정체된 시기인(미군에 의해 군정이 이루어 지고, 오직 군사적인 목적으로 생존하던 ) 1950년대-60녀대 중반, 아니면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1960년대 중반이후 등, 어느 시기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과거의 누적적이고 집적된 것이 현재를 이루었다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물적 자본만 가리킬 것인가, 인적 자본(교육, 기술, 숙련, 규율적), 사회적 자본(조직력, 단력력, 사회관계능력),자연자본(한반도의 자연자원들, 광산, 수자원, 해양 수산자원 등), 자본의 형성(자본주의 경영 능력)까지 포함한다고 한다면 각 분야마다 또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대개 식민지 근대화 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물적 기반 특히 교통 수송 통신 시설이 남아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공장과 같은 산업적 물적 시설은 대개 한국전쟁을 통해서 파괴되었다.  인적 자본도 거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한국인 스스로 개발하였다거나, 아니면 일본인 공장에서의 공장 경험을 가리킨다.

그런데 식민지라는 것의 요체는 식민모국, 제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보조적인, 부수적인, 쉽게 희생당하는 존재라는 데 특징이 있다는 점은 별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를 물적인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니, 불평등, 차별, 분업구조의 열등한 위치 등으로 고정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율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지녔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식민지 상태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보면된다. 우리의 군대를 우리가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수 없다.  대통령이 잘못하고, 법을 어겨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런 상황은 사실상 일제하의 식민지시절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식민지는 헌병경찰제도와 동시에 군대의 주둔, 세금체제의 강화로 나타났다.  특히 1910년대에는 주세와 연초세와 같은 세금을 도입하여 일반서민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제품에 승부를 걸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즉 우리가 낸 세금이 우리를 억누르는 비용으로 지출된 것이다.  주세의 아이디어는 일본에서 이미 도입되어 성공을 건두었기에 조선왕조시절의 세금을 체제를 거의 그대로 두면서, 간단하게 도입하였던 것이다.  당시 약 30만명이상의 한국인들이 술 제조허가를 얻어서 세금을 납부하고, 술을 먹는 사람들도 간접세 형태로 세금을 납부하였다.  일본제국은 한반도의 공장 건설을 저지하고, 단지 일본상품의 소비와 원료수취지역으로 운영하였다.  개발하여 수취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것을 빼앗는데 열중하였다.  이리하여 관세의 수입이 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는 토지세가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1918년의 일본에서 발생한 도시에서의 쌀 부족사태는 이후에 한반도를 쌀 생산지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0년대는 쌀 생산의 전문화된 지역으로 전화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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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색 도시 마산의 독립만세운동

역사/1900-1919 2010. 2. 17. 08:04
1919년 3-4월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은 경남지역에 전국에 비해서 본다면, 수도권, 서북지역 다음으로 격렬하게 발생하였다.  국권이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저항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경남 지역에 격렬하고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은 특이한 현상이다.  반면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호남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점은 설명을 요한다.  1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저항운동의 지도가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기존의 설명들은 대개 전통적인 저항운동의 흔적을 살피면서, 저항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 토지수탈과 같은 경제적 이권의 상실, 일제의 무단 통치, 서울지역과 연계된 조직망(기독교, 유림, 지식인 그룹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망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이 이러한 설명들은 실제로 발생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지역의 특성이나, 구조적인 요인에서 행위로 나아간 사실을 설명할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다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보다 전국적인 아니면, 일본제국주의의 대응 능력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경남을 비롯한 마산 지역은 상대적으로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시기에 전국적으로 권력의 핵심지역이라기 보다는 변방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변방성은 자신의 이익은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자립심을 길렀고, 대신 일제의 경제적 이권 침략에 대응하여 그 대응능력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05년이후에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일본제국은 마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은 점을 감안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식민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토지조사 사업, 가옥세 주세 연초세와 같은 근대적 세제의 도입, 철도건설을 위해 토지와 노력의 수탈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수탈은 근대화와 동시에 오게 되어 마산은 구마산과 신마산이 거의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상호의 격차와 차별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면서 거주하게된다.  여기에 일본제국의 진해 요항의 해군함대와 포병대대, 일본육군의 군수물자 항구, 일본과의 무역을 전관하는 항구라는 특징을 지니게  되어, 무력침탈과 무역물자의 이동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가장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 

마산은 상대적으로 유림의 세력이 약하고, 기독교 계통이 일찍 들어오고, 어시장과 샛강항구를 통해 일용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이들을 상대로 한 야학이 발달되어 있어 근대적인 사상과 동시에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수치상으로는 마산의 3월 두척산, 추산정, 그리고 시장에서의 2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은 학교의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어느 사회운동이 다 그렇듯이 초기의 온건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과 후기의 폭력적인 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다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과격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상대적으로 항구의 노동자들(부두, 운송), 근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마산외에도 진동, 함안, 합천의 만세운동이 격렬하였지만, 그 구호는 같다고 하더라도, 지역적인 발생구조나 동인은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  농촌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마을이나 씨족 구조간의 경쟁, 유림의 영향력, 서울 운동조직과의 연계성 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입장에서 보면, 대한제국 유민들의 항거는 비교적 온건한 항거였고, 갈길이 바쁜 일제의 침략 단계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1915년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의 산동반도 영토,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고, 중국을 상대로 21개조 조약을 통해 만주와 몽고를 침탈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미국과는 이미 중국에서의 권한을 양해받은 바 있다.  1918년에는 시베리아에 7만명을 출병시켜 광범위한 러이사 영토에서 침략을 일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이미 1차세계대전의 마무리 협상을 통해 조선인민들의 민족자결의 희망을 무산시키고, 일본의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어느정도 한반도에서의 저항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약 8천여명의 희생자가 나기는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이고, 한반도의 저항을 봉쇄한 셈이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미 경제부흥, 산업의 성장, 민권의식의 고양에 따른 근대적인 정당체제의 확립, 선거권의 확산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더 강한 억압을 취하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저항 정도로 치부하고 전쟁에 가까운 내전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즉 의병봉기와 같은 전쟁상태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독립만세운동이 근대적인 국가를 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운동의 방식은 전 근대적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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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역사/1900-1919 2010. 2. 16. 11:38
(1) 이인직, 1910, [자유종]에 부인들끼리 시국 토론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
"일본도 삼십년전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우심하여 혹 천하대세라 혹 자국전도라 말하는 이는 미친자라, 괴악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인류로 치지 않더니, 점점 연설이 크게 벌리매 전도하는 교인같이 거리거리 떠나니 민족사세라, 이삼인 못거지라도 술잔을 대하기 전에 소회를 말하고 마시니 전국 남녀들이 십여년을 한담도 끊고 자담도 끊고 언필칭 국가라, 민족이라 하더니 지금 동양에 제일 제이되는 일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 관심을 가치면 미친사람이라고 하다고, 30년전부터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술집에서, 한담이나 자담도 끊고, 오직 민족사세, 국가, 민족을 말하더니, 강국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 하와이 호놀루루 기독학원, 1919년 8월, [대한독립혈전기]에 수록된
합중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국회 임원 일동의, 1919년 4월 14-16일에 쓴 글 중에
"세계대전이 개시되기 전에 덕, 아 등 모든 구라파 각국들이 권력이 의보다 승하고, 약한자의 고기를 강한자가 먹고 살찐다는 망령된 뜻을 가지고 교만한 태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실패를 당하고, 그들의 상설같던 국위가 지금은 변하여 다만 무력한 한 정치기관에 불과하고, 그들의 망령된 몽상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는 수합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대(일본)의 정부는 근간 구라파에서 꺼꾸러진 전제정부와 같은 욕망과 불의한 뜻을 버리지 못하니, 만일 그대의 백성들이 적이 총명과 지각성이 있어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같을 진데, 그대는 이 정책을 바꾸며 그대의 정부를 위하여 존귀스럽고 안락이 자재한 공화의 참뜻을 모방하기로 힘쓸 터이라.  만일 그대가 지금 사용하는 프루시아 정책을 그대로 계속할진대, 그대의 나라도 응당 멀지 아니하여 그대의 표준되는 구라파 몇나라와 같은 참화를 받게 되리라".

일본의 지각있는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형태의 글이다.  일본은 실은 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국과 거의 비슷하게 경제적 번영과 제국주의적 야욕을 달성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경제적 성장을 구가하여 미국의 민중들은 안락을 취하고, 자국 중심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애국주의에 호소하여 거의 해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한인 독립가들은 일본에 대해 제국주의 정책을 버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독일을 예로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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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역사/1900-1919 2010. 2. 16. 11:21
필자는 1996년 2월 14일에 히로시마에 계시는 타키오 에이지 선생(인권도서관, 히로시마 청구문고)의 집에 가서, 한센병의 역사, 일본 부락인들의 생활, 한인 징용에 관한 자료를 소개 받고 아루 저녁 잔 일이 있다.  이분은 스스로 자료를 모아서 한정본으로 자료집을 출간하고 계셨다.  1910년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 부근에서 노역한 흔적들을 모은 자료가 있어서 사진으로 스캔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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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역사/1900-1919 2010. 2. 16. 07:16
1차세계대전이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인민의 대량 희생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주의, 복지문제가 등장하였다면,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체제, 대량 소비사회가 나타났다.  이러한 대량 생산과 소비는 포드의 T자동차의 년간 1백만대 이상 판매, 집보다도 차의 소유를 우선 원하는 세태가 나타났다.  적어도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전략의 고수로 적어도 1917년 전쟁 개입을 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유럽의 보호주의와 해상봉쇄를 통해 생산력을 늘리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내는 1차세계대전의 피해로부터 한옆에 물러나 있으면서, 소비사회의 도래를 향유하는 입장이었다.

대량생산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자본도 19세기 말을 통해 합병과 독점체제를 궂히고 있었고, 광고, 박람회, 놀이터, 영화, 소설, 춤과 노래 등이 흥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산업생산국이자, 경제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완성하는 시기라고 보면된다. 이 시기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유리한 조건으로서 민족국가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쟁에 필요한 총력전 동원, 대량생산에 따른 산업합리화와 소비능력의 제고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한층 드높일 수 있는 시기였고, 공장주나 경영주의 입장에서는 합리화에 따른 댓가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해야 하는 입장에서 충돌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고통과 부유층의 놀이가 동시에 등장하는 시기였지만, 소위 경영, 판매, 재무, 기술개발, 회계와 법률, 의료, 등의 분야에서 소위 중산층의 획기적으로 팽창되던 시기이다.  이들은 참정권,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 고급문화의 향유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의 머리와 치마는 짧아지고, 바지 차림이 등장하며, 얼굴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여성의 벗은 모습이 서서히 영화(무성)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춤의 시대였던 1910년대(미국의 경우)는 탱고와 같은 좀더 육감적이고, 템포가 빠른 춤이 유행하고, 소설에서도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물론 이에 대해 사회나 정치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판매금지하는 세태, 술을 금지하는 법안, 표현물에 대한 사후적 검열, 미국에 대한 애국심의 고양, 타민족에 대한 경멸(인종전시관을 통해 다른 열등민족을 구경하는 전시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는 하나의 국가사회적인 희스테리 현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에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에 이를 통한 교육이론, 인간 세뇌이론 등이 교육과 소설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가하면, 반면에 전쟁 놀이에서는 아직 인간의 사기, 사회적인 속성 등이 고려되지 않은채, 전쟁전략을 세우고 있고 그대로 실천되었다.  따라서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민중의 희생은 전력자원으로서의 인적자원의 형태로만 고려되곴고, 아직 인간의 내면적 능력을 감안한 전략은 선보이지 못했다.  심리소설의 등장은 의식의 흐름, 고독한 인간, 차별받는 인간,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한편으로는 휩쓸리는 개인들과 대중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결국 기존의 공동체인 가족, 마을, 술집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는 동료들의 영향력보다는, 영화, 신문과 소설, 방송, 공연 등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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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1900-1919 2010. 2. 15. 10:54
1차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대량샐상무기에 의해 민중의 대량 죽음,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한 군수역량과 이념적 동원이 필요하기에 국가내부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국민 동원능력, 산업 역량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능력, 대외 무역 루트가 봉쇄된 가운데 국가들의 산업역량이 최대한 개발된 시기였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대내적인 저축과 희생니마, 징세능력과 과세 부담의 증가는 물론이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생활고, 국가의 재정 착취능력, 국민들의 국가의 희생요구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이미 해상봉쇄가 이루어지고, 각 나라들이 자기들의 국채 발행을 통해 해외 자금을 조달하고, 보호무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이기에, 각 나라들은 최대한 생상량을 늘려, 군수장비는 물론이거니와, 민수물자의 수급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각 국가의 산업체들은 과거에 수입에 의존하던 산업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국이 이 시기에 섬유산업의 쇄퇴를 가져오고, 일본이 섬유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일본응 이 시기에 특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이 점령한 영토를 가볍게 쟁탈하고, 섬유 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영국의 쇠퇴와 일본의 일등국가로의 발돋움이 완성된 것이다.  각 국가들은 이제 인민들의 필수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가고 이를 위해 산업의 기계화, 합리화, 대규모화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성공한 국가들은 미래의 강자가 되었고, 이를 수행하지 못한 국가들은 쇠퇴의 길을 가게되는 분수령이 된 시기이다.

또 하나의 산업체내의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량생산체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숙련노동자는 점차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대신, 반숙련노동자나, 미숙련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자로 참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숙련노동자들의 저항, 미숙련노동자들의 착취에 대한 항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 전에 시작되었던 노동자들의 저항은, 1차대전 기간과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맞이하여, 전세계적으로 노동조건의 향상(특히 8시간노동자가 미국의 전시기간에 군수물자 생산 산업에 도입되고, 러시아의 2월혁명 후에 곧바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제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게 된다), 작업장내에서의 억압에 대한 불만 토로, 공장관리운동, 공장 소유운동등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이에 대해 비단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불란서 등에서도 공장 관리운동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미국에서도 자비로운 사업주에 의해 선도적으로 부분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이제 노동운동은 단지 작업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기업내의 복지, 즉 노동자 식당, 노동자 주택, 노동자 건강 보험(산업재해), 퇴직기금 등이 도입되는 계기가 된다.  공장이나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노동자 복지제도도 이제 서서히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실제의 도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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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중성

역사/1900-1919 2010. 2. 13. 21:19
최근에 토요타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일본인들을 특징짓는 이중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일본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흠이 있다고 가져온 물건에 대해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곧 고쳐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개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고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 하나 비용을 받거나, 따져서 고쳐주게 된다.  일본인을 말할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안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말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겪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한 미소이면서 동시에 돌아서면 아주 차거운 표정들이다.  아무도 걸들떠 보지도 않으면서도, 직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근대사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만몽,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시베리아 출병이다.  이는 1918년에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외교에서의 이중전략이 시작된 시점으로 친다는 점이다.  이때 이중전략이라는 것은 이미 한국의 경우에는 1904-5년의 러일전쟁시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취했던 이중적인 정책에서 드러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열강들에게는 1918년 러시아 출병을 통해 드러난다.  즉 미국의 랜싱국무부 장관과 미국 주재일 일본대사 사이에 체결된 중국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권보장을 보호받는 조약(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호개방 조약이라고도 표현한다)을 말한다.  러시아와는 이미 1908년에 만몽지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보장받았고, 러시아 혁명중에는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와 만주철도회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상황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통해 1918년의 러시아 출병,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에도 남아서 (약 7만명) 거의 1923년정도까지 싸우다가, 곧바로 다른 나라에 앞서서 소련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는다(1926년).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과도 갈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이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컫듯이 일등국가가 되었다.  즉 1차세계대전후에 해군 군축을 논의하면서 미국, 영국의 톤수가 5, 그리고 일본이 3의 비율로 세번째로 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은 소위 일등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하면서, 바로 그 전날에는 미국과 평화를 논하던 일본에게 당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의 이중성은 세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일본은 대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선전포고를 감행하는 관행을 지닌 것 같다.

일본의 내부를 보면 이러한 이중성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1910년대의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분석한 것을 보면, 일본은 처음부터 국가 지상주의를 가르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에 더하여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을 가르친다.  따라서 사회성을 기를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일본의 교육에서도 경제학이나 국제관계학 같은 것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오로지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식으로 배우게 된다.  물론 이와 배치되는 경향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해외에서 배운 사람들도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는 대개 국가의 중요성을 개인보다 더 강조하고, 사회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이 소위 일등국민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은 채 지금껏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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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역사/1900-1919 2010. 2. 12. 23:03

신해혁명은 중국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1911년에 무창에서 일어난 무장군인들의 도움을 받은 혁명세력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들은 내부의 각종 혁명세력들이 외부 중국인들의 도움을 얻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한편 청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받은 군부가 반란편과 타협을 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반란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로써 청왕조는 아편전쟁이후 쇠약해진 틈을 타, 만주족을 무너뜨리려는 중화민족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중화 한족들은 청왕조가 흥했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청왕조가 쇠약해진 이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그리고 의화단 사건을 통해 외세에 지리멸렬한 청왕조를 보고, 1904-5년의 로일 전쟁시기에는 자국에서 발생한 전쟁에서 단지 중립을 지키면서 다른 나라끼리의 전쟁터로 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중국인민들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를 보면서 오랑캐 왕조인 청왕조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나갔다.

청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19세기 후반기에 이미 청일 전쟁의 패배후에 근대화의 의욕을 불태우고, 해외에 거의 2만명가까이를 보내어 훈련시키고,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변법자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  특히 해외에 내보낸 국비 유학생들이 대부분 혁명운동에 가담하였으니, 국비로 청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되어 버린셈이다.  1906년에는 과거제도를 없애 과거의 신사세력의 싹을 없애고 보다 근대적인 관료총원을 시도하였다.  군인의 경우에는 팔기군을 개편하고, 근대적인 군대로 만들면서 군벌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군벌의 존재는 러시아와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즉 러시아의 군대는 절대적으로 중앙의 군수지원을 받고 명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청나라의 군벌은 마치 지역의 깡패조직처럼, 작은 지역 단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면서, 세금을 거두고, 명령권을 가지고 세력을 불려나가고있었다.  결국 청의 마지막 왕조는 가장 큰 군벌인 북양군벌인 원세개에 의존하려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청왕조나 중화민국을 팽게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1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에게 독일의 이권을 전부 넘기고, 러시아 혁명기간에는 중국군이 오히려 일본군의 지휘아래로 들어가 일본군 7만여명이 내몽고, 만주, 연해주에서 마음껏 러시아 적군과 대적하게 만들어 준다. 

중국은 한편으로 오랑캐 정권을 한족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외세와의 대결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된다.  손문은 심지어 만주를 포기하는 방안을 강구할 정도로 위험하게 한족 위주의 중화민국을 구상하였다.  일본은 이중적인 외교전략을 통해 한편으로 일본 재벌의 자금과 군부내의 정부부서를 통해 중국의 혁명세력을 손을 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나 원세개 북경정부를 통해 혁명을 공격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두개의 중국을 만들고, 그 틈을 타 만주와 몽고를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는 2007년 10월 1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중국내의 각종 지역적 혁명조직들과 상인세력들이 서서히자라고 있었고, 해외의 손문과 같은 중국 통일 세력들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혁명조직이 부재하고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문의 3민주의는 민권, 민주, 민생은 당시의 이론을 쉽게 통합시킨 이론이라고 볼수 있다.  국권을 수립하는 것, 그리고 민주까지는 드러낼 수 있었지만, 민생이론은 사회주의나 미국의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조지 소로의 이론, 레닌의 러시아 혁명을 소화한 이론이다.  아무튼 손문은 무장봉기, 해외자금을 활용한 국내 혁명지원, 이론화를 통해 혁명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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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볼세빅

역사/1900-1919 2010. 2. 12. 12:01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배경으로 일어난 혁명이다.  이는 혁명의 이념면에서나, 그 조직 면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도적인 위치에 볼세빅이라는 지식인 그룹, 또는 직업적 혁명가 그룹이 존재하고 이들이 혁명의 리더로서 이끌어 간 데 문제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의 참전국가들에게는 이미 전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최초의전쟁이었던 만큼, 민중의 힘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었다.   단순히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싸움이었과 후방에서도 물자생산면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전쟁에서의 죽음을 정당할 수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미국도 군수물자 생산 분야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고, 영국이나 독일은 노동의무제를 통해서 노력 동원을 강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식량 배급이 중지됨으로써 결국 2월혁명이 발생하고야 말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2월혁명의 최초의 성과는 공장내에서는 8시간 노동제의 도입,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가 혁명적 상황을 매개로 도입되었다는 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의 고양과 억압의 과정에서 도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전쟁이 갖는 국민동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위원회의 도입은 조금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미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조직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무엇이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형식상으로 보면,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만든 조직이기는 하지만, 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의 탄압이 극심하였으므로,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정치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공장위원회는 공식적으로 공장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구성된 것이다.  공장주인이 있었지만, 공장주인이 공장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데 감독기구,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공장위원회이다.  이런 조직은 현재의 유럽연합에서 도입하고 있는 work council과 유사하다.

그러나 항상 제도가 도입되어도 기존의 관습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공장의 운영은 실은 주인이나 경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인간적인 위계적인 질서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 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간 감독자(현장 감독자)가 실질적인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현장 감독자는 임금의 결정, 해고의 결정 등 사실상 주인과도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사실상, 노동자들의 현장에서의 불만은 현장 감독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차별, 무시에 있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관행에 대해 현장감독자를 단순히 기술 지도원의 위치로 격하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도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자신들도 노동자이므로 노동조합에 가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비롯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해방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볼세비키들의 정권장악, 내전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의 방어가 우선이었고,이를 위해서는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력의 증강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전시사회주의, 내전, 신경제계획을 통해서 공장내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보당하고, 다시 과거의 공장주, 기술자, 중간감독자들의 복귀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게되고, 실제로 이를 실행한다.  

결국 노동자 관리, 노동자 소유,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노동자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나 제도의 도입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줄수는 없는 것일까이다.  대가는 공장의 소유주가 파산하거나, 국가 권력이 더이상 공장 소유주를 지챙해주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에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가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서도 최근에 진주에서 버스회사가 파산상태에 이르자 버스회사의 종업원들이 인수하여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공장이 성공한 사례를 모르고 있다.  경향신문과 서울 신문이 아나도 사원지주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사례를 보면, work council은 종업원을 대표하면서 이사회에 참석하고, 감독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사의 운영에 적극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행이 독일의 패전이후에 독일 대자본들의 군국주의화 경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독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도 누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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