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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4 지진은 사회의 견실함을 시험한다.
  2. 2010.03.03 운동권에서 파시즘으로
  3. 2010.03.02 노동자의 태도를 문제삼다 1
  4. 2010.03.01 노동자의 혼이 사라지다
  5. 2010.02.27 대량소비를 즐기는 동안 금융자본의 사기는 배태되었다.
  6. 2010.02.26 남부의 반동
  7. 2010.02.25 말과 폭력이 싸울 때
  8. 2010.02.23 훈육, 순치, 자아의 등장
  9. 2010.02.22 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10. 2010.02.22 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지진은 사회의 견실함을 시험한다.

역사/1920-29 2010. 3. 4. 07:39

아이티와 칠레에 지진이 발생했다.  규모나 지진의 강도 면에서는 칠레가 강했고, 피해면에서는 아이티가 심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간과하고 있는 점은 지진은 자연재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능력을 시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마산의 2003년 태퐁 매미가 덮쳐서 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해였을 때 공동체의 위기를 거론하였다.  즉 피해자체도 문제지만, 피해에 대처하는 공무원(당시의 마산시 시장의 행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을조직(공식적으로는 수방단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있고, 아마도 민방위조직기 가동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이 일차적으로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고, 이어서 동네 자체에서도 자발적인 대처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사후의 대처방식은 이후의 재해와 재난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 문제는 다시 발생할 가능성만 높여 놓았다.

1923년 9월 1일 정오의 2분전에 일본의 동경 인근에 발생한 규모 7.9 규모의 지진은 사회가 지닌 죄의식, 피해의식, 가해의식 등 무의식적 역사에서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이때의 지진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 약 13만명 정도이 죽음, 이후의 화재, 쓰나미 등의 피해로 이어졌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1) 해일의 위험, 후지산의 폭발가능성 등 자연재해의 후속타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 (2) 1910년대 이후에 생겨난 호황과 자유주의적 사회풍토로 사람들의 생활이 방탕해져서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는 생각, (3) 교도소에 갖힌 사람들이 풀려나와서 약탈과 강도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 (4) 1923년 6월경에 적발한 사회주의자 음모 사건과 연결시켜서,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소란을 여기할 것이라는 소문, (5)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1918년 쌀 소동사건, 1919년의 독립운동, 이미 일본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10만여명에 달하는 한국인(당시 일본 당국자들은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일합방전에는 한국인이라고 불렀었다), 특히 관동지역인근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2만여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감 등으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즉 조선인의 약탈에 대해서는 지진발생후 3시간만에 동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손잡고 공격한다" 내용이었고, 이어서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당일 오후 7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공격한다"는 각종 내용이 누군가의 공개적인 소문 살포와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근의 조선인들이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온다, 무기를 들었다, 떼를 지어서 몰려 다닌다, 강도, 약탈, 강간, 투독(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등의 소문으로 처져나갔다.  이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신문에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  대개는 2-3일동안에 이 소문에 의해 약 6천여명이 살해당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누가 한국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본어 발음을 시키거나, 수염을 기른 사람, 키가 크고, 광대뼈가 나온 사람, 쌍꺼풀이 지지 않은 사람 등을 골랐다고 한다.  죽인 당사자들은 자경단이라고 하여, 마을 자체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죽여졌다고 하나, 이당시는 이미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계엄시기였으므로, 군인과 헌병, 경찰이 동조하거나 방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실상이다.

아무튼 역사에서 6천여명이상의 사람이 2-3일 사이에 소문에 의거하여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평상시에 지니고있는 사회의 원죄를 떠올린다.  즉 비상시에는 사람들이 이런정도 잔인할 수 있는 사회관계가 평상시에는 사회적 틀(facade)에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티의 지진에 이은 무권력상태, 대통령니 도망가고, 약탈이 일어나고 하는 상황을 보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인 연대나 공동체의식의 정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 마산에서 2003년에 희생당한 8명의 매미 피해자들은 마산시민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마산사람들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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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에서 파시즘으로

역사/1920-29 2010. 3. 3. 09:35

일본은 1910년대 특히 1차세계대전에서 국가간 무역이 어려워지면서 각국은 어쩔수 없이 국ㄱ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쟁 당사국들을 상대로 국내 공산품들을 수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산업이 발전하고, 더구나 선박을 구성하는 중요 부품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다다랐다. 이어서 섬유산업이 급성장하고, 많은 농촌의 이농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에서의 쌀값 급등 현상에 직면하자,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쌀 공급기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단 초기에는 대만으로부터 쌀을 수입하지만, 곧 이어서 한반도에서 수리사업, 치수사업, 경지정리, 비료의 투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쌀 생산은 급증하고, 일본 쌀값의 1/3이하로서 일본에 수입된다. 이로서 일본의 농민들은 더구나 소작농들은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단일이유는 아니다. 이미 일본의 소작농들은 가혹한 소작료와 적은 농지 규모에 시달리고 있었다. 즉 생산량의 1/2을 지주에게, 그리고 1/4을 생산비용으로 나가서 실제 수익은 1/4선에 불과하였고, 이는 도시의 하층노동자 계급에 비해서도 1/2정도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이미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이민을 금지하엿고, 농산물 수입도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농촌은 과잉잉구, 과잉생산에 시달리게 된다. 지주들은 이에 대응하여, 기계화, 광작화, 소작인들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갔지만, 소작농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그리고 전후 불황에 허덕이며, 노동운동 활성화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이들과 지식인 집단이 합세하여, 소작인 조합이 발생하여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된다.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결국 이러한 농민의 스트레스르 풀기 위한 하나의 출로가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해외팽창에의 욕구를 가진 해외군부(관동군, 조선반도의 일본군), 국수주의적 우익세력들이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재벌(자이바츠)들에 대항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다음 2개의 사례는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기타 잇키 (北 一輝), 1923,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서 일본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1단계는 일본의 기존 엘리트를 깨끗이 일소하고 천황과 인민의 직접 관계에 기초한 체제로 대체한다. 2단계는 100만엔이상되는 개인재산을 몰수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며, 10만엔이상되는 개인 소유 토지를 압류하고, 재분배한다. 천황은 황실재산을 포기한다. 궁극적인 목적으로 일본은 국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 부국 (영국, 러시아)으로부터 정의를 지켜 서양에 대항하여 아시아 국가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Beasley, 1990: 213-214).

(2) 이노우에 닛쇼(井上 日召, 1886-1967)의 血盟團(게쓰메이단)은 금융가와 산업가들을 선정하여 암살함으로써 농민의 천년왕국을 이룩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Beasley, 1990: 214).

일본의 파시즘의 형성은 다분히 농업파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1920년대를 통하여 일본정부는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 불간섭 주의를 고수하였고, 이에 대해 비교적 대기업들도 성장은 더디었지만, 합병을 통하여 규모를 키웠고, 독점력을 강화시켜 해외로 진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고, 국가의 개입이 오히려 무역을 방해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감소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농업과 농민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W. G. Beasley, 1990/1996, The Rise of Modern Japan 일본 근현대사 (을유문화사) 중 10장 군인과 우익: 1918-1933을 참조
Seymour A. Broadbridge, 1989, "Aspects of economic and social policy in Japan, 1868-1945", Peter Mathias and Sidney Pollard eds.,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Europe, Vol. VI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06-1145
今井淸一, 1974, 大正デモクラシ-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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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태도를 문제삼다

역사/1920-29 2010. 3. 2. 07:56
19세기 말까지, 그리고 테일러가 노동자들을 선발할 때 그들의 태도를 점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업무 능력, 실적을 중시하고,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단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장 내외부의 사정은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고 채용하고, 평가하고, 해고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내부의 사정은 공장이 대규모화, 기계화,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면서, 이미 공장은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지겨운 단순 작업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장은 창의성도, 자신의 성과를 그대로 인정받으면서 평가에 반영되는 체제도 아니었고, 그래서 노동자나 경영자들 모두 이러한 노동자의 자발성 상실이 작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법은 물론이고, 산업심리학자들의 적성검사나 IQ검사 등이 등장하였고, 이후에는 엘튼 메이요의 공장내 사회관계의 중요성까지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내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1차세계대전당시의 전쟁 전략에서 병사들의 심리적인 요소가 고려되지 않아 많은 희생자와 전쟁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었던 점에도서 알 수 있다.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는 것은 단순히 태도 검사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정도는 노동자들에 대한 부분적인 소속감을 고취방향으로 이루어 지기도 했다.  즉 성과공유제, 이익분배제, 일부 선진적인 공장에서는 주식의 배분까지도 이루어졌다.  이런 성과공유제도는 노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경영자들이 노동자들의 헌신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경영자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였으므로, 대부분은 과거의 가부장적인 또는 가족적인 전략이 더 유효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탄광, 철강, 철도 등에서 나타났듯이,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하나의 공장 마을을 이루고 주택과 상점을 공유하는 공장거주체제에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연대가 손쉬워 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력하게 나타났다(한겨레 신문, 1996. 1. 20일자, 1920년대 미국판 파업전야, Matewan 영화소개 - 이 영화는 Matewan이라는 연탄탄광에서 1920년 5월 19일에 발생한 총격전에 의해 회사측의 탐정회사 7명과 노동자측을 위해 노력하던 시장과 세리프가 죽은 사건).  따라서 자동차의 보급, 노동자들의 소일거리의 등장, 신분상승기회의증대는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해치고, 경영자들의 논리가 통하게 되는 기반을 이루게된다.

경영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노동자의 태도를 검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노동자들 사이, 아니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사이에서도 공산주의니, 이중조합주의니, 황색노조, 회사노조, 어용노조 등의 논란이 끊임 제기되고, 이를 기반으로 사용자과 대결하고, 조직내부의 이반자들을 숙청하는 양상이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인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노동조건은 어느정도 향상되었으나, 노동조합의 조직율은 거의 절반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John L. Lewis의 전기(Saul Alinsky, 1970, John L. Lewis: An Unauthorized Biograpgy)는 비교적 미화되었으나, 다른 쪽의 해석에서는 (Alan Singer, ?, "Communists and Coal Miners: Rank-and-file Organizing in the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during 1920s", Science and Society: 132-157)는 루이스를 독재자, 무자비한 조직운영자로 묘사되고 있다.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의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공장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루이스는 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무시하고, 자신만 믿고 따르면,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식의 당시의 마피아 스타일의 조직운영을 하였고, 여기에 그가 공화당을 추종하면서 사회적으로 공산주의자 낙인찍기에 동조하여, 자신에게 저항하는 동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면, 거의 40년간 노조를 장악하였다.  여기에는 사용자와의 저항을 위해 노조들끼리 연대하자는 것도 거부하고, 우선적으로 자신에 대해 적대적인 내부부터 뿌리 뽑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루이스의 조직은 (광부노조) 1920년대 동안에 거의 절반이라로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Reinhard Bendix, 1956,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Ideologies of management in the course of industrialization (New York: Harper Torc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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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혼이 사라지다

역사/1920-29 2010. 3. 1. 12:02

산업합리화의 물결은 한편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문화산업을 만들어냈지만, 공장내의 상황은 오히려 탈숙련화, 그리고 지배체제의 관료화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자율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또한 1910년대의 노동운동의 물결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호황과 민주적 정치체제의 등장으로 개인적인 취업기회와 상승이동(화이트 칼라가 될 기회)가 증대함으로써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체성의 상실은 공장내의 자율성과 숙련의 상실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노동자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사라지고, 사회적인 문화에 휠쓸리는 결과는 낳게 된다. 이는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들의 저치를 개선하기 보다는 물질소비적인 문화에 휩쓸리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도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1차세계대전 이후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경제적 공항과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남동 유럽지역의 이민에 대해 더욱 심화되었고, 아울러 대내외적으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는 한편으로는 일반평등한 선거권에 기초한 정부수립에 의해 새로운 신분상승을 노리는 각국의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추동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되면서, 제국주의세력들은 서로간에 경쟁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자본가와 사회민주주의자의 협조와 거대한 양의 미국 달러의 유입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유럽 자본주의는 간신히 재기하기 시작했다"(포스터, 1956: 73).

대부분의 나라들이 대중의 인기를 배경으로 노동자의 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활용하는 데 반하여, 미국과 영국은 시장의 원칙과 국가의 경찰기구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미국의 경우에는 회사조합이 극성을 부리고, 영국에서는 법률상 조합에 대해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고용주가 자금을 대서 직접 조직하고, 간부직을 차지하는 어용조합은 1886년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 졌다...1927년에는 그것이 900개로 증가하였고, 약 100만 명의 노동자를 가입시켰다. 이들 어용조합은 교묘한 반조합기구의 일부로 대규모의 스파이체제, 회사의 깡패와 밀정, 직장과 산업도시에서의 회사의 테러리즘을 갖추고 있었다"(포스터, 1956: 88).

영국은 1926년의 총파업을 계기로 고용주들은 반노동조합적인 법안을 만들기 시작한다. 1927년에 통과된 이 법안의 내용은 우리에게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들이다. "총파업과 동정파업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비합법적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자는 벌금이나 2년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대중 피켓팅은 금지되었고, 보통의 피켓팅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손해에 관한 민사소송의 지불의무를 부담하기 위해 조합기금이 조성되었다. 공공시설의 조합은 TUC (노동조합회의) 혹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었다. 조합은 파업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했다. 조합이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하게 제한당했다"(포스터, 1956: 102).

물론 같은 시기에 러시아에서도 조합은 국가가 이미 노동자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논리에 따라 노동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전환시켜 놓게 된다. 아무튼 세계적으로 보면 1920년대는 노동조합의 숫자가 줄어들고,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되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업체가 이제 1920년대 들어서 발생하기 시작하고, 극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늦게 그리고 약하게 받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세력들의 공세가 강하지 않아으므로, 노동자 운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 문헌
William Z. Foster, 1956/1987, 세계노동운동사 II (백산 서당)
Jürgen Kocha, 1980, White Collar Workers in America 1890-1940: A Social-political History in International Perspective (London: Sage Publications)
John Kelly, 1988, Trade Unions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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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소비를 즐기는 동안 금융자본의 사기는 배태되었다.

역사/1920-29 2010. 2. 27. 11:32

1920년대 현대인의 대량소비체제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서민들을 위한 자동차, 세탁기, 냉장고가 만들어 지고, 서민들의 오락을 위한 영화, 라디오, 프로게임을 향유하고, 서민들을 향한 광고 공세와 노래와 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물론 이런 추세는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유럽의 발달된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였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였지만, 그래도 1920년대는 소위 대정민주주의 체제를 향유하던 시기였다.

자본은 공장의 합리화과정을 통해, 표준화, 기계화, 콘베이어 벨트 라인의 도입, 분업의 발달(테일러이즘), 줄지어서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는 방식의 도입, 과학과 기술의 도입 등이 활발하게 도입되어, 궁극적으로는 숙력공을 반 내지 저숙련공으로 대체함으로서 판매가를 낮출 수 있었다.  이느 동시에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출수도 있었지만, 현재의 분석 관점에서 보면, 1차세계대전 당시의 노동자의 희생과 민족주의의 도입(민주화된 정부),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어느정도의 임금 인상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소득의 이전이 나타날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강화하여 소수의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받고, 임금의 상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숫자로 표시하기는 어렵지만, 그저 상위 20% 이내에 속하는 노동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다고 볼수 있다.

기업간 결합과 카르텔 등으로 소수의 기업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독점적인 이윤을 누릴수 있었지만, 과잉축적된 자본은 이를 정상적으로 배출시킬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는 이미 초기 진입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대량생산체제에  그 원인을 찾을수도있다.  광고의 등장이나, 1930년대에 본격화된 군수산업의 발달은 하나의 자본축적의 방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과잉축적된 자본은 결국 금융시장으로 그 출구를 찾아 자산거품이 발생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시에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국가들에 자본 공급을 하고, 증권시장과 같은 금융시장의 발달에 의해 탈출구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금융 공항의 싹은 이미 자라고 있었다.  금융공항은 실은 자산거품 만이 아니라, 사기에 기반하고 있었다.  최근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금융에 대한 거래 규제가 없었고, 회사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서도 대출을 하던 은행들, 투자자들은 이윤이 창출되지 않는데도, 배당만 지속적으로 지급되면 아무런 정보도 요구하지 않던 관행이 결국 금융공항을 발생시키는데 기여한다.  금융공항은 단순히 금융에서 그치는 것이 아리라, 1930년대를 일관되게 영향을 주었고, 결국은 전쟁에 의해 그 해결책을 찾게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1920년대의 공업화, 증대하는 소득, 일반 대중들의 소비 수준의 향상이 민주주의로 귀착하기 보다는 파시즘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공업이 발달한 이태리에서 시작하여, 농업이 기반이나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신생국가들은 동유럽을 통해 다시 공업 선진국 독일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이다.  파시즘은 경제성장 만으로는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될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러준다.


참고문헌
Daniel Chirot, 1977, "파시즘과 세계경제," 서동만 편역, 1983, 파시즘 연구 (거름): 145-169
Ben S. Bernanke and Martin L. Parkinson, 1991, "Procyclical Labor Productivity and Competing Theories of the Business Cycle: Some Evidence from Interwar US Manufacturing Industries",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99, 3: 439-459
Economist, 2007, "The match King: fraud and financial innovation," Dec.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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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반동

역사/1920-29 2010. 2. 26. 07:48

이태리에서 파시즘은 나폴리 지역에서 포 평원을 지나 북쪽으로 행진하면서 로마를 점령한다.  농촌지역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자금을 댄 민간 폭력 조직에 의해 이태리 정치가 유린 당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부는 농업지역이고, 근대화에 저항하는 지역이다.  반면에 북부는 공업이 발달하고, 르네상스를 꽃피운 지역이다.  이곳은 1943년에 독일 나치가 점령하여, 괴뢰정부를 세웠을 때 이태리의 빨치산들이 5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곳이고, 무쏘리니가 결국 빨치산에 잡혀 즉결처분을 당하고, 그의 시신인 공중 앞에 매달린 곳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히틀러는 남부 바이에른 지역에서 세력을 얻고, 이를 기화로 독일 전역을 장악한다.  남부는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고, 이웃한 헝거리의 영향도 받아서 공장평의회가 조직되어 상대적으로 독일 내에서는 볼세비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북부는 프로이센이 지배하여 산업화가 진행되고, 독일 통일과 정치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곳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남부는 인민전선이 발달하였으면서도, 동시에 2차세계대전 기간중에는 북부는 독일이 직접 지배하였던 데 반하며, 남부는 괴뢰정부가 지배하던 곳이다.  이들 비시정부는 결국 대전후에 반민족 행위자로 처벌을 받는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면서 프랑스 민족 국가의 수립에 저항하는 지역인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당시부터, 남부는 분리주의를 주장하고, 대지주 농장에 근거한 농업이 산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남부에서 KKK가 발달하여 한때 5백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거느리고, 미국 정부의 보수화를 촉진시켰다.  보수화는 금주법을 만들어 내어,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음주습관, 법을 경시하는 풍조, 돈이 잇는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술을 마시고 돈이 없는 사람은 비싼 술을 마시지 못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결국 마피아가 번성하는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민자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여 이민자 쿼터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농촌이 몰락하고, 도시에는 자동차가 1920년에 벌써 1백만대가 굴려 다니는 세상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다.  1922년에 마산에 자동차가 도로에 다닌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자동차 붐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감정적 반작용이 농촌의 보수화였다.

남쪽이 상대적으로 농촌지역이고, 보수적인 지역인 것은 북반구에서는 북쪽이 춥고, 남쪽이 따듯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개 추운지역이 공업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민족국가 수립에 적극적이다.  기후가 온화한 것은 농업이 생산력의 기반을 이루었던 시절에는 유리한 조건이었으나, 이제는 어느정도 추운 것이 더 경제성장에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Robert A. Divine, et. al, 1990, America: Past and Present (Harper Collins Publishers)
Paul M. Sweezy, 1977, "Bettleheim on Revolution from above: the USSR in th 1920s", Monthly Review, 29, 5: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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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폭력이 싸울 때

역사/1920-29 2010. 2. 25. 18:51
1920년대는 러시아에서의 볼세비키 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진행된 공화제의 성립이 동시에 진행된 시기였다.   유럽 대륙에서는 공장소비에트에 기초한 국가체제의 수립이라는 형식과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간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보통 일반 평등 선거권의 도입에 따른 왕정의 폐지와 새로운 공화정의 수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어느정도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움직임과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났다.  왕정 복고의 움직임도 아니고, 자유민주공화정 움직임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민족의 영광과 인종의 우세함을 강조하고, 평등과 국가에 의한 인민에 대한 보살핌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세력과 이념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해서는 지금도 우리의 현실을 평가하면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나는 파시즘에 대해 물론 이태리의 무소리니가 1919년에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소리니가 가장 많이 파시즘의 전형적인 예로서 인용되고 그의 정책을 분석하기는 하지만, 파시즘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나는 무소리니 당시에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원로 사회학자가 표현한 Filippo Turati(1857-1932)의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말의 혁명에 대항한 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무소리니는 합법적으로 집권을 하지만, 그가 사용한 수법은 폭력단을 조직하여 노동자 파업을 파괴하고, 민주적 집회를 공격하고, 노동자 세력이 장악한 도시에서 폭력을 일삼는 방식이었다.  최후로 1922년에 나폴리에서 3만여명이 로마로 향하면서, 내전을 두려워한 당시의 국왕이 결국 무소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하게 하면서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아무튼 합법적인 방식으로, 또는 설득을 통한 집권이라기 보다는 폭력과 위협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폭력만으로 지배를 달성하지는 않는다.  항상 당근과 채찍의 전략이 사용된다.  나치의 경우에도 채찍과 동시에 오히려 당근을 사용하느라, 전쟁준비에 소홀하게 된다.  "나치는 노동자 정책으로써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불만의 위험성을 줄이려고 소심하게 노력하였다.  오히려 사회적 매수를 통한 착취관계의 유지가 테러행위에 의한 것보다 더욱 중요성을 지녔었다"(포이케르트, 1980: 291).  파시즘은 단순히 폭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이태리에서는 대토지 소유 영주계급의 불안을 이용하였고, 독일의 나치는 중산층의 불안을 이용하였다.  "간단히 말해 나치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특이한 시대적 흐름을 통해 혼란에 빠진 신중산층의 지위상승운동에도 의지했다"(포이키르트, 1980: 298).   노동자계급에게도 8시간 노동제나 사회복지를 약속하고 실행함으로써 상당한 정도의 물질 기여를 하게된다.  직접적인 지원을 회피하기 위해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 도서관 등을 노동자 거주지역에 광범위하게 설립하여 노동자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한다.

이에 대항하여 이태리의 그람시는 젊은 나이에 하루 아침에 혁명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시민사회적 지구전으로 들어간다. 이때 지구전이란 광범위한 연합전선, 그리고 문화적인 역량을 길르는 것이었다.  각 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에 근거한 역사적인 블록을 형성하고, 이를 위기에 대한 대안적 프로그램 안에 포함시켜서 헤게모니를 쟁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세를 살펴보면, 국가와 그 주변에 의한 광범위한 불법적인 탄압이 지속되고, 민주적인질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가고 있는 경제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야 말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고대하는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테틀레프 포이케르트, 1980/1987, "사회의 헤게모니 구조와 파시즘,"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285-304
Dahlia Sabina Elazar, 2000, "Electoral democracy, revolutionary politics and political violence: the emergency of Fascism in Italy, 1920-21",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51, 3: 46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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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 순치, 자아의 등장

역사/1900-1919 2010. 2. 23. 12:01
1910년대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국내의 기존 사회 신분은 심각한 동요 현상을 보인다.  즉 과거가 폐지되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이익을 본자도 있겠지만, 일단 기존의 토지를 기반으로 한 양반층의 재편성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토지를 기반으로 지역에서 안정적인 신분층으로 존재하던 대주지 계층은 계층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가족이나 혈족 내에서는 과거에는 관료진출을 통해 출세를 위한 학문에서, 일단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해외 유학을 선호하게 된다.  이때 많은 양반 대지주의 자제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신학문에 접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조말의 양반층이 학문하는 태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인 대학에서 학업에 임하게 된다.  즉 공무를 완료한 후에 특별한 직업 보장이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러사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들은 확실한 직업과 위세를 갖는데 실패하게 된다.  1910년이전만 해도, 유학이라는 것은 관에 의한 국비 유학으로 모두, 기존의 관료나 국가체제에 봉사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미래안정성이 보장되므로, 고민할 필요는 적은 편이었다.

여기에 일제의 통치 정책은 특히 수세정책은 초기에 주세, 연초세, 가옥세를 신설하여 징수하였는데, 아직 근대적인 공장채제가 발달하기 전이라서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제조하여 자가소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양반지주계층들이 주세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총독부는 징세와 수세를 위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강압적으로 독려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따라서 과서에 수령에 의해 징수되던 마을 단위의 징세에서 이제는 가가호호방식으로 바뀌면서, 공동체적인 연대성이 약화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위생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끌어내서어 이를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가족의 권위가 말살되고 이제는 개개인이 각자의 위생을 책임지고, 이를 국가가 공인해 주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세무공무원을 두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여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고, 교육기회와 기업기회는 제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 유적의 말살과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는 박람회, 박물관의 설립 등이 이어진다.
또한 일제는 초기에 단행된 사회적 간접 기반시설을 위해 토지의 수탈(자진 헌납)과 동시에 노력 동원을 강제하게 된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점에 대해 일본 제국의 자금이 직접 한반도의 항구, 철도, 도로 등의 건설에 사용되었다고 강조하면서, 식민지에 대해 일본이 오히려 희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반도의 자원을 수탈하고, 일제의 제품을 판매하는 루트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제는 또한 1910년대는 내내, 무력을 앞세워서, 한국인들을 통치하였다.  무력 통치는 기존의 권위 체계를 무너뜨려서, 공동체 의식이다, 사회적 신성을 무너뜨려, 긍정적으로는 현실의 냉혹성과 과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고 볼수도 있지만, 사회적 공동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의 상실, 무력을 앞세우는 일제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자신의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기존의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요인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가져왔고, 1900년전후로 시작된 민족의식이 1907-9년의 의병으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아직은 근대화된 의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이 컸었다고 보여진다.  비로서 1910년대의 방황과 1919년의 독립운동을 기점으로하여, 한국인들은 근대적인 의식으로 깨어날 수 있었다고 볼수 있다.  독립운동은 한국인들의 광범위한 참여, 기존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로운 사회적 권위와 공동체 의식이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선이, ?, "초기 자유시 담당층의 정체성 모색과 그 의미," 국제 어문, 26집: 91-112
신지연, 2007, "재현의 언어와 최남선의 산문형 시", : 4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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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일본인과 한국인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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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 없다.

역사/1900-1919 2010. 2. 22. 13:34

인도에서 가장 소프트웨어가 발달한 지역은 남중부 지역이다.  근처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곳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이다.  즉 정치의 중심지인 델리, 경제의 중심지인 뭄바이가 아닌 천민들만이 사는 곳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7년 12월에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곳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천민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공장의노동자로 고용하여 평등한 조건아래에서 노동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감동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근처는 세계적으로 콜센터로 유명하고, 소프트웨어의 개발력도 인정받고 있다.  즉 인도는 지금 천민들의 열정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중국과 인도의 미래 경제발전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본다.  나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중요한 점은 국민누구나가 평등한 조건에서 공평하게 일을 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한 요건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면 인도가 더 민주적인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직업선택이나 경제활동 면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완고하게 남아 있다.  물론 법률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카스트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는 천민을 멸시하고 직업세습, 멸시하는 직업이 남아 있다.  반면에 중국은 공산당이 사회의 중요한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혜를 받는 층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통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속에서 그동안 사회평등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직업면에서는 천대받는 직업이 거의 없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대한 열망이 무척 강한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는 천민자본주의적인 요소는 남아 잇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중국이 인도보다는 앞서서 경제성장을 이룰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1910년대를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경기도의 수도권, 그리고는 평안남도와 경상남도가 손꼽힌다.  조선의 역사에서 본다는 평안도와 경남지역은 가장 소외받는 지역이었다.  평안남도 지역은 이후에 기독교를 일찍받아들이고, 근대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변신한다.  물론 독립자강운동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경상남도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주하여 발달시킨 부산과 마산을 축으로 상공업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1910년대에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민족자본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경제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그래도 마산은 상대적으로 지주계급보다는 상공인세력이 강했고, 기독교나, 일본의 외래 종교가 일찍 이입되어 정착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봉건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열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아도, 이루는 지나치게 자신의 기득권을고집하는 경향이 심함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혁신이 나타나지 못하고, 정체되게 마련이다.  차별없이 기회를 주고,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제도나 관행이 확립된 지역에서만이 모험, 진취성, 혁신성이 나타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참고문헌
주익종, 1994,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 경제학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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