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920-29'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0.03.09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2. 2010.03.08 물질적 포만은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다
  3. 2010.03.06 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4. 2010.03.04 지진은 사회의 견실함을 시험한다.
  5. 2010.03.03 운동권에서 파시즘으로
  6. 2010.03.02 노동자의 태도를 문제삼다 1
  7. 2010.03.01 노동자의 혼이 사라지다
  8. 2010.02.27 대량소비를 즐기는 동안 금융자본의 사기는 배태되었다.
  9. 2010.02.26 남부의 반동
  10. 2010.02.25 말과 폭력이 싸울 때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넘어가기

역사/1920-29 2010. 3. 9. 08:03

일본에서 해방되고 2개월 후에 태어난 조갑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귀환한 가족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일본의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월간 조선, 1984년 8월호에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 일본 현지 특파 취재"에 많은 노력을 들려서 한국에서 근무했던 총독부 관리들을 주로 일한 협회를 통해 만나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기록물이다.  일본 관리들은 주로, 일본이 한국에 물적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인적으로도 교육이나 조직 생활을 통해 근검절약, 절도, 공적인 일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갑제는 내용자체에 대한 반박은 별로 없다.  아마도 자신이 가정생활을 통해서 이런 점을 수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한국인(일본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일제는 조선인이라고 불렀다)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점이 부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고 있다.  또는 일본관리들의 일부는 한국인 협력자들(우리가 친일파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책임을 넘기고 있다.  즉 친일파들이 일제가 요구한 것을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집행을 해서 한국의 피지배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는 식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 조갑제는 "그러나 심하게 말한다면 '강간으로 생긴 아들도 유산은 유산이다'는 얘기로 해석될수 있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들이 유산인것 들림없지만 그것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294쪽)라고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는 아무말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당시의 조갑제 나이는 40이 되었지만, 아직 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 질문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취재자가 취재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실 제시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없었기에 그랳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병합, 한국인들에게 이미 끓어 오르고 있는 교육열과 실업에의 기풍을 막은 점, 일제를 통해 조선인의 문화적인 역량을 말살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점, 한국인들끼리 분열하도록 통치한 점에 대한 인식을 배우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요즈음의 역사적인 자료는 이미 많이 밝혀져 있어, 오래 전에 배운 사람들은 이런 점을 제대로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도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항상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되는 것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역사 해석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조갑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갑제의 친일 옹호 논리가 대강 나오고 있다. 즉 친일은 당시의 대세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 당시에 한국땅에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이었다는 논리이다.  이를 욕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배반하여 사욕을 취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런 공동체는 쉽게 망한다는 점을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만일 친일한 자를 사회적으로 용서한다면, 이런 사회는 자신의 공동체 조국을 팔아 먹는 것을 장려한다고는 볼수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먹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런 공동체는 꼭 유지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더 응집력이 공동체에 먹히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순리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같은 민족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같은 운면을 지닌 것으로 친다면, 적어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처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란 인간성을 말한다.  인간적인 배신,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 같은 말이다.  역사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도둑질이나 독재나, 탄압을 아주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하는 이들이다.  도둑은 밤에 자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부시대통령은 금욕정신으로 무장하여 아침마다 기도하고, 술도 먹지 않고 담배도 치지 않지만, 열심히 무고한 이락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던 것이다.  대부분의 독재자들과 탄압자들은 금욕적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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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포만은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다

역사/1920-29 2010. 3. 8. 08:02

1920년대의 미국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이자,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했다.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상품과 인간의 이동을 빠르게 했을뿐 아니라, 정보의 소통의 속도 역시 빠르고, 대량으로 가능케했다. 인간에게는 신체의 이동만이 아니라, 정보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상상 가능하고,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를 처리하여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의 사회를 한국의 대량소비시대의 사회와비교하는 경우에는 대개 소비자 내구재의 범람과 동시에 자동차를 개별가구가 보유하게 된 것,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수용, 신용카드에 의한 소비, 국내외 여행의 일상화 등을 꼽게 될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80년대, 1990년대의 한국사회와 그 모습이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김형곤, ?: 91). 이에 더하여, 혹자는 대량소비에 이어진 경제위기를 연상하면서, 비슷한 점, 혹은 무절제한 소비가 가져온 재앙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점도 많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민주화,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은 점(물론 노동시간의 단축은 1990년을 전후하여 주로 화이트 칼라 층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주장하여 법률적인 단축은 이루어 졌으나, 실제 공장의 근무시간에서는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서 여가의 활용이 미국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은 여가의 활용, 특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시청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가정일을 위한 기계들의 도입(전기다리미, 진공소제기, 그릇세척기, 세탁기, 냉장고 등)은 늦어졌다. 한국은 그보다는 보다 혼합적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의 여가는 텔레비전에 더 많이 의존하였으며, 여성들을 위한 가전제품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원만하였다는 점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소위 시공간의 압축을 정신적으로 느끼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자동차도 보급되었던 시기이다. 신문과 잡지, 라디오의 등장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여기에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촉발된 교외 주택의 광고는 물론이고, 대량소비를 위한 광고도 큰 몫을 차지한다. 당시의 미국은 한편으로는 금주법을 지속시켜, 정치적으로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기록될 지 몰라도, 광고 문안은 다분히 감성적인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의 미국의 광고보다는 현재의 우리의 광고와 매우 닮아 있다.

"보다 좋은 디자인과 설득적이고 리얼한 사진으로 상품을 소개하면서 당시의 광고 카피라이터는 상품의 특질과 잇점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이 언제나 바라고 있는 욕망인 '젊어지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지지 않고 싶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 등의 것을 상품과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가공의 남녀가 X비누를 사용하였더니, 운명이 바뀌었다든가, 인기 있는 사교계 인사가 눈을 가리고 담배맛을 본다거나, 영화배우 등의 인기인이 광고물품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김형곤, ?: 108).

라디오의 보급은 한편으로 상업적인 소비에 몰두하여 그들의 사회적인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소비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사회나 국가에 대한 공익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세계평화와 같은 이상주의적 사고보다는 현실적 가체에 집착하게 되었다"(김형곤, ?: 117). 그러나 라디의 효과는 단순하기 보다는 하나의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음성정보가 대량으로 보급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따라서 라디오의 보급은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에만 적합한 것만은 아니었고, 표준말의 보급, 말씨나 억양의 전국적인 통일을 향해 나갔고, 사고방식이나, 뉴스의 보급, 뉴스에 대한 해설, 음악의 보급, 쌍방향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편성을 통한 청자들의 참여 등을 통해 국가의 사상적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적인 감각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격적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어갔음을 뜻하며, 만약 미국이라는 국가의 통일이 무성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면 라디오와 함께 국가/민족의 시공간적 통일과제가 완성되었다고 볼수 있다"(강현두 외, 1997: 42).

"그보다는 라디오를 통한 국가적 통신망의 구축은 민족국가의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며, 가상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개념을 확고히 인식됨으로써 근대적 시민, 혹은 정체의 대상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때문이다"(강현두 외, 1997: 42).

이 시기에 산업 심리학, 게임이론, 심리적인 고민을 담은 소설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심리가 이제 사회과학적 연구대상이자, 조작의 대상으로 떠 오르게 된다. 세상이 공간적으로 동시에 소식이 전해지고,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통한 여행이 가능해지고, 신문잡지, 라디오, 영화가 등장하여 정보의 유통이 많아지고, 빨라지자,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강현두, 원용진, 전규찬, 1997, "대중매체의 시공간 재구성과 소비주체 형성: 1920년대 미국의 라디오 방송과 광고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42, 1: 5-47
김형곤, ?, "1920년대 미국 소비 사회의 형성배경과 영향," [미국사 연구]: 91-120
Sue Bowden and Avner Offer, 1994, "Household appliances and the use of time: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since the 1920s," Economic History Review, XLVII, 4: 72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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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역사/1920-29 2010. 3. 6. 07:35

(1) 신해혁명의 영향

1911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성립시킨 혁명이었지만, 이 혁명의 기본 성격은 만주족이 지배하던 중국을 한족이 다시 그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손문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과, 북양정권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로 바뀐다. 이때 몽골과 티베트 역시 청나라의 멸망은 곧 자신들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독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과 티베트는 민족을 구성하면서도 동시에 티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르 구상하여 몽골의 통치자도 애초에는 티베트에서 온 불교지도자를 내세우고 받아들여진다. 티베트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2)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

민족 자결주의가 논의되던, 1차세계대전 후의 세계에서는 지구상의 민족들이 각자 자신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패전국도 승전국도 아니지만, 이미 공화국을 선언한 중국은 제국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폐기, 일본의 21개조 요구 철회, 전쟁 중에 독일이 장악한 산동반도를 약탈한 일본에 대해 산동반도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중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의 북양정부는 일본이 만주지역의 철도운영을 위해 군사를 파견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는 북양정권이 사실상 중국의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권이었기에 그렇다. 이후에도 손문이 죽기 전까지 대개는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만주와 내몽골로 침투하고, 외몽골이 이미 신해혁명이후에 독립을 선언하고, 티베트에서는 사실상 자치를 하고 있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편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민들이 민족에 기반하여 독립국가가 될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였다.

한반도에서도 1919년에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민족에 기반한 국가 건설로 나아가게 된다. 이 해는 또한 조선왕조의 사실상 독립된 마지막 왕인 고종이 서서함으로써 왕조의 복고에 의한 국가 건설보다는 근대국가인 민족국가를 주창하게 된다. 물론 순종이 1907년에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사실상 일본제국이 만든 괴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권한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에 강압에 의해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엇으므로, 사실상 고종이 마지막 조선의 왕으로 보는 것일 옳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3)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

볼세비키 혁명은 민중에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즉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 의거한 국가 건설이다. 이에 따라 1920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창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물론 초기 중국의 국민당은 손문의 3민주의와 5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구성을 계획하므로, 이념적으로는 공산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손문의 사후, 장개석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북벌을 협력하여 성사시킨 후인 1927년 이후에는 공산당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으로 돌아 선다. 이것이 공산당으로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민중의 국가 건설이념을 전파하고 동조자를 구하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베트남의 공산당이 지역적 분열(통킨, 안남, 코친 차이나)을 싸우면서 공산당 이념에 의한 프랑스에 대한 독립운동을 주창한다. 역시 볼세비키 혁명의 직접 영향을 받은 몽골과 신장지역 역시 공산혁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몽골은 직접적으로 이를 성사시키고, 신장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에 의한 국가 건설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인과 한국인들도 공산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함은 물론이다.

(4) 일본 제국주의의 인종적 정당성 주창

일본은 기본적으로 이미 장악하고 있던 한반도, 만주, 산동반도, 대만을 넘어서, 소위 만몽지역까지 넘나 보게 된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화북지방까지 나아가게 되고, 중국 전역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군사전략이었다. 다만, 이들이 한반도, 만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념적 전략이었고, 그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많은 이들이 이에 동조하게 된다. 후에 일본제국주의는 더 나아가 아시아인 또는 황색인종을 대신하는 지위로까지 이념을 확장하고 있다.

아무튼 일본의 제국주의는 인종에 기반하여 제국의 침략 확장 정책으로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 건설운동의 해외팽창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본다면, 민족주의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수 있다. 1920년대는 현재의 국가가 나온 역사적 기원이 발생한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동아시아 지역은 민족, 종교, 민중적 이념, 인종 등의 요인들이 착종하면서 국가 건설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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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은 사회의 견실함을 시험한다.

역사/1920-29 2010. 3. 4. 07:39

아이티와 칠레에 지진이 발생했다.  규모나 지진의 강도 면에서는 칠레가 강했고, 피해면에서는 아이티가 심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간과하고 있는 점은 지진은 자연재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능력을 시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마산의 2003년 태퐁 매미가 덮쳐서 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해였을 때 공동체의 위기를 거론하였다.  즉 피해자체도 문제지만, 피해에 대처하는 공무원(당시의 마산시 시장의 행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을조직(공식적으로는 수방단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있고, 아마도 민방위조직기 가동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이 일차적으로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고, 이어서 동네 자체에서도 자발적인 대처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사후의 대처방식은 이후의 재해와 재난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 문제는 다시 발생할 가능성만 높여 놓았다.

1923년 9월 1일 정오의 2분전에 일본의 동경 인근에 발생한 규모 7.9 규모의 지진은 사회가 지닌 죄의식, 피해의식, 가해의식 등 무의식적 역사에서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이때의 지진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 약 13만명 정도이 죽음, 이후의 화재, 쓰나미 등의 피해로 이어졌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1) 해일의 위험, 후지산의 폭발가능성 등 자연재해의 후속타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 (2) 1910년대 이후에 생겨난 호황과 자유주의적 사회풍토로 사람들의 생활이 방탕해져서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는 생각, (3) 교도소에 갖힌 사람들이 풀려나와서 약탈과 강도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 (4) 1923년 6월경에 적발한 사회주의자 음모 사건과 연결시켜서,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소란을 여기할 것이라는 소문, (5)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1918년 쌀 소동사건, 1919년의 독립운동, 이미 일본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10만여명에 달하는 한국인(당시 일본 당국자들은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일합방전에는 한국인이라고 불렀었다), 특히 관동지역인근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2만여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감 등으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즉 조선인의 약탈에 대해서는 지진발생후 3시간만에 동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손잡고 공격한다" 내용이었고, 이어서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당일 오후 7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공격한다"는 각종 내용이 누군가의 공개적인 소문 살포와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근의 조선인들이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온다, 무기를 들었다, 떼를 지어서 몰려 다닌다, 강도, 약탈, 강간, 투독(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등의 소문으로 처져나갔다.  이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신문에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  대개는 2-3일동안에 이 소문에 의해 약 6천여명이 살해당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누가 한국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본어 발음을 시키거나, 수염을 기른 사람, 키가 크고, 광대뼈가 나온 사람, 쌍꺼풀이 지지 않은 사람 등을 골랐다고 한다.  죽인 당사자들은 자경단이라고 하여, 마을 자체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죽여졌다고 하나, 이당시는 이미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계엄시기였으므로, 군인과 헌병, 경찰이 동조하거나 방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실상이다.

아무튼 역사에서 6천여명이상의 사람이 2-3일 사이에 소문에 의거하여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평상시에 지니고있는 사회의 원죄를 떠올린다.  즉 비상시에는 사람들이 이런정도 잔인할 수 있는 사회관계가 평상시에는 사회적 틀(facade)에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티의 지진에 이은 무권력상태, 대통령니 도망가고, 약탈이 일어나고 하는 상황을 보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인 연대나 공동체의식의 정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 마산에서 2003년에 희생당한 8명의 매미 피해자들은 마산시민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마산사람들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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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에서 파시즘으로

역사/1920-29 2010. 3. 3. 09:35

일본은 1910년대 특히 1차세계대전에서 국가간 무역이 어려워지면서 각국은 어쩔수 없이 국ㄱ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쟁 당사국들을 상대로 국내 공산품들을 수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산업이 발전하고, 더구나 선박을 구성하는 중요 부품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다다랐다. 이어서 섬유산업이 급성장하고, 많은 농촌의 이농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에서의 쌀값 급등 현상에 직면하자,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쌀 공급기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단 초기에는 대만으로부터 쌀을 수입하지만, 곧 이어서 한반도에서 수리사업, 치수사업, 경지정리, 비료의 투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쌀 생산은 급증하고, 일본 쌀값의 1/3이하로서 일본에 수입된다. 이로서 일본의 농민들은 더구나 소작농들은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단일이유는 아니다. 이미 일본의 소작농들은 가혹한 소작료와 적은 농지 규모에 시달리고 있었다. 즉 생산량의 1/2을 지주에게, 그리고 1/4을 생산비용으로 나가서 실제 수익은 1/4선에 불과하였고, 이는 도시의 하층노동자 계급에 비해서도 1/2정도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이미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이민을 금지하엿고, 농산물 수입도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농촌은 과잉잉구, 과잉생산에 시달리게 된다. 지주들은 이에 대응하여, 기계화, 광작화, 소작인들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갔지만, 소작농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그리고 전후 불황에 허덕이며, 노동운동 활성화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이들과 지식인 집단이 합세하여, 소작인 조합이 발생하여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된다.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결국 이러한 농민의 스트레스르 풀기 위한 하나의 출로가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해외팽창에의 욕구를 가진 해외군부(관동군, 조선반도의 일본군), 국수주의적 우익세력들이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재벌(자이바츠)들에 대항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다음 2개의 사례는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기타 잇키 (北 一輝), 1923,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서 일본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1단계는 일본의 기존 엘리트를 깨끗이 일소하고 천황과 인민의 직접 관계에 기초한 체제로 대체한다. 2단계는 100만엔이상되는 개인재산을 몰수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며, 10만엔이상되는 개인 소유 토지를 압류하고, 재분배한다. 천황은 황실재산을 포기한다. 궁극적인 목적으로 일본은 국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 부국 (영국, 러시아)으로부터 정의를 지켜 서양에 대항하여 아시아 국가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Beasley, 1990: 213-214).

(2) 이노우에 닛쇼(井上 日召, 1886-1967)의 血盟團(게쓰메이단)은 금융가와 산업가들을 선정하여 암살함으로써 농민의 천년왕국을 이룩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Beasley, 1990: 214).

일본의 파시즘의 형성은 다분히 농업파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1920년대를 통하여 일본정부는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 불간섭 주의를 고수하였고, 이에 대해 비교적 대기업들도 성장은 더디었지만, 합병을 통하여 규모를 키웠고, 독점력을 강화시켜 해외로 진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고, 국가의 개입이 오히려 무역을 방해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감소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농업과 농민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W. G. Beasley, 1990/1996, The Rise of Modern Japan 일본 근현대사 (을유문화사) 중 10장 군인과 우익: 1918-1933을 참조
Seymour A. Broadbridge, 1989, "Aspects of economic and social policy in Japan, 1868-1945", Peter Mathias and Sidney Pollard eds.,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Europe, Vol. VI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06-1145
今井淸一, 1974, 大正デモクラシ-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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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태도를 문제삼다

역사/1920-29 2010. 3. 2. 07:56
19세기 말까지, 그리고 테일러가 노동자들을 선발할 때 그들의 태도를 점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업무 능력, 실적을 중시하고,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단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장 내외부의 사정은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고 채용하고, 평가하고, 해고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내부의 사정은 공장이 대규모화, 기계화,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면서, 이미 공장은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지겨운 단순 작업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장은 창의성도, 자신의 성과를 그대로 인정받으면서 평가에 반영되는 체제도 아니었고, 그래서 노동자나 경영자들 모두 이러한 노동자의 자발성 상실이 작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법은 물론이고, 산업심리학자들의 적성검사나 IQ검사 등이 등장하였고, 이후에는 엘튼 메이요의 공장내 사회관계의 중요성까지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내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1차세계대전당시의 전쟁 전략에서 병사들의 심리적인 요소가 고려되지 않아 많은 희생자와 전쟁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었던 점에도서 알 수 있다.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는 것은 단순히 태도 검사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정도는 노동자들에 대한 부분적인 소속감을 고취방향으로 이루어 지기도 했다.  즉 성과공유제, 이익분배제, 일부 선진적인 공장에서는 주식의 배분까지도 이루어졌다.  이런 성과공유제도는 노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경영자들이 노동자들의 헌신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경영자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였으므로, 대부분은 과거의 가부장적인 또는 가족적인 전략이 더 유효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탄광, 철강, 철도 등에서 나타났듯이,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하나의 공장 마을을 이루고 주택과 상점을 공유하는 공장거주체제에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연대가 손쉬워 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력하게 나타났다(한겨레 신문, 1996. 1. 20일자, 1920년대 미국판 파업전야, Matewan 영화소개 - 이 영화는 Matewan이라는 연탄탄광에서 1920년 5월 19일에 발생한 총격전에 의해 회사측의 탐정회사 7명과 노동자측을 위해 노력하던 시장과 세리프가 죽은 사건).  따라서 자동차의 보급, 노동자들의 소일거리의 등장, 신분상승기회의증대는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해치고, 경영자들의 논리가 통하게 되는 기반을 이루게된다.

경영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노동자의 태도를 검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노동자들 사이, 아니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사이에서도 공산주의니, 이중조합주의니, 황색노조, 회사노조, 어용노조 등의 논란이 끊임 제기되고, 이를 기반으로 사용자과 대결하고, 조직내부의 이반자들을 숙청하는 양상이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인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노동조건은 어느정도 향상되었으나, 노동조합의 조직율은 거의 절반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John L. Lewis의 전기(Saul Alinsky, 1970, John L. Lewis: An Unauthorized Biograpgy)는 비교적 미화되었으나, 다른 쪽의 해석에서는 (Alan Singer, ?, "Communists and Coal Miners: Rank-and-file Organizing in the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during 1920s", Science and Society: 132-157)는 루이스를 독재자, 무자비한 조직운영자로 묘사되고 있다.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의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공장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루이스는 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무시하고, 자신만 믿고 따르면,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식의 당시의 마피아 스타일의 조직운영을 하였고, 여기에 그가 공화당을 추종하면서 사회적으로 공산주의자 낙인찍기에 동조하여, 자신에게 저항하는 동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면, 거의 40년간 노조를 장악하였다.  여기에는 사용자와의 저항을 위해 노조들끼리 연대하자는 것도 거부하고, 우선적으로 자신에 대해 적대적인 내부부터 뿌리 뽑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루이스의 조직은 (광부노조) 1920년대 동안에 거의 절반이라로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Reinhard Bendix, 1956,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Ideologies of management in the course of industrialization (New York: Harper Torc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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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혼이 사라지다

역사/1920-29 2010. 3. 1. 12:02

산업합리화의 물결은 한편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문화산업을 만들어냈지만, 공장내의 상황은 오히려 탈숙련화, 그리고 지배체제의 관료화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자율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또한 1910년대의 노동운동의 물결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호황과 민주적 정치체제의 등장으로 개인적인 취업기회와 상승이동(화이트 칼라가 될 기회)가 증대함으로써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체성의 상실은 공장내의 자율성과 숙련의 상실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노동자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사라지고, 사회적인 문화에 휠쓸리는 결과는 낳게 된다. 이는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들의 저치를 개선하기 보다는 물질소비적인 문화에 휩쓸리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도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1차세계대전 이후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경제적 공항과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남동 유럽지역의 이민에 대해 더욱 심화되었고, 아울러 대내외적으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는 한편으로는 일반평등한 선거권에 기초한 정부수립에 의해 새로운 신분상승을 노리는 각국의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추동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되면서, 제국주의세력들은 서로간에 경쟁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자본가와 사회민주주의자의 협조와 거대한 양의 미국 달러의 유입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유럽 자본주의는 간신히 재기하기 시작했다"(포스터, 1956: 73).

대부분의 나라들이 대중의 인기를 배경으로 노동자의 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활용하는 데 반하여, 미국과 영국은 시장의 원칙과 국가의 경찰기구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미국의 경우에는 회사조합이 극성을 부리고, 영국에서는 법률상 조합에 대해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고용주가 자금을 대서 직접 조직하고, 간부직을 차지하는 어용조합은 1886년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 졌다...1927년에는 그것이 900개로 증가하였고, 약 100만 명의 노동자를 가입시켰다. 이들 어용조합은 교묘한 반조합기구의 일부로 대규모의 스파이체제, 회사의 깡패와 밀정, 직장과 산업도시에서의 회사의 테러리즘을 갖추고 있었다"(포스터, 1956: 88).

영국은 1926년의 총파업을 계기로 고용주들은 반노동조합적인 법안을 만들기 시작한다. 1927년에 통과된 이 법안의 내용은 우리에게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들이다. "총파업과 동정파업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비합법적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자는 벌금이나 2년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대중 피켓팅은 금지되었고, 보통의 피켓팅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손해에 관한 민사소송의 지불의무를 부담하기 위해 조합기금이 조성되었다. 공공시설의 조합은 TUC (노동조합회의) 혹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었다. 조합은 파업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했다. 조합이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하게 제한당했다"(포스터, 1956: 102).

물론 같은 시기에 러시아에서도 조합은 국가가 이미 노동자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논리에 따라 노동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전환시켜 놓게 된다. 아무튼 세계적으로 보면 1920년대는 노동조합의 숫자가 줄어들고,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되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업체가 이제 1920년대 들어서 발생하기 시작하고, 극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늦게 그리고 약하게 받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세력들의 공세가 강하지 않아으므로, 노동자 운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 문헌
William Z. Foster, 1956/1987, 세계노동운동사 II (백산 서당)
Jürgen Kocha, 1980, White Collar Workers in America 1890-1940: A Social-political History in International Perspective (London: Sage Publications)
John Kelly, 1988, Trade Unions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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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소비를 즐기는 동안 금융자본의 사기는 배태되었다.

역사/1920-29 2010. 2. 27. 11:32

1920년대 현대인의 대량소비체제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서민들을 위한 자동차, 세탁기, 냉장고가 만들어 지고, 서민들의 오락을 위한 영화, 라디오, 프로게임을 향유하고, 서민들을 향한 광고 공세와 노래와 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물론 이런 추세는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유럽의 발달된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였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군국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였지만, 그래도 1920년대는 소위 대정민주주의 체제를 향유하던 시기였다.

자본은 공장의 합리화과정을 통해, 표준화, 기계화, 콘베이어 벨트 라인의 도입, 분업의 발달(테일러이즘), 줄지어서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는 방식의 도입, 과학과 기술의 도입 등이 활발하게 도입되어, 궁극적으로는 숙력공을 반 내지 저숙련공으로 대체함으로서 판매가를 낮출 수 있었다.  이느 동시에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출수도 있었지만, 현재의 분석 관점에서 보면, 1차세계대전 당시의 노동자의 희생과 민족주의의 도입(민주화된 정부),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어느정도의 임금 인상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소득의 이전이 나타날 정도는 아니었고, 다만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강화하여 소수의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받고, 임금의 상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숫자로 표시하기는 어렵지만, 그저 상위 20% 이내에 속하는 노동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다고 볼수 있다.

기업간 결합과 카르텔 등으로 소수의 기업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독점적인 이윤을 누릴수 있었지만, 과잉축적된 자본은 이를 정상적으로 배출시킬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는 이미 초기 진입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대량생산체제에  그 원인을 찾을수도있다.  광고의 등장이나, 1930년대에 본격화된 군수산업의 발달은 하나의 자본축적의 방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과잉축적된 자본은 결국 금융시장으로 그 출구를 찾아 자산거품이 발생하고, 궁극적으로는 당시에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국가들에 자본 공급을 하고, 증권시장과 같은 금융시장의 발달에 의해 탈출구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금융 공항의 싹은 이미 자라고 있었다.  금융공항은 실은 자산거품 만이 아니라, 사기에 기반하고 있었다.  최근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금융에 대한 거래 규제가 없었고, 회사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서도 대출을 하던 은행들, 투자자들은 이윤이 창출되지 않는데도, 배당만 지속적으로 지급되면 아무런 정보도 요구하지 않던 관행이 결국 금융공항을 발생시키는데 기여한다.  금융공항은 단순히 금융에서 그치는 것이 아리라, 1930년대를 일관되게 영향을 주었고, 결국은 전쟁에 의해 그 해결책을 찾게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1920년대의 공업화, 증대하는 소득, 일반 대중들의 소비 수준의 향상이 민주주의로 귀착하기 보다는 파시즘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특히 공업이 발달한 이태리에서 시작하여, 농업이 기반이나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신생국가들은 동유럽을 통해 다시 공업 선진국 독일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이다.  파시즘은 경제성장 만으로는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될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러준다.


참고문헌
Daniel Chirot, 1977, "파시즘과 세계경제," 서동만 편역, 1983, 파시즘 연구 (거름): 145-169
Ben S. Bernanke and Martin L. Parkinson, 1991, "Procyclical Labor Productivity and Competing Theories of the Business Cycle: Some Evidence from Interwar US Manufacturing Industries",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99, 3: 439-459
Economist, 2007, "The match King: fraud and financial innovation," Dec.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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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반동

역사/1920-29 2010. 2. 26. 07:48

이태리에서 파시즘은 나폴리 지역에서 포 평원을 지나 북쪽으로 행진하면서 로마를 점령한다.  농촌지역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자금을 댄 민간 폭력 조직에 의해 이태리 정치가 유린 당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부는 농업지역이고, 근대화에 저항하는 지역이다.  반면에 북부는 공업이 발달하고, 르네상스를 꽃피운 지역이다.  이곳은 1943년에 독일 나치가 점령하여, 괴뢰정부를 세웠을 때 이태리의 빨치산들이 5만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곳이고, 무쏘리니가 결국 빨치산에 잡혀 즉결처분을 당하고, 그의 시신인 공중 앞에 매달린 곳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히틀러는 남부 바이에른 지역에서 세력을 얻고, 이를 기화로 독일 전역을 장악한다.  남부는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고, 이웃한 헝거리의 영향도 받아서 공장평의회가 조직되어 상대적으로 독일 내에서는 볼세비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북부는 프로이센이 지배하여 산업화가 진행되고, 독일 통일과 정치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곳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남부는 인민전선이 발달하였으면서도, 동시에 2차세계대전 기간중에는 북부는 독일이 직접 지배하였던 데 반하며, 남부는 괴뢰정부가 지배하던 곳이다.  이들 비시정부는 결국 대전후에 반민족 행위자로 처벌을 받는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면서 프랑스 민족 국가의 수립에 저항하는 지역인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남북 전쟁 당시부터, 남부는 분리주의를 주장하고, 대지주 농장에 근거한 농업이 산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남부에서 KKK가 발달하여 한때 5백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거느리고, 미국 정부의 보수화를 촉진시켰다.  보수화는 금주법을 만들어 내어,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음주습관, 법을 경시하는 풍조, 돈이 잇는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술을 마시고 돈이 없는 사람은 비싼 술을 마시지 못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결국 마피아가 번성하는 물질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민자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여 이민자 쿼터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농촌이 몰락하고, 도시에는 자동차가 1920년에 벌써 1백만대가 굴려 다니는 세상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이다.  1922년에 마산에 자동차가 도로에 다닌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자동차 붐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감정적 반작용이 농촌의 보수화였다.

남쪽이 상대적으로 농촌지역이고, 보수적인 지역인 것은 북반구에서는 북쪽이 춥고, 남쪽이 따듯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개 추운지역이 공업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민족국가 수립에 적극적이다.  기후가 온화한 것은 농업이 생산력의 기반을 이루었던 시절에는 유리한 조건이었으나, 이제는 어느정도 추운 것이 더 경제성장에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Robert A. Divine, et. al, 1990, America: Past and Present (Harper Collins Publishers)
Paul M. Sweezy, 1977, "Bettleheim on Revolution from above: the USSR in th 1920s", Monthly Review, 29, 5: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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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폭력이 싸울 때

역사/1920-29 2010. 2. 25. 18:51
1920년대는 러시아에서의 볼세비키 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진행된 공화제의 성립이 동시에 진행된 시기였다.   유럽 대륙에서는 공장소비에트에 기초한 국가체제의 수립이라는 형식과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간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보통 일반 평등 선거권의 도입에 따른 왕정의 폐지와 새로운 공화정의 수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어느정도 진행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움직임과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움직임이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났다.  왕정 복고의 움직임도 아니고, 자유민주공화정 움직임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민족의 영광과 인종의 우세함을 강조하고, 평등과 국가에 의한 인민에 대한 보살핌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세력과 이념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이름하고 있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해서는 지금도 우리의 현실을 평가하면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나는 파시즘에 대해 물론 이태리의 무소리니가 1919년에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소리니가 가장 많이 파시즘의 전형적인 예로서 인용되고 그의 정책을 분석하기는 하지만, 파시즘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나는 무소리니 당시에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원로 사회학자가 표현한 Filippo Turati(1857-1932)의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말의 혁명에 대항한 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무소리니는 합법적으로 집권을 하지만, 그가 사용한 수법은 폭력단을 조직하여 노동자 파업을 파괴하고, 민주적 집회를 공격하고, 노동자 세력이 장악한 도시에서 폭력을 일삼는 방식이었다.  최후로 1922년에 나폴리에서 3만여명이 로마로 향하면서, 내전을 두려워한 당시의 국왕이 결국 무소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하게 하면서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아무튼 합법적인 방식으로, 또는 설득을 통한 집권이라기 보다는 폭력과 위협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폭력만으로 지배를 달성하지는 않는다.  항상 당근과 채찍의 전략이 사용된다.  나치의 경우에도 채찍과 동시에 오히려 당근을 사용하느라, 전쟁준비에 소홀하게 된다.  "나치는 노동자 정책으로써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불만의 위험성을 줄이려고 소심하게 노력하였다.  오히려 사회적 매수를 통한 착취관계의 유지가 테러행위에 의한 것보다 더욱 중요성을 지녔었다"(포이케르트, 1980: 291).  파시즘은 단순히 폭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이태리에서는 대토지 소유 영주계급의 불안을 이용하였고, 독일의 나치는 중산층의 불안을 이용하였다.  "간단히 말해 나치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특이한 시대적 흐름을 통해 혼란에 빠진 신중산층의 지위상승운동에도 의지했다"(포이키르트, 1980: 298).   노동자계급에게도 8시간 노동제나 사회복지를 약속하고 실행함으로써 상당한 정도의 물질 기여를 하게된다.  직접적인 지원을 회피하기 위해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 도서관 등을 노동자 거주지역에 광범위하게 설립하여 노동자의 환심을 사기에 노력한다.

이에 대항하여 이태리의 그람시는 젊은 나이에 하루 아침에 혁명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시민사회적 지구전으로 들어간다. 이때 지구전이란 광범위한 연합전선, 그리고 문화적인 역량을 길르는 것이었다.  각 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에 근거한 역사적인 블록을 형성하고, 이를 위기에 대한 대안적 프로그램 안에 포함시켜서 헤게모니를 쟁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세를 살펴보면, 국가와 그 주변에 의한 광범위한 불법적인 탄압이 지속되고, 민주적인질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파국으로 가고 있는 경제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야 말로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고대하는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테틀레프 포이케르트, 1980/1987, "사회의 헤게모니 구조와 파시즘,"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285-304
Dahlia Sabina Elazar, 2000, "Electoral democracy, revolutionary politics and political violence: the emergency of Fascism in Italy, 1920-21",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51, 3: 46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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