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19세기 2009. 6. 26. 08:13

오늘의 정치를 보면 강고하게 대한민국의 전통은 역시 끈질기구나 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나는 지속적으로 왜 조선이 일본과 따지고 보면, 별로 경제력 그 자체만 본다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던 19세기에 강대국과 약소국으로 갈리게 된었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날  적어도 일본이 대한민국 보다 일인단 국민 총샌산 면에서 2배이상 차이가 난다면, 조선조 시대에는 그저 20% 정도 더 많았던 수준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의 국가는 강하고, 도시는 번창하고, 사람들은 규율이 잡히고, 대외 문화의 유입도 풍부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곧바라고 생산력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에 의존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개인들의 이익 만을 위해, 고종도 오직 종묘 사직의 보전과 일척의 안일을 위해, 유학자들은 국가보다는 종묘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였던 것이다.  이완용도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현재 여의도 2배 정도의 이익을  취하면서 일본에 붙어 매국 행위를 자행하였다.  직접 세금을 일선에서거두는 수령이라는 직책을 팔고, 따라서 이들 수령들은 돈을 주고 산 수령직책에서 이익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년에 5번정도 수령이 바뀌었다고하니, 수령의 매관 매직을 통해 국가의 관료들이 이익을 취한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지키는 병사는 없었고, 오직 서울을 지키기 위한 강화도 병사와 서울의 궁궐을 지키는 병사만 있었고, 나머지 백성들을 지키지는 못해, 청군과 일본군, 프랑스군, 미군, 영국군, 러시아군들의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지켜줄 수 있는 조선의 군인들은 없었다.

관료들은 때로는 스스로 관변 단체를 구성하여 독립협회를 때려잡고, 다시 이들을 백성들이 몰아내는 상황이 연출되고있었다.  이는 독립이라는 말도 쓰지 못한던 때를 지나, 이미 외세에 찢기고 찢긴 조선왕조의 말기에 대한 제국을 세우고, 중국은 자주라는 말은 허용해도 독립은 혀용하지 않던 시기에 독립협회가 만들어져, 만민공동회도개최하고, 독립신문도 만들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던 기개를 북돋아 이를 국가의 기틀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국가 관료들이 조직한 관변단체에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며칠 전에 발생한 폭력적 관변단체가 시민들이 자발적 행위를 몰아낸 사건이 그대로 현재에도 재현되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의 백성들은 사법, 입법, 집행을 모두 책임진 수령에 의해 완전히 농락당하고있었다. 수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의를 제기하면, 그 자체가 범죄가 되어 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백성들은 수령의 가학, 양반들의 농간, 지주들의 지세 징수 등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현재 우리가 정부에 비판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공개적인 토론을 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이미 조선왕조때무터 존재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 계속되고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