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6.22 세력 균형이 사회를 지키는 해법이다.
  2. 2009.04.04 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세력 균형이 사회를 지키는 해법이다.

역사/19세기 2009. 6. 22. 14:36

한 사회의 공공적 또는 집단적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위하는 또는 다른 구성원을 배려하면서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설사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보다는 공공적인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공공적이라는 평가를 할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어찌 보면 극히 당연한 것들이다.  19세기 조선은 국제적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 의존이라는 관념. 실제로 매년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집하는 정보의존, 유사시에는 군대의 파견까지도 요청하는 무력 또는 대외 교섭의 의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대외의존의 구조만으로 조선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 대외 정책의 유연성과 효율성이 적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적인 요인을 간과하여 우리의 잘못을 가리게 하고, 따라서 별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 같다.

일단 1840년에 발생한 아편 전쟁은 중국이 결정적으로 서양 외세인 영국의 무력에 굴복한 사건이다.  물론 이러한 무력 굴복에 대해 중국의 청왕조는 서양의 한 나라에게 무역을 허용했다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조선의 헌종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헌종 왕조는 당시에 두개의 세력에 의해 세도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통치 형태도 비변사라는 비정상적인 기구에 의해 단순하고 간략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위기감을 강조하는 것이 세도정치의 실패를 자인하고 나아가 정상적인 정치로의 복귀를 요청할 가능성 따문에 가능하면 왕조의 위기감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 왕조와 조선의 세도정치는 위기감의 둔화로 나타났고, 이것은 실제로 대외 침략에 대한 방비를 허술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결국 조선-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성립된 1876년 이후에, 갑신정변 1882년을 계기로 조선에 3천여명의 병력을 주둔한다.  이전의 청나라-조선의 관계가 사대의 관례였다면, 1882년 이후의 조선-청의 관계는 속국의 관계로 나타난다.  즉 조선의 외교권, 국방을 청에 의존하는 체제인 것이다.  이는 청국의 강압에 의한 면도 있지만, 고종정부내의 외세를 이용한 파벌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는 청국이 그다지 군대의 주둔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고종 정부 치하의 민씨 일파과 고종 자신은 청국에 의존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고종은 왕조의 보존이 중요한 관심사일뿐 국가의 개념을 없었다.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직 명치 유신 이전인 1840년경에 이미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인들과, 화란 상인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구한다.  이들 정보의 특성은 상인들의 정보라는 점과, 영국의 정보를 구할 수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교적 서로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정보를 구할 수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당시에 내부 역학에서(에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 막부와 서남부 지역의 지방 번 세력) 경쟁적으로 무력을 키우고 있었던 점, 그리고 경쟁이란 국가 능력의 경쟁으로 나타나고, 이는 결국 2년정도의 개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되더라도, 서양 무력에 대응하는 국방체제의 구축을 노력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조선과 일본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본의 지방정부의 활성화, 일본 중앙국가의 적극적인 정보 수집과 이에 대한 대응책 모색이 우리와 다르다.  중국의 실패를 곧바로 배울 수 있는 정치체제의 구축이 시급하다.  이는 내부의 다양한 세력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이를 종합, 합의하여 정책으로 바꾸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

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역사/19세기 2009. 4. 4. 17:05

1840년 중국의 아편 수입금지에 맞서 영국은 인도에서 제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판을 두른 함대를 파견한다.  이 함대는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 북경으로 가는 세금물품을 실은 배를 공격하여, 그 항로를 차단함으로써 북경에 있는 중국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아편을 어느정도는 복용하고있었고, 특히 필리핀을 장악한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직접 담배를 가져와, 여기에 아편을 피는 방법이 개발되자 아편 흡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고한다.  이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신대륙이 아닌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부족한 무역수지를 메우려고 하였다.  영국이 갠지스 강 유역을 장악하자, 영국은 홍차, 비단, 중국도자기 등을 수입하기 위하여 아편을 수출한다.  중국에 영국이나 인도에서 생산한 면과 모직물을 팔려는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칙수는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국왕에서 당시에 영국에서도 인체과 정신적으로 해로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비난하고, 이를 영국 국왕이 직접 금해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 아편을 법률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지적하나, 서양의 서적에서는 대개 영국에서 당시에 법률적으로 금하지 않았다고 정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는 당시에 로드넘이라는 아편과 알콜을 섞은 물질을 음용하는 것으로 아편중독자가 생기고 이를 의사들이 정부에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정부는 그 폐해는 알고있었지만, 유통과 무역을 담당하는 세력들의 로비에 의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에서는 1860년경에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1860년경은 실은 중국에 대해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전역에 걸쳐서 아편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던 때이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에서는 아편을 금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아편을 공식 무역으로 허용하라고 무력으로 강제한 국가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아편은 적은 량은 의료용으로사용되고, 19세기 초반에 풍미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에게는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형상화 능력을 신장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편중독이 되면, 신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죽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남부에서 심하게 추정하는 사람들은 2천만명 이상이 아편중독자였다고 한다.  영국과 서구열강들은 1906년이 되면 중국에 아편을 금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으로 강대국이란 힘이 있는 나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