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3.02.26 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2. 2013.02.25 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3. 2013.02.24 바르사이유 조약과 나치의 등장
  4. 2013.02.20 자유로부터의 도피
  5. 2013.02.18 독식과 독박의 민주주의는 결국 나치의 독재로 나아간다.
  6. 2013.02.09 히틀러 연설의 특징
  7. 2013.02.07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하에 나타난 독재와 산업화: 1930년대 경성방직의 사례
  8. 2013.02.06 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경험 (2)

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역사/1930- 2013.02.26 14:35

 

밤에는 야경꾼이 돌고, 마을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대가 구성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외세가 침입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섰다. 따라서 국가가 조직한 군대 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간이 조직한 군사조직은 항상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의 경우에 프러시아에 17세기부터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국가외 조직이 존재했었다, 특히 국가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전쟁 시기에 애국적으로 마을을 지키려는 의용자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는 국가에서 칭찬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참전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자유군단이 조직되었다. 자유란 아마도,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자율적인 군대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미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협약에 의거하여 국민 징병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1차 대전 후에도 수십만명 (혹자는 백만명 단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40-50만 명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이 속해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정규군이 10만 명으로 제한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시에 심지어, 히틀러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도, 오히려 정부의 정규군이 히틀러의 돌격대와 자위대에 눌러 있을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히틀러의 돌격대와 보위대는 자유군단 출신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 자유군단은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였는가? 자유 군단은 겉으로만 보면, 국가적인 수준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고, 프랑스가 배상금의 불이행을 근거로 라인지역을 점령하자, 파업을 선동하고, 폴란드 지역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용병으로 고용할 수있다고 광고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의 경찰이나 군인이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마치 직업군인처럼, 급여를 받고, 추가적인 보너스도 충분히 받고, 연금혜택까지 받았다. 이들의 수요는 국가적인 수요를 빙자하여 사업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군단과 이들이 히틀러의 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동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 대상이다. 이에 대해 J.J. Schokking, 1955, “Militarism in Berman Society”는 국민 징병제의 등장이 상비군 제체와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상비군의 폐쇄성을 혁파하여, 상비군이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뭉쳐있는 상황을 완화시킨 반면에, 국민 개병제는 국민들의 심리나 행동방식 속에 군사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면을 강조하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그들의 확신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서서,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John L. Snell ed., 1959: 60). 구체적으로 가장 민감한 청춘의 시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특유의 사나이의 특성을 갖게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맺은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고, 이는 민주적인 질서로 재편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호의군대화가 진행되어서, 전쟁에서의 패배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같은 방식이 아니면 이것이 타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바이마르 제국을 끝장낸 노동자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체제도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Schokking은 바이마르 체제에서의 자유군단과 히틀러가 자유군단과 독일인들의 군사주의적 성향을 이용한 것은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히틀러가 시대에 대해 완벽하게 독일사회를 이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독일의 군대사회적 성격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도 군사조직에서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민간 항공사, 민간 항공기 제조의 제조를 진행하였고, 또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그리고 민간 군사조직이 정규군에 비해 적어도 4-5배 이상이 존재하였기에 쉽사리 군대로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군사전략이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능숙하게 대해 전격전을 활용한 점도 히틀러의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공수부대의 활용, 전차군단과 통신장비를 활용한 적군의 종심을 관통하는 전격전, 전략에서 후방과 전략적 거점을 상공을 통해 장악하여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의지를 초기에 꺾어 버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의 전쟁을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지지하였는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다. 상당수의 해석에서는 외부의 과격함 (볼세비키)을 싫어하였기에, 내부의 과격함(히틀러)을 선택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서는 전쟁에 게임 논리를 도입하여 전략게임을 랜드연구소를 통하여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병력자원, 무기자원, 국민들의 사기, 전반적인 경제능력 등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팽창해져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전쟁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담한 작전을 두려워 한다. 즉 수세로 몰리면서 대담성이 줄어들고, 그래서 초기에 나타난 독일군의 전격전은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ilsby, 2001/2007,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2차세계대전 최강 독일 공수부대의 신화], 프래닛 미디어

Gorden A. Craig, 1955, The Politics of the Prussian Army, 1640-1945, Oxford, The Clarendon Press

Allan Shepperd, 1990/2006, [프랑스 1940: 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플래닛 미디어

Robert G. L. Waite, 1952, Vanguard of Nazism: The Free Corps Movement in Postwar Germany, Cambridge, Mass.: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아리안 우월주의와 열등인종 학살

역사/1930- 2013.02.25 12:14

 서구의 인종주의는 공식적으로는 폐기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적 언어나 관행은 지속되고 있다. 이의 근원은 바로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간다. 즉 서구가 산업혁명을 이루고,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선구자적 인종 결정론은 당시에 고비, 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18531855)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비노의 이론은 Nicholas S. Timasheff, 1955/1961, Sociological Theory: Its Nature and Growth, 사회학이론, 수도문화사: 74-76를 참조).

 이 이론은 가장 자명한 명제로 (1) 문명의 흥망이나, 국가의 흥망은 우세한 인종의 혈통 순수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시에 널리 인용되던, 서구의 진보론을 거부하고, 서구는 현재 팽창하면서 인종이 혼혈이 되어서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고비노는 독일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좀 더 혼합종이기 때문에 불란서인들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진실로 우월한 민족은 영국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그는 논하였다” (Timasheff, 1955/1961: 74). 그에 의하면, 북구 유럽 사람들과 북부 독일, 그리고 영국인들이 가장 순종인 백인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후에는 미국, 독일 발달하자, 이론을 수정한다. 백인이 다른 인종과 합쳐도 백인종의 우월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두 번째 명제로는 아리안 우월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모든 주요한 문명들은 백인종의 최고의 줄기를 이룬 아리안인종이 달성한 것이었다” (Timasheff, 1955/1961: 75). 이는 물론 사후적인 설명이다. 즉 과거에는 백인종보다도 우월한 문명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문명은 백인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하므로, 아리안종의 문명이 가장 우월한 문명이고, 따라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우월주의는 두가지 형태로 구체화된다. 즉 저열한 인종은 우월한 인종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과, 동시에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이 부족하므로, 저열한 인종의 영토를 침략하여 이들을 몰아 내는 것은 문명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나치의 인종이론가인 Hans F. K. Günther는 아리안 인종중에서도 노르딕 인종이 가장 우월한 인종이고, 이는 독일 게르만 민족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게르만 종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 1922, Rassenkunde des deutschen Volkes, 독일민족의 인종과학). 즉 아리안 인종이 코카사스 산맥 아래에서 시작하였다면, 게르만 종족은 민족 대이동시기에 고트, 반달족 등의 이름으로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한 종족이다. 아리안 종족에는 아시안 아리안 즉, 셈족까지 포괄하는 것이었으나, 나치의 지도자들은 아시안 계통의 아리안 족은 배제한다. 그러나 나치의 갈고리 상징모양 (불교의 상징을 방향을 바꾼 모양)이나, 스스롤 정당화할 때는 힌두교의 베다, 시들을 인용하였다.

 (3) 당시에 인종이론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러한 영향력은 현실에서의 이종족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이기에 환영을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고비노 이론은 프랑스에서 그의 이론은 많은 사람의 상상을 황홀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퍼져 있던 진보이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Timasheff, 1955/1961,: 75-76).

 독일은 고비노의 이론을 이어받아 Houston Stuart Chamberlain (1855-1927)19세기 말에 독일에 소개한 소개하고, 독일어로 [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결국 프러시아의 빌헤름 2세와 그의 주변에 영향을 주었고, 후에 나치는 이를 취하여 인종이론에 기초한 침략, 우생학적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챔버린이 1899년에 발간한 책은 그 후 10년간에 걸쳐 약 6만부가 판매되었고,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10만부가 판매되었고, 1938년까지 25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즉 지속적인 베스트 셀러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향을 주어 1924년의 이민제한법을 정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4) 아리안 우월주의는 반대로 흑인과 유태인은 열등민족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애초의 고비노나 챔버린의 반유대주의에서는 주장되지 않았지만, 나치 시기의 이론가인 군터에 의해 제기되고 이론화되었다. 즉 고비노는 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에서 오히려, 유대인들은 어려운 자연조건에서도 이를 극복한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민족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자치에 의해 편집되었다. 챔버린의 경우에도 유태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중세이후 반유태주의 정서는 독일에 이미 만연해 있었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 경쟁관계에 의해 더욱 촉발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항하여 발생하였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들이 상인이나 금융업 등에 중사하였으므로, 이 분야의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인들의 배척을 받았을 것이다. 나치의 이론가인 군터도 유대인들의 특성을 상인정신을 가진, 그리고 기교가 많은 무역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85년에 Josiah Strong 목사가 인종주의 사상을 배태하였다. 반유대주의적 사회적 분위기는 프랑스의 드레퓨스 사건, 그리고 러시아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드러난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중엽이후 1905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중의 학살과 박해가 일삼아 졌다. 당시에 수천 명이 죽은 것으로 보고된다.

 (5) 히틀러는 1938년부터 시작된 체코 침입, 그리고 1939년의 폴란드 침입에서 같은 아리안 계통의 인종끼리 침입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혼란을 느끼게 된다. 폴란드, 체코 민족은 아리안 계통이기는 하지만, 폴란드는 1939년 침략 당시에 하위 인종으로 다시 규정하여,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체코는 물론 독일 거주인들 Sudeten문제로 침략하기는 했지만, 역시 인종적으로 몽골계통이 섞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하여 아리안 인종에서 철회하고, 침략 대상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물론 러시아를 침입할 때는 슬라브 민족은 인간에 속하지 않고, 하위 인류에 속하므로, 제네바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쟁포로에 대해서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우월한 인종의 생존공간 Lebensraum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슬라브 민족이 살던 지역으로 참략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 민족이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전쟁 말기 병사의 숫자가 부족해 지자, 슬라브 인종도 전쟁주인이 아니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을 일부 변형하였다.

신고
Trackback 1 : Comment 0

바르사이유 조약과 나치의 등장

역사/1930- 2013.02.24 12:04

  나치의 등장에 바르사이유 (히틀러의 표현에 따르면, 파리 교외) 조약의 가혹함에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가혹하다는 것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독일이 1차세계대전을 발발시킨 책임을 묻는 것은 승전국인 프랑스, 이태리,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등이 다른 당사자로 참여하고, 독일이 그 대상으로 참여하는 형태이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바르사이유 조약의 대표단의 사진에 따르면, 59명의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대규모의 대표단이나, 실제로 협상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서명의 당사국이 되지도 못하였다. 최후까지 협약의 협상과 서명에 참여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였다. 당연하게도 프랑스가 가장 강경하게 독일의 전쟁 배상 책임을 강하게 물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절에는 독일을 침략하여, 승리로 이끌었지만, 반면에 1871년 독불 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패배의 곤혹을 치루면서 가장 피해가 켰고고, 독일과 국경선을 직접 마주하면서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던 국가였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상대적으로 독일의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세계경제가 위축될 수 있으므로, 약한 제재를 원하였다.

  제재라는 것은 전쟁 배상, 배상이 현금으로 어려우므로, 현물과 지적재산권도 포함하고, 침력으로 팽창된 영토만이 아니라, 식민지와 독일 국경내의 광산자원이 매장된 영토까지 장악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더불어 군축과 군수산업의 기반활동을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은 독일이 직접 현금으로 주는 것은 오히려 독일 경제를 파괴시켜 세계경제에 위협을 준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독일에 대해 금융지원을 통해 배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고 실제 그렇게 실행되었다.

  그러면 전쟁 패배국에 대해 이러한 내용의 제재가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대표였던, 케인즈가 카르타고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영국 협상대표직을 사퇴했고, 또한 대부분 1871년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5년정도에 배상이 가능한 정도를 부과한 점에 비해 59년에 걸친 배상을 부과한 점은 과도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카르타고식의 평화라는 것은 기원전 로마가 카르타고를 대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카르타고를 완전히 불살라버리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를 삼아, 도시 자체가 사라진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케인즈가 판단하기에는 바르사이유 조약대로 이행될 경우, 독일 경제는 사실상 파산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반론을 펼치는 학자들은 바르사이유 조약의 내용은 당시의 배상 수준으로 보면 상식적인 내용이지 특이한 점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바르사이유 조약은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전범 책임을 묻기도 하였지만, 또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와해에 따른 새로운 국경선을 획정한 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팽창을 강력하게 제어하던, 동부지역이 사실상 사라짐으로써 국제적인 세력균형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생국에 해당하는 폴란드, 독일주민을 대량으로 갖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독일주민이 많은 오스트리아, 신생국 헝가리, 제국이 사라지고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가 혼란 속에 빠진 러시아 등이 모두 독일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독일 1936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1938년에 체코, 1939년에 폴란드를 공격함으로써 증명되었지만, 아무튼 국게적 세력균형의 와해라는 것이 독일의 나치등장과 성공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독일이 바르사이유 조약을 충실히 이행하였느냐의 문제는 별개이다. 실제로 바르사이유 조약은 1919년에 체결된 이후에도 계속 약화되어 가고, 히틀러의 등장 직전인 1932년에는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에 까지 가게 된다. 물론 1932년의 상황은 1929년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대공황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지불 배상을 유예하였던 것이다. 실제의 배상은 1932년 현재 1919년에 약정된 금액의 1/8정도가 지불 완료되었다고 한다. 물론 배상의 부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부담이 컸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이 기간중 독일의 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933년에 히틀러가 조약 무효를 선언하고,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독일 정부, 특히 서독정부는 배상 의무를 다하여, 2010년에 배상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2차세계대전이후에 바르사이유 조약이후에 조정된 배상금을 독일 통일이후로 미루어졌으나, 서독 정부는 자발적으로 배상의무를 통일 이전에도 지불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독일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독일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역사적 채무를 무겁게 여기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이러한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이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자유로부터의 도피

역사/1930- 2013.02.20 10:20

 독일인들이 1920-30년대에 나치즘에 흡수된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집합심성때문인가? 이에 대한 확정된 답을제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치 지도자들은 대중들의 피학 증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 가학을 선호하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치 지도자들은 때로는 지배받는 것이야말로 대중의 소망이다” (Fromm, 1941/2012: 232)라고 주장하였다.

 Zevedei Barbu, 1956, Democracy and Dictatorship: Their Psychology and Patterns of Life (New York, The Grove Press)도 같은 맥락에서 이를 설명한다. 즉 민주주의를 생성하는 조건과 전체주의를 생성하는 조건을 매울 다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독일인들이 민주주의적 상황에서 전체주의를 수용하는 상황으로 전환되는 사회심리적 조건을 분석한다. 즉 나치즘이라는 정치문화적 수준에서의 표현은 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의 사회심리적 상태에서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사회심리적 해석이 경제적, 정치적 해석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한 국민들의 집합심리적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연 현재 우리의 집합심리상태가 향후 민주주의 또는 전체주의적 정체와 어떤 상호 선호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민족 사회주의적 (나치즘) 사고 경향, 통제된 경제, 군사주의에 대한 선호 등은 나치즘으로 나아간 조건이 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사회심리적 성격의 깊은 현실의 한 증후로 볼 수 있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나치즘은 독일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 아니라, 적어도 특정한 사회 경제적 조건아래에서는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아니 물음을 현재 우리의 상황에 대입하면, 현재 대한민국은 나치즘을 견딜만한 수준인가로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에서의 도피에 일단의 암시가 나와 있다. (1) 민주주의 상태에서도 심리적으로 피곤하고 내적으로 체념한 상태에서는 나치즘이 수용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이처럼 쉽게 나치정권에 굴복한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주로 그들이 내적으로 피곤하고 체념한 상태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의 특징이다” (Erich Fromm, 1941/2012, Escape from Freedom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17).

 (2) 두 번째로, 개인들의 상승이동의 가능성이 막히고, 사업기회가 제한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되는 희망없는 사회에서는 나치즘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우리가 앞에서 일반적인 독점자본주의의 전형적 특징으로 설명한 개인적 허무감과 무력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Fromm, 1941/2012: 225). “나치는 보수적인 견해이든, 진보적인 견해이든 일치하는 것이 있다. 즉 나치는 일자리와 생존을 보장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다수의 인민들이 바라던 연대감을 제공하였다” (Robert H. Lowie, 1954, Toward Understanding German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마지막으로 개인들이 가족이나, 이웃, 동료 등의 일차적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을 경우에는 나치즘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가학적 경향과 피학적 경향은 둘 다 고립된 개인이 고독을 참지 못하고, 그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공생관계를 필요로 하는 데에서 생겨 난다” (Fromm, 1941/2012: 229).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 개인이 더 큰 집단과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Fromm, 1941/2012: 218). 나치는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공동체로의 귀속감을 제공하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따른 심리적인 굴욕감과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이름으로 대외적인 위상을 공격적으로 높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당한 수치를 회복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안전감도 동시에 주는 것이었다. 나치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굴욕을 당한 독일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패배자들에게 권력을 주었고, 구제도의 몰락과 파괴이후의 국민들에게 인간사회의 유기적 안정감을 제공하였다. 물론 이는 민족 공동체의 이름으로 제공하였다. 물론 이 민족공동체는 열등한자들을 배제하는 배타적 민족 공동체였지만, 적어도 공동체 내에 포섭된 이들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위안을 제공하였다.

 3가지 측면만 고찰해 보아도 현재의 우리사회에서 과연 나치즘을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나치즘의 새로운 이념에 깊이 매료되어, 그 이념을 주창한 자들을 열광적으로 추종한 사람들은 바로, 소상인, 장인, 화이트칼라로 이루어진 하류 중산층이었다. “그들의 인생관은 아주 편협했고,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미워한 반면,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기심과 질투심을 불태우면서 자신의 질투심을 도덕적 분노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결핍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Fromm, 1941/2012: 220). 사회적 연대감의 폭이 좁고, 깊이가 없을 경우에는 편협한 사고의 틀에 잡혀서 적대감과 질투심에 불타 결국은 민족 공동체와 같은 보다 폭이 넓으면서도 귀속적인 속성에 의존하여 귀속될 수 있는 배타적 공동체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롬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지만 이 문제는 교묘한 선전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모든 나라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진리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해결될 수 있다. 그 진리란 윤리적 원칙이 국가의 존재보다 위에 있으며, 개인은 이 원칙을 지킴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Fromm, 1941/2012: 219). 좁은 공동체를 포괄하는 윤리적 원칙이 아니라, 바로 시공간적으로 폭과 깊이를 가질 수 있는 공동체의 구성이 나치즘을 이겨낼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독식과 독박의 민주주의는 결국 나치의 독재로 나아간다.

역사/1930- 2013.02.18 17:29

대중 민주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나치의 등장처럼 역사에서 극적으로 그 위험성을 드러 낸 적은 없다. 대중 민주주의는 결국 전체주의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Gerhard Ritter (1955, “The Fault of Mass Democracy”)1920-30년대 독일의 상황을 살피면서, “왜 합헌적 자유 의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에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를 낳게 하였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치 등장의 초점은 민주주의 원칙을 통해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장악한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민주중의를 통해 전체주의를 선호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일단 나치가 전체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연대기로 서술해 본다. 물론 전체주의는 관료제 만이 아니라, , 대중조직, 독재자 개인 추종 조직 등을 동원하는 형태를 띤다.

Ritter가 지적하는 1920-30년대에 중부 유럽에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로 전환된 역사적 배경에서 다음 2가지는 현재 우리 상황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1) 시민이 아닌 대중의 등장

정치교유, 진정한 토론, 개인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소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제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게 되었다. 감각적인 사람이 대중적이 되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적대감을 불러오는 것이었고, 가장 덜 효과적인 것은 평화적 사유이었다. 평화적인 사유는 독자나 청자가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학습욕구나 지식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덜 효과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2)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정치적 선전을 위한 새로운 기술 능력은 부루주아지 시대보다 대중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였다. 확성기, 라디오, 수천 부를 단숨에 발간하는 일간지들, 군사들을 신속하게 수송하는 화물열차, 철로와 도로와 항공로를 통해 대량수송이 가능해 진 점. 이에 따라 국가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신속하게 정보를 전파하고, 매일 밤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연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가 정당 대회에 50만 명을 모아놓고 연설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론을 통한 의회민주주는 무시되었고, 급진적 민주주의가 가능해 졌다.

현실적으로는 직접 민주주의 이론에 기반한 국민 주권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해 졌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능해 진 것이다. 이제 대중은 직접 정치의 주역이 될 수 있고, 의회를 통한 우회적인 방식이 유일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이는 의회민주주의 체제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영국의 대의 민주주의는 대다수의 정치적 권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주의의 여러 계층에 의해 향유된 정치적인 특혜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근대 의회에서 집단화되어 근대적인 정당이 되었다. 중요한 사람들의 집단이 인민을 대표하였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집단들이 서서히 19세기에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1920-30년대의 독일에서는 민주적 급진주의에 핵심인 인민의 의지에 따른 직접 통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급진적 민주주의는 단호한 결정이 중요하고, 타협이 중요치 않았다. 주권은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권력을 무시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지성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급진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적 압제로 변하는 조건 (Ritter의 견해).

(1) 사회적으로 비조직화된, 지적으로 단일한 대중들이 정치화될 때

(2) 과거의 정통성에 의존한 공공 권위가 파괴되고, 신뢰를 잃었을 때.

(3)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지배에 대한 불신이 불붙고,

(4) 추종자들이 뭉쳐서 치밀한 전선을 형성하였을 때

> 이럴 때 대중들은 애매한 제도를 믿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을 믿게 된다.

 

교훈: “일반 국민들은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더욱 예민해야 하고, 또 여러 문제들, 예컨대 생명에 대한 존중, 다양성과 모순적인 경향들의 조화를 통해 풍부함을 누리는 것, 낯선 것에 대해 개방적이며 그 가치를 인정하고 배우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용 등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보다 건강한 사회 건설의 기반이 될 것이다” (김승렬, 2004, “대중에 대한 독재 또는 대중에 의한 독재? - 나치 독재의 대중적 기반”: 264).

 

참고문헌: 리터의 글은 Maurice Baumont, John H. E. Fried, Edmond Vermeil, and others, 1955, The Third Reich, New York, Frederic A Praeger, Inc.에 수록

김승열의 글은 임지현, 김용우 엮음, 2004, [대중독재] 책세상에 수록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히틀러 연설의 특징

역사/1930- 2013.02.09 15:37

(1) 작은 거짓보다는 큰 거짓을 말하라.

거짓을 말한다면, 큰 거짓을 말하라. 큰 거짓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감정적 성격에서 소화될 것이기에, 더 큰 확신의 힘을 갖고 있다. 커다랗고 자명한 거짓은 기억에 남으면서도, 거짓일까 의심하기가 어렵고, 그런 것을 거짓으로 날조했을까 의심하기도 어려워 진다.

(2) 잘못을 인정하지 말아라.

  주저하지 말라, 말한 것을 덧붙이지 마라, 절대로 다른 편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마라, 모든 것을 흑백으로 구분하여 대조시켜라”. 이것이 바로 모든 종류의 선거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이다: 체계적으로 다루는 문제를 한편으로 치우치게 하라. 적에 대해 굽힘없이 공격할 때는, 대중들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자에게 정의가 간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격을 중간에서 멈출 때는 성공을 하기 어렵다. 이는 대중들이 자신의 말이 정의로운 것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Bullock, 1952: 3).

  (3) 모호하게 반복하라.

  다양한 표현이 서로 중첩해서 나타나 더욱 모호해진 내용은 대중을 현혹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히틀러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기보다 특정 부분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청중의 머리에 주입시키려 했다” (김종영, 2010: x).

  1932년말 뮌헨의 오스트리아 총영사가 히틀러에 대해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보고한 내용: 그는 선전할 때 우선 부정적이고 비판적 측면이 강조되도록 조절하고, 긍정적 측면은 윤곽만 제시해서, 그 계획이나 약속의 실행 가능성을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 있는 다수를 끌어 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김종영, 2010: 55).

  단순반복의 효과, “”예컨대 청중이 동일한 내용을 한 세 번쯤 듣게 되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네 번째 들을 때는 벌써 생각하기 시작한다. 연사가 말하는 것이 청중자신이 이미 오랫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말이다“ (김종영, 2010: 30).

 

  히틀러에 당하지 않으려면

  (1) 수사와 논리의 훈련을 받아라.

  언어와 사고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히틀러의 연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몸서리치거나 웃으면서 피할 것이다 (Olden, 1981, Hitler: 84).

  (2) 자극적인 것만 찾지 말고 스스로 미래의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왜 대중은 히틀러를 지도자로 여겼는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자극적인 에너지에 눈이 멀었고, 나이든 지식인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더욱 보수화했다” (Heiden, 1936, Adolf Hitler: 94).

  (3)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히틀러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범죄국가가 정의와 불의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면, 어느 누구나 피해를 입게 된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이 늑대가 되는 데에는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우리 속에 아이히만과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이히만과 같은 본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 늦기 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 사회에 기반을 둔 명확한 규범으로 통치하는 그런 국가만이 역사의 정의가 불의로 바뀌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크놉, 1998/2011: 28).

 

참고 문헌

Bullock, Alan, 1952, Hitler: A Study in Tyranny, New York의 축약된 것이 John L. Snelled., 1959, The Nazi Revolution: Germany’s Guilt or Germany’s Fate?, Boston, D.C. Heath and Company: 1-8에 수록된 것을 참조

Knopp, Guido, 1998/2011,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서울, 울력

김종영, 2010, [히틀러의 수사학] 서울, 커뮤니케이션스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하에 나타난 독재와 산업화: 1930년대 경성방직의 사례

역사/1930- 2013.02.07 17:11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불황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경성방직은 오히려 생산을 늘리고, 매출이 증가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 경방에서 출판된 역사책 (주식회사 경방, 1980, [경방 60: 1919-1979])에서는 애국적 소비를 우선 들고 있다. “경방은 또 영업정책에 있어서도 민족주의를 유리하게 도입했다. 특히, 시장개척에 있어서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기업의 육성을 호소했던 것이다” (조기준, 1973,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262). 특히 (1) 관서, 관북지방과 만주지역에서의 애국적 소비를 들고 있다. 관서와 관북은 근대 문물의 영향을 일찍 받았고, 민족 저항운동이 강하면서, 또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조선방직 (일본인 기업, 공장은 부산 소재)의 제품이 남부지방을 점거함에 비추어, 경방제품은 경기이북 특히 선천 등지를 중심한 평안도로 진출했다. 이것은 관북지방에 일찍부터 뿌리박고 있는 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시장개척을 기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경방이 북관지방의 시장개척에 관심을 둔 것은 뒤에 경방이 만주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방의 제품이 견고하고 둔중하였다는 점은 만주시장의 개척을 용이하게 하였다” (조기준, 1973: 264-65). 이런 지역에서 애국적 소비가 발생하였다. 또한 (2) 당시의 조선 물산진흥운동, (3) 일제 수입품이나, 일본기업인 조선방직의 제품보다는 민족자본인 경성방직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 풍토가 작용하였다. (4) 또한 경성방직의 입장에서는 만주의 중국인들이 19312월에 발생한 칠보산 사건시에 경방이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고, 만주의 중국인들이 항일의 감정으로 인해 경방의 제품을 많이 구입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경방, 1980: 90).

두 번째로, 애국적 소비 외에도, 불황기에 저가품을 선호하는 경향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즉 품질은 떨어지지만, 내구성과 가격 면에서 저렴한 제품을 선호하는 만주지역, 북한 지역의 주민들의 소비 성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에 농민들은 곡가 하락, 곡물검사의 국가이관 (1932. 10), 면화의 지정공판 (1933. 3),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었고, 공업 분야도 제조업의 불황에 따라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에 처했다.

세 번째로, 중국내부의 생산의 붕괴로 공급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하자, 중국 내부의 면방업계가 생산을 못하게 되자, 이미 만주에서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경성방직의 제품들이 판매가 호조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산업들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특히 우리 경방과 같은 업종인 중국 방적공업은 그야말로 정지상태를 면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중국의 북방인 만주에서 평판이 좋았던 경방제품인 不老草標는 곧 화북지방으로 퍼지게 되었다” (경방, 1980: 100).

 경성방직은 1939년에 중국 만주 소가둔에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한국민족기업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조기준은 서술하고 있다. “1939년에는 자본금 1천만 원 (본회사 전액 인수)이 전액 불입된 남만주방적회사를 만주 소가둔에 설치하고, 이미 개척한 만주내의 판로를 확보함으로써 한국 산업의 국외진출을 실현시켰다” (조기준, 1973: 260). 경성방직에서 스스로 서술한 역사에도 이점을 강조하듯, 소제목으로 만주사변과 경방의 발전” (경방, 1980: 88- ), “청년기로 접어든 경방과 만주 진출” (경방, 1980: 103)을 달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1936년 애초에 국내 시흥에다 공장을 세우려는 계획을, 총독부의 권유로 만주에 세우기로 결정한다. “불로초(광목 상표)에 대한 인기가 (만주에서) 날로 높아감에 따라 그에 대한 수송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만주에다 공장을 세울 것 같으면 이 문제도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경방, 1980: 105). 그 허가를 내린 것은 1937918일이었고, 애초에 중국 통천을 고려하였으나, 전장지역이라, 보류하고, 당시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에 중국인 자본과 같이 하려 하였으나, 일본 특무기관에서 거부하였다. ”1939년에 만주 蘇家屯에다 공장을 짓기로 하고, 그곳에 27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였다. 소가둔은 만주의 교통요충지로서 봉천 조금 못미처 있는 넓은 들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방, 1980: 106). 남만 방적 주식회사가 그것이고, 1942년에 생산을 시작하고, 1943년에 남만 방적이 본 궤도에 올랐다고 전한다.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되지 않은 Eckert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경성방직의 역사를 탐구한 뒤에 소위 식민지 유산에 대해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Carter Joel Eckert, 1986,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the Koch’ang Kims and the Kyongsong Spinning and Weaving Company, 1876-1945, Ph. D. Dissertation Thesis, University of Washington, U. S.). Eckert가 박사학위를 쓰던 시점에서도 역시 한국은 민족자본가에 의한 발전이 이룩됨과 동시에 독재정치체제가 발달했던 나라이다. 이런 점은 대개의 경우, 민족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체제를 선호하였던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상치되었기에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Eckert는 민족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식민주의적인 유산이 더 풍부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의 부루주아지는 해방직전에 정치적으로 취약했고, 비민주적인 세력이었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지주계급과 합세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특수상황이 있었다. 서구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인세력이 투쟁을 하면, 상공인 계급이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투쟁이 없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지주계급과 상공세력이 하나의 뿌리였기에 상호 투쟁할 상황이 아니었다” (Eckert, 1986: 538). 물론 조선 후기, 특히 개항기에 조선에도 상당한 수의 상인들이 존재했고, 이들 중 관과 유탁한 상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상인 계급이 산업자본가로 이동한 경우도 있었음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조기준, 1973). 그러나 아무튼 Eckert의 논리는 따르면, “이런 상황은 조선을 일본 산업자본의 시장과 식량기지로 이용했던 일본의 정책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토착 자본의 산업화도 일본의 자본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지, 자체 자본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ckert, 1986: 539). “한국의 정치는 결국 지주와 상공자본가에 투쟁에 의한 내부적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일본의 침입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Eckert, 1986: 539)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 산업활동과의 관계가 식민지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어 사회적으로 작동하였기에 산업가들은 독재체제에서도 오히려 편안하게 자본주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Eckert의 논리를 따르면, “이는 결국 국가-비지니스와 관계를 결정짓기도 했지만, 정치의 형태도 결정지었다. 총독부 독재 정치체제라는 것은 일본과 조선시대의 정치형태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의 식민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서 만들어진 정치체제이다. 이는 서구의 부르주아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한국의 부르주아는 독재체제에서 국가의 협력을 받아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게 되는 특이성을 보이게 되었다. 일제는 토착자본가들을 식민지 산업화에 동참시킴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이 아니라, 한국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차단하는 데에도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Eckert, 1986: 541). 이에 이르면 경성방직의 경우에 민족자본가로서 교육사업에 참여하였거나, 민족적인 정서에 의존하여 사업이 팽창하였다는 주장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행위자의 문제로서보다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구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토착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토대가 민족주의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총독부의 독재 권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경험은 독재가 자본축적에 편안한 정치적 모델이 되었고, 경제적 민족적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한국 부루주아지의 생존을 위해 독재가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독재와 결합하여 자본주의적 사업이 성공한 것은 결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 위에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경험

역사/1930- 2013.02.06 13:42

요즘 서울에 가보면, 남대문 시장과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넘쳐나고, 옛 소공동 인근의 카페에는 중국인들만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다. 물론 북촌에도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나고 있다. 현재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들의 접근을 보면, 명확하게 식민지 시절 일본인 이 장악한 명동과 인근, 그리고 중국인들이 조선 말기에 장악했던 소공동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끈질김을 느끼고 있다.

지난 주말에 하야시 히로시게 (1940년 충남 부여 출생), 2004/2007, [미나키이 백화점 三中井百貨店: 조선을 석권한 오우미 상인의 흥망성쇠와 식민지 조선] (논형),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1940,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본의 멸망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이다. 그는 39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당시의 느낌을 몸에 전류가 흐르듯, ‘그래, 내가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xi)고 표현하고 있다. 어릴 때 계산하자만 5살 미만시절의 경험이 그의 생애 경험의 원형질이 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름에는 물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얼음이 언 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 당시의 추억과 모습들이 마음속 깊이 숨 쉬고 있다” (5). ”같이 하천에서 물놀이를 했던 인근의 조선인 아이들은 당시 나와 함께 용기나 모험심을 경쟁하며 싸움이나 나무타기, 시장에서 참외 훔치기 등을 똑 같이 경험한 친구들이다” (253). 따라서 자신을 해방후 한국에서 일제 침략을 전제로 자신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 자신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면, 당시에 거주했던 최대 75만 명의 일본인 전체 (조선에 거주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침략자가 되고, 자신의 가족도 침cirwk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자신도 침략자의 2세가 되는 셈이다. “물론 우리 가족의 조선 생활도 침략이고 수탈이었다는 것이 된다. 아버지가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설계기사로 조선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나는 침략자의 2세로 분류된다” (253). 너무 억울하다. 그토록 조선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던 그에게 침략자라니! 내가 보기에도 그가 더구나 5세 미만의 아이가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억압하고, 수탈하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의 아버지도, 금강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 설계사인데, 그리고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조선인을 억압하거나 수탈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일본인화하였다고 주장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지만, 유추해 표현하자면 쇼와 15년간 (1926-40년 정도)은 특히 급속히 조선이 일본 적응화, 조선인이 일본인 적응화됐다고 말할 수 있다” (133). 그 증거로 책의 제목에 나타난 일본인이 세운 백화점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더 나아가 자부심을 갖고 이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1935년 무렵, “백화점의 경영, 마케팅 형태는 일본식이었고, 판매하는 상품은 조선의 특산품 (고려인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일본제품이었고, 고객층의 60-70% 이상은 조선인이었다. 1935년대의 경성인구는 60-1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일본인은 13-15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고객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해 생각했다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4개의 백화점 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받아들이고 일본 상품을 좋아했다. 특히 미쓰코시 브랜드의 명성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일본인만큼이나 선호했다” (13-14). 저자는 더 나아가 지나친 일본화에 대해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덧붙인다. 두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우선 구로다 가쓰히로 黑田勝弘의 [한국인의 역사관] (문예춘추)을 인용한다. “한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인이 조선에 일시 귀국하여, 1944년 경성의 한국인 거리였던 종로의 영화관에 들어갔더니, 뉴스영화시간에 상영되는 일본군 전황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관객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도쿄의 영화관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162). 그리고 본인이 수집한 증언도 이에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의 많은 청소년들이 점차 일본인으로 되어 갔다는 증언이며, 내가 수집한 증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일본인이 많았던 혼마치 거리 주변이나 조선인이 많았던 종로 주변의 영화관 안에서 같은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163). 불편한 사실이지만,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피지배자는 강자의 논리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여야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기에 대부분의 이데올로그들은 당시의 이데올리기의 희생자를 곁에 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 근거가 있고, 사실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 개인적인 경험의 수준에서 침략을 억압과 수탈이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국가나 경제시스템에 의한 침략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개인과 국가나 경제 시스템의 관계가 그토록 개인들의 의도나 선호도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면 1차원적 사고일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물론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만과 비교하여, 조선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은 1895년에 청일전쟁 승리의 댓가로 대만을 병합한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달리 식민지 전체기간을 통해 현지의 대만상인 세력이 굉장히 강했고, 일본인 상인이 성공한 사례를 드물었다. 일본인 거주자가 이용했던 소매업은 압도적으로 대만인이 경영하던 점포가 많았다. 일본인이 찾는 일본 상품은 대만인 상인이 독자적으로 일본에서 서플라이체인(공급자 조직)을 구성하여 공급판매했다” (42). 즉 조선과는 달리, 대만의 상인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일본의 거래상품들을 대만에 공급 판매하는 조직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대만만하여도, 이미 16세기 이래 화란이나 포르투갈 등과 일찍이 교역을 하였고, 중국대륙에서도 무역을 위해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본은 대만 침략 당시에 일본은 중계무역에 종사하였고, 아직 자신만의 공산품이 발달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상품 무역으로 진출하는 1920년대에는 일본의 산업제조업은 생활필수품을 충분히 제조하여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망 이전에 제조업의 발달의 수준이 달랐던 시기였다. 상업 조직의 경우에도 조선의 경우에도 객주, 보부상, 시전 상인등으로 이어지는 상당한 수준의 상조직이 전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초기에 상조직들이 강력하게 반일 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저자의 두 번째 설명은 일본이 만주에 진출함으로써 조선이 일본본토, 조선반도, 만주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기능하기 위해 군수물자나 관용물자, 그리고 만주로의 무역의 중간지점으로 기능하였음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상당한 정도 타당하다. 일본이 한국을 원료와 식량공급기지에서 공업제조기지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1932년경, 만주국의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그렇다. “혼마치 상점가는 1910년 전후부터 일본인 상점가로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점 반수가까이가 1926년 이전에 개업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 건국을 기점으로 개업이 가속화됐다. 이 시기에 전체의 40% 정고가 신규 개업해 한층 짜임새 있는 상점가가 형성되었다” (156). “그러나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국과 일본, 만주, 중국의 블록화 형성정책을 계기로 만주를 염두에 두고 병참기지화 되면서, 조선에는 1932년부터 일본의 많은 대기업이 진출했다” (174-75).

필자는 나이 64세에 책이 발간된 것으로 보아, 60세 전후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저자는 컨설턴트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한국인과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인들의 태도를 평가하면서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은 중요하게 생각해 교제하다가도, 그것이 지나면 살짝 손을 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기업이 일본기업과 제휴하고 그것을 끝낼 때의 전형적인 패턴 중 하나다” (172).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경제적인 또는 인간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표현은 없어서 문맥만으로 보면, 한국 기업인은 자신의 이익만 좇는 냉혈한으로 이해된다. 한국사에 대한 이해의 불편한 점은 일본이 한국에서 식량을 수탈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 현재 한국에서 상식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일본인은 조선인을 기아로 몰았고 쌀을 수탈했다고 하는 결론은 이 데이터를 근거해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조선인이 기아상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계속 송촐했다고 하는 주장도 생각하기 어렵다” (176). 조선의 일본 기업이 조선의 식량을 일본으로 수출했고, 대신 만주의 곡물을 조선에서 수입했다는 통계치에 의거하여 전문가들은 주장하는 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대지 않고, 인구와 식량 통계를 근거로 한국의 식량이 부족한데, 어떻게 일본으로 수출하였겠느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조금 안타까운 면이다.

신고
Trackback 0 : Comments 2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