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매국 논쟁

역사/1920-29 2010.06.16 11:18
참여연대가 유엔 안보리에 천암함 침몰 사태에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고하여, 정부측에서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이해할 만하다.  정부는 그 동안 관련 분야 과학자,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사업 종사자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나타났듯이 유권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설명에 대해 설득할 수 없으니, 자료를 숨기고 은폐하고 조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고, 희생양을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일 것이다.  참여연대의 성명서 내용을 아는 것 보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 사안에 대해 표현하는 것, 의사소통하는 것을 막는 정권은 도대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민주주의의 기본권인 시민적 자유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이러한 애국과 이적의 논쟁은 한국적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 동안 한국사의 논쟁에서도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1920년대 경제발전, 근대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의 핵심은 민족자본에 대한 평가에 있다.

1920년대 한반도는 일본이 장악하였고, 이미 1905년경부터 20년 정도 경과하였고, 호카이도, 오키나와는 물론 대만까지 점령하고, 이제 만주를 거의 점령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산업발전의 면에서는 과잉자본, 과잉생산의 조짐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한반도는 바로,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대외적 팽창의 전진기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에 자본이 민족성과 동시에 나타난다.  민족성은 식민지 모국의 도움을 받는 정도, 정부나 국가의 혜택들 받는 형태에 따라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때 혜택은 관세, 금융혜택, 직접적인 보조금의 형태를 띈다.  또한 공장법과 같은 공장 설립의 조건, 세금, 공장 가동과 노동자들 고용의 자유(강압적 고용과 강압적 노동관리)에 관한 것과 연관된다.

논쟁은 대개 경성방직, 박승직 상점과 같은 민족 자본에 의한 기업활동에 대한 평가이다.  더 나아가면 조선방직과 같은 일본자본의 투하에 의한 산업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이다.  박섭교수(2002)는 인도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에서 일제는 일본자본이 압도적이고, 화학공업을 발전시킨 점을 중시하고 있다.  이는 인도가 민족자본, 그리고 섬유공업에 치중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또한 인도는 자치를 중시하고, 보호관세를 유지한 반면에, 한국은 일본과의 동화에 치중하고, 일본제국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고, 그리고 법을 달리 적용되고, 자본과 상품의 유동은 동일시장이 유지된 것이다.  직접지배와 단일 시장, 그러나 차별적인 억압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1920년대 만주를 일본이 지배하면서 부터는 한국은 조공업, 일본은 정공업, 만주는 농업과 원료지대로 기능하게 분업체계를 갖춘다.  차별적인 억압체제를 일단 문제삼을 수 밖에 없고, 또한 자주적인 정치훈련을 쌓지 못한 자율정신이 후에는 고질적인 폐해가 된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 중국 북경 인민대 앞의 연산호텔 식당에서 카메룬 출신의 현재 ILO에서 근무하고 있는 캄덴 박사와 같이 식사하면서 나눈 얘기가 떠오른다.  카메룬은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1차세계대전에 독일이 패함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였다.  이 때 캄덴 박사는 한국이 1945년후에 분할 지배되어 지금까지 분단된 상황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와 프랑스 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현재의 일인당 GPD수준은 2천불 정도이다(인터넷 자료 활용, wikipedia, 우리가 현재 1만 5천불 수준).  그러면서 유럽과는 식민지 경험이 있어서 아사이 국가들과 친하다고 한다.  중국, 더 적게는 한국이나 일본을 존경하는 이유는 스스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의 1970년대에 쓴 박사학위논문이 중국의 자립발전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아프리카 국가에도 사회주의적 자립경제 발전을 실험한 나라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고 하니, 지적해 보라고 하여, 탄자지나아를 지적하니, 맑스 레닌주의가 판을 친 적은 있어도, 자립발전을 시도한 적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민족기업을 있었던가?  경성방직에 대한 연구를 보면, 분명 민족자본이 불리한 시장 개쳑을 위해 민족주의를 외치며, 민족기업의 물산을 소비해 줄것을 호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식민지 총독부의 협조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기를 위해 노력하였고, 적어도 일본자본이 받는 정도는 받으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  즉 식산은행이 토지를 담보로 잡고 차입해 준것, 조선총독부의 산업장력금을 받은 것(이는 조선방직이 먼저 받았다)에 의존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당시는 1920년 전후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의한 원료생산, 소비, 생산지역의 불안정성, 그리고 수송통로의 문제가 겹쳐서, 투기가 횡행하고,이에따라 기업들의 이윤의 부침이 심했던 시기이다.  정상적인 기업활동 보다는 외적인 환경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는 일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이다.  여기서는 조선방직을 의미한다(정안기, 2009).  물론 절대적으로 식민지라는 것은 식민정책에 의해 노동력 공급과 저임금 유지, 노동자 파업의 엄단, 원료 공급(면화의 재배를 장려하는 것), 공장 용지의 저가 적소 매입의 강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자본의 민족성에 대한 논란은 최근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삼성이 애국적인가?  창원의 볼보 건설장비 업체가 애국적인가? 금융 투기 자본들의 먹튀 논란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애국 매국보다는 이제 지속가능경영과 같은 기준으로 논란을 벌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참고문헌
박섭, 2002, "식민지기의 한국과 인도에 있어서 공업화: 통치제도와 자본수출", 제 39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문집: 467-476
정안기, 2006, "식민지기 경성방직의 경영사적 연구: 초기 경영 1919-26을 중심으로", 아세아 연구, 49, 4: 215-265
정안기, 2009, "식민지기 조선인 자본의 근대성 연구: 경성방직과 조선방직과의 비교 시점에서", 지역과 역사, 25호: 5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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