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1900-1919 2010. 1. 21. 14:48
사람들의 세계관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며,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은 교통 통신의 발달과 이에 의존한 경험에 일차적으로 의존한다. 간접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매체에 의한 경험이 그 뒤를 따른다. 1900년을 전후하여 마산은 개항과 동시에 중국인,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서구 열강들 러시아, 독일, 영국인들이 마산에 힘을 앞세워서 공식적으로 거주하였다. 또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종교의 형태로 일본인, 호주인들, 프랑스인들이 선교를 행하고,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마산거주의 사람들도 이제 외부 여행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물론 아직 자동차가 없었고, 대가는 가마, 말, 인력거, 그리고 1905년 11월에 들어서서 하루에 2회 부산가는 기차가 등장한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신마산에 주로 일인 거류자를 위한 것이기는 해도, 우체국, 전신국, 전화가 등장한 것도 커다란 변화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문은 일인 거류자들을 중심으로 발행되고 있었고, 마산 조선인들의 독자적인 신문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필기도구는 여전히 일본이건 대한제국이건 마찬가지로 붓에 의존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 생각에는 붓이 불편하였을 것으로 짐작하지마,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붓이 발달되어 1800년경에도 다산 정약용이나, 많은 실학자들은 길가다가도 관찰한 것으로 즉석에서 그리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만년필이나 연필은 1910년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산에 등장한 외국인들의 존재, 그리고 구마산까지 침투한 중국인들의 상점, 일본인들의 정미소, 무역상, 요리점, 대금업, 사창가(현재 수성동 지역 - 상당부분 요리, 사창, 대금업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의 등장은 마산의 거류민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대개 광동인이었고, 이미 부산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일본인들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구주지역일 것이고, 이미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가난한 일본이주자들이 이들에 고용되는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일본인 사회는 이미 신문, 거류민단의 구성, 상인회, 신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형성(1910년에 제일여고 자리에 건립)가 발달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사회의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속성으로 우리와 비교하면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매우 강하게 존속하고 있고, 이것이 국가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에 일제의 공권력을 동원한 침탈, 즉 헌병, 경찰(현재 부림 시장), 군대의 주둔, 형무소의 설치가 한편으로 자리잡고, 다른 한편으로는 왜색 종교가 완월동 부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우리의 경우는 마산 포교당(추산동)이 1910년대에 들어서서 자리잡게 되므로, 불교도 사실상 그다지 활발하다고 볼 수 없다. 교회가 회원동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잡는 형상이 벌어진다. 공립소학교, 일본 불교에 의한 소학교 나중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중등학교(월영초등학교), 호주 장로교에 의한 창신학교의 설립(회원동), 지역 유지들에 의한 노동야학(어시장 북편 끝자락)에 의해 부두노동자들의 교육 기회 제공 등이 일어난다. 전반적으로 보면, 일제는 종교를 앞세우고, 거류민들의 응집력과 국가와의 연계를 내세워 침투한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마산주민들은 아직 국가의식이나, 사회의식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대는 국가의식, 사회의식, 민족의식의 프리즘을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통신, 교통, 매체, 교육, 종교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역사/1900-1919 2010. 1. 20. 20:43
일제가 조선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던 시기에 마산은 러시아, 영국, 일본의 각축장이었다. 러시아는 해군에서는 남포에, 러시아 부영사관에서는 율구미를 중심으로, 애초에는 블라디보스톡과 여순을 연결하는 군항으로, 후에는 저탄장, 제빵소, 해군 병원의 기지로 생각하여, 이곳을 사들였다. 일본은 애초부터, 부산을 보완하는 무역항, 그리고 진해의 해군기지를 보완하는 군항으로서 마산을 지목하고, 끈질기게 마산의 외서면 지역(신마산)에 조계지, 전관거류지를 만들고, 후에는 러시아의 율구미 장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일인 부호들을 동원하여 땅을 사들였다. 영국도 19세기 말에는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까지 한반도에 탐을 내었지만, 결국은 남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보아전쟁에 전력을 쏟느라,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이제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이 진행되지만, 결국은 러시아는 만주에 집중하고,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는 과정을 겪게된다.
20세기의 초엽에는 구마산(원마산)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이 수입품 장사(주로 면제품)와 한일 상인들의 미곡 수출이 주된 상업활동이었다. 그러아 이후 특히 1904년 초이후에는 일본이 마산을 장악하고, 일본육군이 군항을 만들고, 마산선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땅을 빼앗기고, 철로 부지의 조성, 궤도 부설에 일본인의 건설업자들의 하청 노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 철도건설지역은 1904년 2월에 맺은 한일 협정서에 따라, 그리고 대부분의 철도 주변 부지는 관리하느 나라의 군사적인 통치와 사법체제의 적용을 받는 점에 따라, 노무자들은 일본 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즉 법을 어기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일본 영사관에 송화되어 처벌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조선정부가 러일전쟁을 위한 철도건설에 적극협력한다는 방침에 따라, 조선정부의 권유로 마산의 주민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후에는 중앙 마산지역(즉 철도 정거장 부지 약 40만평, 장군동에서 반월동 정도까지)의 도로 건설에서도 마산 주민들이 노역으로 동원된다.
땅을 빼앗겨서 이에 대한 소송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철도 부지나 정거장 부지의 경우에, 조상의 묘지나 옥토를 강제로 팔아야 되는 경우가 많아 창원 감리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미 1904년말에 들어서면, 조선왕조에는 재무와 외무 분야에 고문정치가 행해지고 있고, 1905년 말에는 을사보호 조약에 의거하여, 외교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 되어서 일본인들의 횡포에 대해서 일본 이사청(일본 영사관)에 호소 해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들은 조선인민을 착취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대부업에 많이 진출하였다. 특히 부산의 경우에는 토착상인을 상대로 일인들이 대부업에 종사하여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5년 1월에는 화폐개혁으로 일본의 화폐와 같게 만드는 조치가 발생하여 금융공황이 초래되고, 일제의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일본 거류민들 계통의 은행들이 한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된다. 이시기에 일제는 신마산 지역에 전당포를 많이 설치하게 된다. 일인들은 또한 이미 1905년이 되면, 사실상 조계지 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역, 군사지역 등에서는 완전히 독자적인 행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징세도 조선왕조의 권한이 미치미 못했다. 관세권도 외국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조선왕조는 지방지배체제를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여전히 관리들의 부패와 탐관이 횡행하고 있었다. 아니 일제에 빌붙어서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도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일제는 제조업분야에서는 주조, 정미 등, 그리고 상업 분야에서는 일단 신마산 지역에서는 자체의 시장을 개설하고, 구마산 지역에는 서서히 침투하는 양상을 보였다. 교통분야는 하루에 2회정도 왕복하는 부산과 마산과의 철도, 인력거의 등장을 볼 수 있었고, 신마산 지역의 영화관 등장,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화류계의 등장과 더불어 구마산지역으로 침투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서히 근대의 물결은 일본의 착취와 약탈과 더불어 마산에 들어 오게 된다. 물론 마산의 유지들도 역시, 상업에 종사하고, 금융업에도 진출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인쇄소도 만들고, 야학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나, 다른 전통적인 지역에 비해서는 그리 강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마산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육군 군항으로 도시가 성장해 온 셈이다.
역사/1900-1919 2010. 1. 19. 09:23
조선왕조가 일제에의해 강제 합방을 당하기 까지 조선내의 세력들을 왕권수호세력, 개화세력, 민중세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즉 왕권수호세력을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그마한 양보도 허용치 않고, 심지어는 외세에 빌붙어서 왕조를 유지하려던 세력이었다. 고종은 1904년의 한일의정서까지만 해도, 일본이 자신의 조선지배권을 보호해줄 것을 믿고, 일제에 빌붙어서 러시아 전쟁시기에 조선의 모든 물자와 영토와 인민들을 동원하여 협력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가 1905년의 을사 보호조약으로 귀결되자, 자신의 외교권을 잃어버리고, 사실상 내치권도 상실되었다고 생각하자, 이 시기부터 반격에 들어 간다. 그러사 이 당시의 반격이라는 것은 고작 독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고, 물론 이때 독일 황제는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영국의 헤럴드 트리뷴 기자를 불러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이는 영국의 신문에 1906년 3월경에 게재되었다.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만국의 공법에 의거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모한 일은 단순히 자신들의 민중이나 개화파들과 협력하여 외세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미 일본와의 협력 체제에들어간 회세에게 왕권의 수호를 의탁하려고 한 정세의 어두움과 판단력의 부족함에 있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보면, 이 정도의 수준으로 왕조를 유지하여왔는가에 이르르면 통치술의 한계를 직감하게 된다. 결국 고종은 1907년에 군대해산, 순종에게로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덕수궁에 눌러 앉고, 순종을 왕위를 받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순종은 이제 철저하게 일본에 의존하여 왕실의 재산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실은 1907년부터 1090년까지 사이에 조선반도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제와 전쟁을 벌인다. 이때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로서는 경찰과 헌병에 더불어, 군대를 파견하여 정식으로 의병들과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의병들이 응집되고, 중앙집중화된 의사결정체제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왕권의 몰락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과 이념적으로 의존하던 향리 세력등이 협력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만이라도 고종이나 순종이나 조선왕조가 응원하였더라면, 그나마도 왕조는 이후의 역사에서 다르게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이 왕권사상에서 넘어와 한반조의 인민들이 민족의식이 싹트고, 이를 기반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화세력은 일본에 협력하는 자들이 많았다. 개화란 바로 국가체제, 산업화, 사회의 근대화를 노리는 세력이었다. 이들의 생각이 세밀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하더라도, 이들은 시대의 움짐익을 포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엇인가 개혁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들이 자주적으로, 아니면 외세에 빌붙어서 개화를 이루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최종적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이들 세력들을 조선왕조, 아니 대한제국이 흡수하였더라면, 조선왕조는 입헌군주국으로 변모하고, 외세의 침탈을 막고, 아니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변했을 것이다. 외국의 한반도 관찰자들이 한반도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한가지, 한반조 인민들의 무지 몽매함과 무기력함, 조선왕조의 부패함와 타락성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바로 이점에서 일제의 침략에 대해 외세들은 자신들이 직접 이해관계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반도 지배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선반도를 지배하게 된 일제는 1905년이후에 조선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시도를 하면서, 재정 체제의 정비(국가 독립 기구의 설치), 중앙국가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의 지방에는 자치를 허용하는 것을 강구한 점, 지배를 위한 경찰,헌병, 군대의 파견, 지배자원을 파악하기위한 조사와 측량 사업의 전개를 시작한다. 이러한 점을 두고, 혹자는 일제가 한반도의 국가체제를 근대체제로 바꾸었으므로, 근대화에 공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 스스로 자치를 할 능력이 있는가, 국가체제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개화파의 상당수는 이제 국권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교육운동이나, 상공업 진흥운동으로 나아간다.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근대 상공업을 받아들이는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외세의 충격이 없이, 스스로 외부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선제적으로 판단하여 움직였다면,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산의 조선인 초등학교 성호초등학교가 이때 생겼고, 같은 시기에 불종거리의 형무소가 만들어 져서, 읙병활동하던 이들이 갖히고, 1909년 일제는 순종황제를 마산에 보내어 일제의 침략기구들을 응원하고, 조선인민에게는 순종도 이제 일제에 항복하였고, 이들이 순종을 잘 대해주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협력하였다. 1909년 1월 순종이 마산을 방문한 시기는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때였다. 의병들은 1907-09년에 약 2만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민중들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해 당하거나, 조선왕조에 의해 착취를 당하거나 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는 탐관오리들을 양산해 내었고, 그들에게 각종 수탈에 시달리고있었다. 또한 일제의 침탐에 의해 이미 조선왕조 후기부터, 버림 받은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서도 상권, 군대, 이주민들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있었다. 읻르은 왕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왕조나 개화세력처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도 이미 동학농민전쟁시기에 일제를 끌어들어 민중들을 말살하였고, 이어서 나타난 독립협회 세력들도 민중들와 연대하기 보다는 왕조와 개화시력과의 타협에 중점을 두고 의회 설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이 물론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에서도 선진적인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민중들의 세력까지를 포함하는 의회 설립이나,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더라면,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는 모름지기, 지배받는 층의 대다수를 포괄하여, 이들의 마음과 노력과 아이디어를 활용하였을 때 융성할 수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아니 대한제국 시기의 인민들은 더욱더 조선왕조로부터 배척당하고, 착취당하므로, 인민의 통합은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요즈음 이명박 정부의 리더쉽을 보면, 국민들의 분열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51%의 지지만 받으면, 나머지는 적대적인 세력이 되어도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리고는 미국와 일본의 이익만 보존해 준다면 외세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49% 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무시를 넘어 분열, 그리고는 적대적인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외세의 상황이 바뀌는 현금의 국제정세를 깨닫지 못하고, 국민 분열에 기반한 통치를 지속한다면, 20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국권상실이라는 역사적인 비극이 다시금 재현될지 모르겠다는 우려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