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행동의 역사적 평가

역사/1900-1919 2010. 1. 18. 10:59
역사적 전환기에 개인들의 행동은 후세의 평가에서는 엇갈리고, 모순적인 행동들이 자주 들어난다.  이를 두고는 지금도 역사상의 문제로서 왈가왈부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인 해석의 절대성을 숭배하는 사회적 분위가와도 연관되어 있고, 최소한도의 사회적 평가기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개인의 행동은 개인적으로 이해하고, 역사적인 행동은 역사의 관점에서 평가를 하여야 한다는 당연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이율 배반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정도를 합치된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자신과 남, 현재의 이익와 미래의 이익을 계산에 옮기고,이를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1월 9일 유장근 교수의 도시 탐방대를 따라 나서면서 유장근 교수는 1904년에 인근에서 한 무리의 떼를 지어서, 일본인과 부호들의 재산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들에 대해서 산호동 산에서 처형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이들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을 제기하였다.  즉 도적, 의적, 독립운동 등의 해석이 가능하므로, 이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직업으로 보니, 어느정도 사는 사람들이었고, 떼를 지어서 다니는 것을 보니,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집단적인 동의하여 여러지역 사람들이 모여서 한 짓이고, 부자나 일본인을 공격한 것으로 보니,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보다 보편적인 목적을 지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 보건대, 일본이 러일 전쟁을 벌이면서, 2월에 조선반도의 재산을 군용목적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강탈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조항은 전쟁목적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를 빌미로 경찰권, 사법권, 그리고 재산 사용권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따라서 일차적인 피해자는 조선반도의 재산을 지닌 자들이었고, 이외에도 이들은 군수물자로 동원하기 위해 재산을 강탈하였고, 전쟁을 빌미로 철보부설, 군용부지 부설, 군인들의 유지에 필요한 시설과 식량 등을 공급하는 사업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몰려온 사업가들, 기술자자들, 노동자들, 심지어는 매춘부들까지 대거 들어오게 된다.  이들에 의해 조선반도는 사실상 설사 재산이 많은 자라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당시에 유장근 교수에게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조선왕조의 흥망이라는 역사적인 이해관계와 연과되어 있다고 느낀 사람들의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실은 역사적인 이해에서 자주 등장한다.  일진회를 구성하여 한일 합방을 주장한 송병준은 미천한 출신으로, 조선왕조의 후원으로 출세한 사람이기도 하고, 동학교도이기도 한 사람이다.  해석하자면, 동학혁명을 일으킨 동학교도, 조선왕조의 은덕을 입었으므로, 조선왕조의 보존을 위하여 행동하여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한일 합방을 주장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은 15세때 동학전쟁을 맞이하여서는 동학도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섰고, 이등박문을 죽일 때도 죽인 이유의 끝부분에 일본 천황의 뜻을 받들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실은 안중근은 오래 전부터, 일제의 피해를 받아 블라디보스톡, 만주로 떠 돌아 다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 이등박문 때문에 조선 반도의 운명이 나빠 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중근은 천주교도로서 프랑스 신부들을 불러 들여 죽을 때 기도를 하게 한다.  이때에 프랑스 신부는 한때의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게되어 참회하라고 요구하고, 이에 대해 안중근은 별로 답이 없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일본과 손을 잡고 일본내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때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극적으로 프랑스인 신부는 안중근의 뜻에 공감한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대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의 나의 답은 현재와 미래, 나와 주위의 이해를 고려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행동이 역사적으로 옳은 행동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는 자는 남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며, 역사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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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토 침탈과 외교력

역사/1900-1919 2010. 1. 14. 08:39
학교 연구실에 있다 보면, 불청객들이 자주 찾아든다.  대개는 구걸, 책이나 교육자료 판매, 카드나 보험상품판매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목요일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주부들이 있다. 방학중에는 가족중의 자녀와 같이 주부가 찾아와서는 신문을 들여 놓고는 사라진다.  이 신문은 화광신문이다.  화광신문은 일본의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다.  마산에는 해운동 세관 건너편에 돌로 지어진 웅장한 멋진 건물이 창가학회의 센터인 것 같다.  표시는 SGI로 되어 있다.  창가학회는 정보를 찾아보니, 일본의 일련정종의 교리를 따르는 집단이고, 남묘호랑교라고 불리는 주문을 외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공명당을 지원하는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에 일본에서 천황과 중국 부주석의 회견과 담화발표가 있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천황을 정치에 끌어들인다는 비판을 받아 현 민주당 정권의 최대 불만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성사시킨 것이 창가학회라고 알려져 있다.  창가학회는 원래 평화를 주창하는 단체이나 조직운영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미 19세기 말에 오키나와 열도와 대만을 합병하고, 이어서 한반도를 합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는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 승리의 댓가로 아쉽기는 하지만, 사할린의 절반과 만주의 절반을 할양받는다.   이어서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장악하고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간도를 중국에 넘기고는 만주에서의 잇권을 보장받는다.  나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팽창능력이 단순히 군사력의 우세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의 무장세력들을 해외로 팽창시키는데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즉 공식적인 그리고 민간 차원의 외교력이 강했다는 점을 여러면에서 드러내 주고 있다.  Shiosaki Satoshi, 2006, 日露戰爭: 또 하나의 戰, 아메리카世論을 動했던 5人의 英語名人, 祥傳社新書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관리들이 아닌 이들이 나서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이 이들의 여론에 힘입어 일본에 잠수함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국제적으로 사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만은 일본 국가의 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미국이 이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단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왕조의 대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초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는 절차로 가게되는 데, 당시에 미국은 러시아와 주도적으로 만국평화회의를 주최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이준열사의 참석이 거절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국은 일찍이 러시아가 남아시아 방명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러시아 진출 저지를 막았고, 이러한 결과 러일 동맹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향할때 수에즈 운하의 통과를 불허한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이동 경로를 일본에 통보해주고, 적대적인 행동까지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왔다.  그런데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영국에 대해서 한반도를 병합하겠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이를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당시의 영국 외무상은 한반도 내의 모든 강대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주장하나, 한반도와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영사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보낸다.  한반도의 영국 영사는 사실상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인들의 무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영국 외무상도 한반도내의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허용하게 된다.  물론 이 때에도 일본측은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위협을 들고 나오나 이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발틱함대과 극동함대가 괴멸당하고, 남은 것은 흑해함대정도 였으므로, 사실상 해양력을 약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일본의 해양력은 러시아를 능가하고 팽창하는 형편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있었다.  즉 러시아와 연대하면서 동시에 영국과도 연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결국은 프랑스와 일본은 동맹을 맺고 프랑승 영토내의 독립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아시아 인들은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하여 백인종을 격퇴하는 장면을 보고, 열광하였으나, 곧이어서 일본은 아시아와 연대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서양인들과 연대하여 아시아인들을 침략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 그 허울을 보게 된다.  요즘 일본은 아시아 통화기금, 아시아 연대론을 다시 들고 나오고 있고, 중국 역시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기 위해 역사, 사상, 경제, 무력 등의 다방면에 걸처 국가적인 공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현재 내가 객관적으로 국가 능력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조 시대의 왕조 전통에 사로잡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 관념이나 능력, 전통이 모두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인 미국, 러시아 등에 속속들이 당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 같다.


참고문헌:
정애영, 2008,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간도 조사와 지역구상", 일본역사 연구, 28: 61-84
박선영, 2008, "중화인민공화국의 만주족의 역사적 정체성," 동북공정과 한국 학계의 대응논리: 1287-1358
김도형 기자, 2008, "연구자 기다리는 1430만건의 진실: 근대 일본 공문서 보고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겨레,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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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文同種의 허위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사/1900-1919 2010. 1. 13. 08:39
1904-5년에 발생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동아시사의 역사적 지평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나는 러시아 전쟁을 이해하는 데 왜 조선반도에서 하나의 주권국가의 허락도 없이 외세들이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난리를 칠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의문을 가졌었다.  그리고는 청소년들에게 권장 도서의 하나로 지정되고는 하던, 인도의 네루가 1930녀대에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쓴 세계사편력이라는 책에 러일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해석에 혼란이 발생하였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 없었던 우리 교육의 결과였다.
네루의 글을 인용하면,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시절, 얼마나 그에 감격했던가를 네게 자주 얘기했다.  수많은 아시아의 노소년소녀, 그리고 어른들이 같은 감격을 경험했다.  우럽의 일 강대국은 패배했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그 옛날 때때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처럼 지금도 유럽을 쳐 부술수 있을 것이다.  내셔낼리즘은 한층 급속도로 퍼져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내셔날리즘은 단순한 복고도 구래의 습관이나 신앙의 고집도 아니다.  일본의 승리는 서양의 신산업방식을 채용한 덕택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이 이른바 서양의 관념과 방법은 이와 같이 해서 더 한층 전동양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저와하랄 네루 , 1933/1972, 세계사 편력, 삼성문화재단:269-270).  우리 존경해 마지 않는 네루의 조국은 당시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것을 불허하고, 일본의 군자금을 런던 체권시장에서 국가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도와준 나라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영국의 지배를 받는 네루의 입장을 표명한 듯하다.

한국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던 중국에서도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물론 러시아와 변경에 접하고,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환성시킬 즈음,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여순(아더 항으로 러시아는 개명하였다)에 정박신 상태였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손문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하여 일본이 승리하면, 일본의 도움으로 서양세력을 물리칠 생각까지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를 포기하고, 아니 만주의 중국인들이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약 2만명이 죽어간 상황을 마다하고,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한족 중심의 중구을 구상하였다고 하더라도, 좀 정세파악에 감정이 많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은 결국은 중국을 향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노신은 당시에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이 만주의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고는 러일전쟁의 실상을 깨달았다).  결국 1919년 54운동당시가 되어서야 일본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은 당시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연대하여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고 인사들은 더욱더 일본의 승리에 환호성을 지르고, 일본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실제로 일본의 정치인들에게 무력의 제공을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이어서 1907년이 되면, 프랑스와 일본이 상호 도움을 주는 협정을 맺고, 일본내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환상은 3년이 가지 않아 깨어지게 된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은 자신의 부인(명성황후)가 9년전에 죽었건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우선 도망갈 궁리를 한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미 냉혹해져 있어, 아무도 고종을 받아줄만한 강대국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중립화 정책이다. 중립화 정책에 대해 각국의 영사관들은 공문을 접수하였다고 통보하나, 이를 고종은 인정한 것으로 오해한다.  접수한 것 자체를 인정이나 승인으로 해석한 것은 봉건적인 질서에서 나온 관행에 따른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고종은 근대적인 서양외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  그러나 끝내 일본은 며칠뒤 경성을 점령하고, 한반도에 군사시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정서를 맺는다.  고종은 이제 어쩔 수없이 일본에 대한 협력을 국민들에게 정부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는 조치였지만, 군자금을 내고, 축하사절단을 보내고, 궁정 악단이 축하 쇼를 하는 장면으 좀 심하다 싶다.  그러나 결국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사실상 조선왕조는 대외적으로 한반도의 인민을 대표하는 권한을 상실한다.  망한 것이다.  고종은 중립화가 무효된 것이 며칠만이고, 나라가 망한 것은 1년 6개월정도만이다. 고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 중국, 조선, 베트남을 묶는 이데올리기가 바로 동문동종이라는 단어였다.  같은 문자(한자)를 쓰고, 같은 종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거의 15년후에나, 베트남은 3년후에, 조선은 단 며칠 후에 일본이 주창하는 이데올로기가 제국주의 침략의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삼아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것이 더딘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유용태, ?, "환호속의 경종: 전장 중국에서 본 러일전쟁," 역사교육, 90: 51-83
노영순, ?, "러일전쟁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유신운동: 동유운동과 동경의숙을 중심으로", 역사교육, 90:127-154
전갑생, 2007, "러일전쟁, 고종은 일본 승리를 원했나", 오마이 뉴스,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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