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아침 무학산 둘레길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교양 2010. 1. 27. 11:01
완월동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둘레길로 가보기로 했다.  전에 능선으로 다닐 때에 2시간 가까이 거렸으니, 둘레길로 다니면 한시간 정도면 되지 싶다.  일단 길을 나섰다.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수선정사방향이다.  곧바로 둘레길로 들어서니, 바다에 운무가 껴 있다.  자세히 보니,창원 방향의 하늘이 그다지 아름다운 운무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오염되어서 도시 전체가 낮은 구름으로 둘러싸인 것이 아닌가 싶다(두번째 사진).  올라설 때 시간이 8시 48분이다.  이것은 산복도로와 완월폭포 올라가는 길의 차길 육교에 시계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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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산 방향을 보니, 구름이 멋있다.  이것이 세번째 사진이다.  길이 메마르다.  다른 지방은 금년에 눈이 많이 왔다는 데 우리는 수량이 적은 것 같다.  걷는 길이 푸석푸석하여, 먼지가 인다. 만날재로 넘어가는 길에 중간에 대곡산 방향에서 내려오는 길하고 만나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만날재로 넘어가는 길은 약간 내리막길이다.  수선정사방향보다는 길을 정비 놓지는 않았지만, 운치는 있다.  이곳에서 보인 경치를 촬영한 것이 두번째 사진이다.  낮이라 휴대폰 사진기를 촬영하는 데 역광이라 잘 보이지 않아 대강 방향을 잡았다.
만날재가 금방 나온다.  원래 산 등성이를 통해서 수선정사 방향으로 가려면 올라가느라 고생하는데, 너무 쉽다.  시간도 9시 30분이다.  둘레길로만 치면, 40분정도 걸린 셈이다.  학교 사무실에 오니 9시 40분경, 집에서 출발한 것 까지 치면, 1시간정도 걸린 셈이다.  보통 길로 걷는 것보다 30-35분정도 더 걸린 셈이다.  한번 걸을 만하다.

출퇴근을 가끔 둘레길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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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항을 위한 수심측량, 철도를 위한 측지가 침략의 징후였다.

역사/1900-1919 2010. 1. 23. 21:27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애초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길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는 외침의 길이 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또한 지도의 발간도 지형보다는 사람과 산출물 위주로 지도를 발간하다보니, 토지의 성질이나 자원의 량을 알아내기 위한 지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실은 내치를 위한, 또는 산업화를 위한 지도, 아니 부국강병책을 마련하기 위한 측량과 지도가 없었다고 ㅍ여가할 수 있다.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19세기 초반에는 프랑스와 독일, 이어서 영국, 미국, 러시아, 급기야는 일본까지 가세하여, 일단 바다의 수심을 측량하여 침략의 배가 (군함) 바다에 상륙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세기 초반부터 이양선들이 등장하여 바다의 수심은 이미 대부분 측량을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육지를 측량하고 관찰한 것은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철도건설을 위해, 도로 건설을 위해, 자원파악을 위해, 그 목적에 따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일합방이 이루어 진 후에는 전국토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완전한 수탈을 목적으로 이루어 진 점이 특징이다.

지난 1월 초 유장근 도시 탐험대 기회에서 허정도 박사는 19세기 말에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 상세하게 마산의 모습이 그려진 것을 입수했다고 전언했다.  이는 1895년 12월에 부산에 도착하여 경주로 향하던 러시아 군사시찰단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때 러시아는 군함 여러척을 부산에 정박시켜서 시찰단을 통해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이 기록에는 1896년 4월경에 고성을 통해 마산, 창원, 김해, 부산으로 여행하면서 관찰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카르네프 외 4인, 2003, 내가 본 조선, 조선인 (러시아 조선장교 조선 여행기), 가야넷: 142-146쪽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후에도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기간 중에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건설을 위해 부산, 제물포, 마산에 직접 군사조직내의 측량단이 등장하여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에 착수하여, 삽시간에 완성하고, 1904년 7월경부터 기반 공사에 들어간다.  후에 일본은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츨량사를 전국적으로 보내서, 체계적으로 측지를 하게 된다.  경상남도의 경우에도 비교적 한반도에서는 이른 시기에 측량이 시작되고, 이를 보조하기 위한 측량사로 조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만해도 아직 우리나라의 정부 관료들이 측량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1892년에 측량한 것은 협약상 권한 밖이지만, 그렇지만, 일본은 경부선을 부설하기 위하 무지한 조선왕조의 외부대신이나 관료들을 상대로 조선의 새들을 잡아서 전세계에 이를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총을 쏘아서 잡아야 하고, 이럴 경우 조선인들이 다칠 위험이 있으므로, 부근에 줄을 쳐서 못들어오게 한다고 하자, 조선의 관료들은 일본의 측량팀이 조선인들의 생명을 위하는 마음이 갸륵하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실은 이 때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위한 사전 측량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현희, 2001, 한국철도사 (한국 학술정보): 342-244

측량을 이해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50년 이상 바닷가를 측량한 것, 이미 일본과 서구에서 30녀이상 전에 시작한 측량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의 침략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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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道 西氣?

역사/1900-1919 2010. 1. 22. 10:27
서양의 물건만 사용하고, 정신은 빼앗기지 않는다.  나는 1989-90년에 국민경제제도 연구원에 근무하면서, 과소비, 금융실명제, 토지 공개념 등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한 토론회에서 젊은이들의 서양물건 소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이것은 개인적인 취미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적인 것을 소비하고 있고, 그것이 나의 취향이나, 감각에 맞기에 그런 것이지. 당위론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혹자는 마치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것도 틀린 것이다.  고무신은 마산의 경우에는 개항이후에도 아직 주민들이 신지 않았고, 적어도 1910년경까지는 대개는 짚신을 신고 다녔던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짚신을 신으려면, 대개는 4시간 걷는 거리에 한컬레를 사용하였으니, 바깥 나들이 하지 않는 경우에는 나무신발이나, 맨발로 다녔을 것이다.  차라리 맨발로 다니는 것이 전통적이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1900년대 초반은 맥주, 커피, 설탕, 와인 등 입맛을 바꾸는 음료들이 등장하였고, 1910년경정도가 되면, 서울에서는 영화관도 등장한다.  옷감도 이제는 영국산이나 일본산 면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옷의 혁명이 진행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옷감을 이용한 의복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속옷이나 양말은 도입은 20-30년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 물건들에 대해 일본은 대한제국보다는 적어도 30년가량 일찍 물건을 모방하야 제조하려 시도하였고, 이에 성공하였다.  현재 일본에 가면, 유명한 맥주, 커피, 비프스테익 등이 존재하고 그 품질도 우수하다는 점을 알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모방의 역량이 사회적으로 부족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은식은 통사에서 사회적 활력의 부족을 탓하고 있다. 이점은 이미, 당시를 관찰한 외국인들의 기록에서도 자주 아주 기분나쁘게 등장한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이유는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회의 활력이란 사회의 이동가능성, 자시 생애에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가 인정해 주보 보상해 줄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활력은 오로지 왕조 일가, 양반일부 세력, 그리고 상인이나 전문가 세력에게만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득권을 수호하거나, 새로운 문물의 도입에서 상인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뿐이었다. 따라서 진취적인 세력이나 모험적인 세력을 아니었다.  이는 일본과 다른 점이다.  일본이 봉건적인 제도였다고하지만, 적어도, 몰락하는 사무라이들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이들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정책을 취한 점이 다르다고 볼 수있다.

물건과 정신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프랑스에서는 카페에서 1789년의 혁명이 발생하였다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카페는 퇴폐의 장소로 여겨졌고, 토론의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회운동의 발생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통적인 시장이다.  시장과 카페는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토론의 형식과 내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양의 카페에서는 토론이 이루어 졌다면, 우리의 카페에서는 마담과의 감각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인쇄술도 책자나, 신문 잡지의 발간과는 큰 상관이 없었다.  물론 19세기 초반까지 전통인쇄술에 의해 소설 잡지류가 발간되었다고는 하나, 19세기 말기의 신문의 발간이나, 근대적인 책자의 발간은 서구의 인쇄기기에 의해 이루어 졌다.  서구의 인쇄기기는 우선, 성경의 전파를 가져왔고, 조선정부의 정책홍보로 이어졌고, 독립협회의 신문 정도에 이르러서야, 근대적인 신문이 등장하여 개개인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물질과 형식은 긴밀히 제도나 사회적 관행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리의 토양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서, 그대로 이식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서구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중요한 가치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항상 사회적인 의제가 발생할때마다, 우리는 서구의 예를 좇는데, 급급하다.  세종시의 행정복합 도시 문제를 위해 독일의 본을 간다고 한다.  갔다오면 분명이 보는 이마다 다른 의견을 낼 것이다.  독일은 기본적으로 수도를 통합하려했고,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본은 도시 재활성화에 성공하였다.  우리의 문제는 균형발전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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