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세상을 감지 하지 못한 자의 운명

역사/1900-1919 2010. 1. 12. 10:17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은 지구상의 정치, 경제, 세계관이 뒤바뀌던 시기였다.  과거의 사람을 믿고, 과거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그래서 이런 데 의존해서 행동전략을 구사하던 국가와 사회는 사라지거나, 기껏해야 강한자의 종살이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19세기 말의 유럽은 국내적으로는 평온과 안정과 쾌락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의 시기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넘길 침략의 야욕, 기업의 비대화, 국가체제의 완비, 공동체의 파괴에 따른 국가적인 차원의 새로운 이념과 공동체의 신설, 일상생활의 파괴를 통한 상업문화의 정비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우리로 치면, 아픈 흔적만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당시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위기감이 그리 컸던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일부 선각자들만이 위기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만이 자신과 가족과 가문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왕조는 재산과 황제의 권위를 보장받기에 급급했고, 상업권과 재산권을 박탈당한 위기에 처한 상인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상권수호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벌렸고, 지역의 유지들은 향리의 지배체제를 유지히기 위해 학교도 세우고, 효자 효녀를 위한 각을 세우고, 조상들의 무덤을 돌보고, 족보를 세탁하는데 열중하였다.  돈이 있으면, 가능하면 국가의 직위를 사서 이를 통해 가문의 영광을 빛내려 하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러한 행위중에 보다 근대적이고, 국가나 왕조의 유지에 기능하였던 것을 가려서 애국적인 행위로 각색하였다.

미국은 내부적으로 기업들이 성장하여 이제, 중소기업 수준이나, 작업장 내부의 작은 집단으로 이루어진 작업체제를 넘어서서 대규모의 트러스트 소유체제, 경영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법인 자본주의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해이다.  국갖거으로는 해외로의 팽창을 시도하였고,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서서 이제 태평양으로 뻣엇고, 다른 지역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과거의 장인들은 대기업의 노동자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나온 노동자들의 직업관의 위기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로 각색되어 그 직업관을 토철하게 하는 데 동원되었다.  세계적인 공황은 이제 슘페터의 창조거 파괴이론에 힘입어 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되어,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서 인식되는 이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는 내부적으로 노동자들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노동자들의 정치적인 행위가 등장하여 사회주의가 극성을 부린 시기이다.  일부는 국가의 개조를 통한 사회주의로, 일부는 작업장내의 자율을 고수하려는 신디칼리즘이 등장한다.  농민들의 경우는 국가의 침탈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가 침투하여, 국가에 대한 폭력적 저항과 동시에 자율적인 공동체 주의를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아무튼 농민 노동자들에게는 직장이 변화하고, 과거의 기술이 가치가 없어지고, 노동의 산물의 가격을 하락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산가들에게는 선거권이 허용되었으나, 아직 노동자들에게는 온전한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던 시기였다.  세계의 정치는 흔들렸다.

이런 상황은 아주 자연스럽게 공동체 보다는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외적으로 이념적인 공세와 더불어 해외 침략이 개시된다.  개인들의 자유, 상업의 자유,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중시하는 경향이 등장하는 것이다.  곧이어서 상업적인 문화의 등장과 동시에 지식생산에서도 자산가들이 장악하여 세계관도 친 자산가적인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세기말에서 세기초로 이어지던 시기의 일이다.  내부적인 혼란은 외부적인 침략을 통해 그 불만이해소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의 극치가 1차 세계대전이다.  1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노동자 계급의 국가주의는 국가 옹호주의로 급변하고, 전쟁과 외부적인 위협이라는 효과가 영화를 통해 보급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침략해야 하는 상황은 실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상호기대에 의해 증폭된 효과였다.

이런 와중에 한반도의 조선왕조는 아주 뒤늦은 산업화와 제국주의 참여자인 일본에 의해 멸망당하고, 마산은 일본 육군의 기지로 바뀌게 된다.

참고문헌
DimitraDoukas, 1997, "Corporate CApitalism on Trial: The Hearings of the Anthracite Coal Strike Commission, 1902-1903", Identities, 3, 3: 367-398
Patrick M. Regan, 1994, "War Toys, War Movies, and the Militarization of the United States, 1900-85", Journal of Peace Research, 31, 1: 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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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파괴자로 동원된 대학 체육 선수들

역사/1900-1919 2010. 1. 11. 15:24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생은 아직 대중 교육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Veblen이 지적한 대로 고등교육이란 하나의 사치품이나 신분상징을 의미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물론 이 당시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대학이 이미 세워졌다.
그러나 대중들이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대학은 아니었다.
따라서 대부분 상류층의 남성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미국은 20세기 초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와 같이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극심하게 발생한다.
이들 파업은 주로 탄광, 부두, 철도 노동자 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계급의 보편성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주거지를 기반으로, 그리고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연대의식을 형성해 나갔다.
여기에 부두와 철도 노동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자로서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노동계급의 전위부대를 이루었다.

또한 20세기 초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1930년대의 대통령이 아닌)이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 특히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공식화하였고, 하와이를 침탈하고, 필리핀 전쟁을 통해 미국령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일본을 지지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미국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미국이 조선왕조를 도와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80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이미 1900년에 들어서면, 먼로주의의 태평양적용을 선언하고, 이는 곧 태평양 연안이 미국의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불안 요인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현재 하와이에 대해서는 병합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과하였다.  반면에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였지만, 금년이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전혀 사과의 움직임은 없고, 다만, 더욱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려는 움직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보인다(일본 세카이 잡지 2010년 1월호의 특집은 한일 병합 100주년이다.  와다 하루키, 강상중, 그리고 젊은 다른 교수 한분의 대담이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대학생들 특히 대학의 체육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남성적인 우월성을 내세우며 1900년대 초반의 미국에서 파업 파괴자로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아르바이트이기도 하지만, 계급이익의 발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아직 대학에 노동자 계층의 자녀가 입학하지 못했으며, 교수들도 신분보장이 되지 않았으므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우기 체육선수들은 남성성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능력을 과시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도 이를 부추기고 있다.  당시의 노동자들의 파업을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대부분 이들에 의해 쉽게 파괴되었고, 사업주들도 체육선수들의 근육적 능력을 신뢰하여 자주 요청하었다.

나는 같은 맥락을 아니지만, 1999년 9월 마산시 코아 양과점앞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 올린다.

참고 자료:
최정수, "T. 루즈벨트의 먼로 독트린과 '세계전략'", 서양사론 73호: 29-57
Stephen H. Norwood, 1994, "The Student as Strikebreaker: College Youth and the Crisis of Masculinit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Journal of Social History, Winter: 331-349
Melvyn Dubofsky, 1995, "Labor Unrest in the United States, 1906-90", Review XVIII, 1: 1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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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진 행정통합의 전망 강좌 보고

시사 2009. 12. 14. 11:48
지난 금요일 12월 11일 오후 7-9시, 시와 자작나무에서
경남대 행정학과 옥원호 교수님을 모시고,
당일 오전에 창원시 의회의 결의로 거의 확정된
창마진 (요즘 주요 신문에 이렇게 부른 답니다)의 통합의 전망과 과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첨부 사진은 김경년씨가 촬영한 것입니다.
저는 목요일 저녁에 창원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
토요일에 이선관 시인의 추모 행사를 마치고 창동의 장안 갈비에서 동료분들과 식사하면서,
그리고 어제 일요일에는 무학산을 완월폭포, 능선, 벚꽃나무 샘에서 하산하여 둘레길로 돌아오면서
산행하시는 분들의 마창진 통합에 대한 관심이 뜨거움과 동시에 해결하여야 할 일도 많구나하는 점을 느꼈습니다.  주로 통합 도시의 명칭, 그리고 통합시 청사에관한 것이더군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이제 조직다툼이 심해질 것입니다. 공무원, 관변단체들, 시의회 의원들, 국회의원들... 그 동안 각 시청과 맺은 인연이 많은 각종 기업들 (시청에 납품하는 업자들, 시내버스, 청소관련, 아니 각종 평가등과 관련된 용역서비스 제공하시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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