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과 모래는 국유인가?

역사/1920-29 2010. 6. 20. 08:56

국가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근거로 자연을 마음대로 개발하여 자연을 훼손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요즘 4대강 사업을 하며,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댐을 만들어 고인물로 만드는 사업, 강바닥의 모래를 준설하여, 이를 팔아서 사업비를 대겠다는 발상, 수자원공사는 강은 국가의 소유이므로 수자원공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 돈이 없으므로, 돈을 빌려 공사를 하고 이를 갚지 못하면, 결국은 수자원 공사가 팔아먹을 수 있는 개발된 토지, 강물, 모래를 팔아서 갚을 수 있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발상일까?

19세기 말에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미국의 당시 대통령에게 호소했던 자연은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 지속가능 발전의 지표에는 자연자원이 가장 먼저 나와서 자연을 훼손시키면 지속가능 자원은 줄어들어 발전이 늦어진다는 것, 자연은 훼손되면, 복구가능한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복구가능한 시간에 맞추어서 서서히 개발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 사유지가 아니라고 해서 국유지는 아니라는 점, 강원도 태백의 카지노를 국가가 소유하였듯이 4대강을 국가가 소유한 것은 아니라는 점, 자연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의 소유이고, 이를 개발하려면,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 자연은 법칙은 국가의 독단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언제부터 자연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관념을 갖게 되었을까? 강의 모래, 강의 강물이 수자원 공사의 소유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나? 1920년대 일본제국이 조선의 개간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리고, 여기에 작물을 재배하여, 일본본국의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공업원료를 공급하려고 할 때, 강 연변의 개발자들에게 개발후의 소유권을 국가가 공인하였다. 공인의 정도가 아니라, 개발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저리 융자를 해주고, 이주하려는 일본인들에게 이들 토지를 주었던 것이다. 조금 뒤늦은 시점이지만, 상당수의 한국인 지주들도 여기에 나서서, 개간을 하고, 매립을 하여 토지확보에 나섰다. 일본제국을 위해 일차적으로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한국의 대지주들이 동조하여 이익을 향유하였던 것이다.

일제로서는 저렴한 개발비용, 저렴한 생산비에 힘입어 일본제국의 인민들에게 저렴한 식량을, 그리고 일본의 공장들에게 저렴한 원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를 생산한 한국의 소작인들은 비료대금(금비), 수리조합비(물의 사용료), 농지개량비(대개는 동척이나 식산은행으로부터 저리 융자를 통해 조달)를 부담하고, 토지에 맞지 않는 개량 종자, 지주에게 바치는 5할의 소작료 등은 부담하고 나면, 자신들은 생산한 작물을 손에 만지지 못하고, 저렴한 곡식으로 연명하여야 했다.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토지를 빼앗기고, 그나마 작은 땅을 부치면서 농사를 짓던 소자작농민들은 가지고 있던 토지마저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건설업자들은 수자원공사로부터 건설비를 받지 못하게 되면, 연안지역 개발권을 받게 될 것이고, 수자원공사는 강물값을 올려 지방민들의 농업용수, 수돗물 원수의 값을 올려서 지방주민들의 부담을 늘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물 원수의 수질이 악화되어서 수돗물 정수비용이 늘어나고, 수돗물의 가격을 상승할 수 밖에 없다. 모래를 사용하여 토지개량을 하면, 그 비용은 결국 농민이 댈 것이고, 이를 위해 융자를 해줄 농협과 같은 금융기관들은 부실해 지거나 아니면 농민들의 부채를 늘려서 피해를 안게 될 것이다. 1920년대에 개간사업을 통해 지주들과 일제 이주민들이 토지를 수탈하고, 소작인들은 더 늘어나고, 금융부채에 시달린 현상을 지금도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참고 문헌
김현숙, 2006, “식민지 시대 종족마을의 토지소유 관계와 지주경영: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장기황 家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70집: 67-101
오미일, 2009, “일제시기 호남재벌 현준호의 학파농장과 자본축적 시스템”, 한국민족문화, 35권: 57-103
이송순, 2003, “전시기 조선의 지주권 약화와 지주경제의 실태,” 한국사학보, 14호 34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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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란 자율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역사/1920-29 2010. 6. 19. 07:41

일제는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이후에, 한국을 근대화 시켰다.  근대화를 새로운 제도의 도입, 생산성의 증대, 국가의 능력 강화로 규정한다면,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화, 특히 식민지적 근대화는 한국민의 자율성을 약화시켰다.  지난 토요일 (6월 5일)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학, 일부 회관(연구와 발표하는 곳, 그러나 연구하는 곳은 아니라고 중국인 교수가 지적한다)에서 200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Beckman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은 유효한 인간에 대한 경제학적, 심리학적,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이었다.  이 강연의 핵심은 동기화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지적인 능력보다 중요하며, 이는 어릴 때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생물학적으로 이러한 비인지적 능력은 유전자까지도 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1920년대의 한국의 식민지 상황을 살펴보면서 한민족의 유전자에 자율성,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국가의 사대주의, 학문과 생활의 사대주의, 생각의 사대주의, 판단과 기준의 사대주의의 수준이 이제 거의 100년이상된 외세의 수탈에 한민족의 유전자가 바뀌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화와 자율성의 상실이라는 주제는 실은 식민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가 매우 심하고 강압적으로 그리고 노예근성을 만들었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화가 식민지 경험이 없이 진행된 곳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고, 노동자들의 힘으로 공장의 혁신을 강제하고, 식민모국의 잇점으로 공장주들(자본가)이 협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현실은 근대화가 강압적으로 진행되고, 이에 대한 저항은 살인적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심리적으로 동기화가 부여되지 못하고, 자율적 해결능력을 상실한 데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제는 이미 1905년부터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후에는 자신들의 식민정책을 수행한다.  이는 한국의 요구가 아니라, 일본의 인민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고, 일본의 경제적, 대외적인 필요에 따라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위생 의료사업이 침투되고, 수리사업이 진행되고, 금비보급, 개간과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모두 사실이나, 이러한 사업들이 대지주, 일본인 지주화를 야기하고, 자주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실패의 정도가 매우 컸던 것이다.  즉 재래 볍씨에는 금비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급하여 사실상 생산성 향상이 늦어진 점, 수리사업의 결과 대지주의 이익은 그대로 온존하고(소작료는 여전히 5-6할을 받았고, 수리사업을 위한 동의율도 과반수면 되고, 토지기준으로 2/3로 정하였다), 상당수 개간사업의 결과는 일본에서 온 이주민들이 지주로 전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국민들은 이제 체계적으로 수리조합을 통해, 총독부에 종속되고, 금융적으로 총독부와 식산은행과 동척에 채무자로 전락하게 되어 결국, 토지를 수탈당하게 된다.

특히 경남의 경우에는 재래의 수리시설이 유지되지 못하여, 이를 보수하고, 새로이 개간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 지역이다.  그리고 수리조합의 발달도 한국 전체로 보면 빨랐던 지역이므로, 아마도 일본인 지주의 증가가 심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적인 지리조건 외에도 지정학적으로 일본인들의 심리적인 근접성, 친근성, 수탈의 지리적 용이성 등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러한 일본과의 친근성이 해방이후의 적산물자 이전,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된 일본자본의 한국이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 문헌
우대형, 2005, "일제하 만경강 유역 수리조합 연구", 동방학지: 139-179
정승진, 2009, "한국 근현대 농업수리질서의 장기적 재편과정 (1908-1973): 만경강 유역 전북수리조합의 합병사례 분석", 243-274
이애숙, ?, "일제하 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 한국사 연구, 50-51호: 319-362
우대형, 2005, "개량농법의 이식과 농촌의 양극화," 역사와 사회?: 234-251
우대형, ?, "1920년대 한국 미곡생산성의 정체," 경제 사학, 25호: 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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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 실물을 지배한다.

역사/1920-29 2010. 6. 18. 12:00

일본이 사실상 한국을 점령한 것은 군사를 보내어 서울을 점령하고, 러일전을 위해 한국의 모든 가용자원을 마음대로 쓸수 있게 만든 시점인 1904년으로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점을 넘어서서, 1905년이 되면, 일본 제일은행권을 한국의 공식화폐로 채택한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1997년에 문제가 된것은 한국에 들어온 외환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면서, 국제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기에 그런 것이고, 2008년의 금융위기 역시 같은 맥락이며, 최근에 우리나라가 OECD국가중 거의 최하위 수준의 신용평가를 받는 이유도 외환이 한국내에 들어와서, 삽시간에 회수해 간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외환은 형태상 빚은 아니어도, 실제로는 빚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외환이 부족하여,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외의 물자 도입과 외국인 고용 빚을 감당할 수 없자, 일본이나 외세의 빚에 의존하여, 결국은 이를 갚지 못하고, 우리의 해관 수입(관세)도 담보로 잡히고, 대부분의 해관은 외국인이 직접 장악하는 형태를 띄었다.

1920년의 농민들의 상태를 보면, 수리 시설, 비료와 같은 기본적인 농사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고, 관개 시설이 개선되지만, 농민을은 이러한 시설과 비료를 빚을 통해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빚은 식민당국인 총독부가 일본의 잉여자본과 일본국가 자본을 끌여들여 설립한 조선식산은행(1918년 설립)을 통해 이루어 진다.  직접적인 국가 자본은 자본금의 형태로, 그리고 일본의 잉여 유휴자본의 유입은 채권발행의 형태로 식산은행으로 유입이 이루어 진다.  물론 식산은행의 자금은 다른 금융기관의 자금보다는 장기 저리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농민들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정책자금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정책수행을 위해 국가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을 통해 집행이 이루어 진다.  우리로 치면, 산업은행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금을 활용하여 비료를 사고, 수리시설을 개선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쳐도 이를 갚을 만큰 농사의 생산성과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자금을 갚을 길이 없게되고, 농민은 부채의 악순환에서 허덕이거나, 아니면 담보로 잡힌 자산을 몰수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1920년대 중반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즉 일본의 쌀, 만주에서의 들어온 쌀이 생산되고, 일본내에서도 쌀의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밀이나 다른 곡물을 사용)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곡가의 하락을 발생하고, 농민 토지는 이제 채권자들이나, 식산은행, 아니면 지주들에게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하게된다.  빚은 쓰라고 해놓고, 결국은 빚에 허덕여서, 재산을 빼앗기는 과정을 보면, 현재 농협이 농민에게 정책 대출을 해주는 상황을 떠올린다.  정책대출을 통해 농사를 짓게해놓고는, 결국은 농산물 개방정책을 통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유도하고, 농민들을 곤궁으로 몰아 넣는 정책이 바로 1920년대부터 시작된 셈이다.  권대웅 논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식은을 통한 농촌침투는 '식산은행의 금고'를 토지문서로 채운다는 경제적 수탈의 표징이었다.  1926년 12월 28일 동척 서선농장이 위치한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의 소농출신 나석주가 '신산과 동척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생활의 근거지를 상실한 한국 농민의 참상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권대웅, ?, "1920년대 금융자본의 농업지배에 관한 연구: 조선식산은행을 중심으로", 민족문화론, 5: 101-129
김재훈, 2005, "1925-1931년 미가하락과 부채불황",
정병욱, ?, "1918-1937년 조선식산은행의 자본형성과 금융활동," 한국사 연구, 79호: 5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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