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에서 계급으로

역사/1920-29 2010. 6. 24. 10:11
조선조의 신분이 시장적인 계급구조로 전환된 시기를 따진 다면, 아무래도 1910년대이후에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리라.  물론 조선조의 신분은 이미 일본과 청나라의 침입이후에 와해되기 시작했지만, 와해라는 표현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문란해지고, 기준이 가변적이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신분의 와해에 따른 실질적인 경제력에 기반한 신분질서가 새로이 편성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몰락 양반이라고 불릴수 있는 집단 역시, 양반의 위세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조롱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추세는 1910년대의 계약관계적인 지주-소작관계의 성립, 토지의 사적 소유권 제도, 가옥세 소비세 등의 도입등으로 근대적인 계약에 기초한 사회관계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계급이 성립할 수있는 기반적인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은 한국을 강점하면서, 근대적인 계약관계를 이용하여, 기존의 신분체제를 제도적으로 와해시키고, 새로운 계약관계를 도입하면서, 이를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주와 관료세력들을 강점된 한국에서 토착지배세력으로 재편하고, 일본의 재정, 자본, 이주민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실질적인 착취가 가능한 제도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지금도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지주와 소작간의 관계를 착취와 후견이라는 이중의 관계로 표현한다.  그러나 1910년대의 토지소유권 제도의 확립과 지주-소작관계의 계약관계적 전환은 소작들은 착취의 대상일 뿐, 후견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를 이용하려는 지주들, 그리고 일제의 국가, 자본, 이주민들은 한국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식민지적 착취를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나타난 것이 바로 소작쟁의이다.  소작쟁의는 사실상 전통적인 신분적 소작제도에서 계약적 소작제도로의 전환에서 나타난 관행의 불안정에서 필연적으로나타난 것이다.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제도는 생계유지의 안정성을 위협하였고, 이에 농촌의 불안정의 지역으로 변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한편으로는 소작쟁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공유지(사적 소유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의 개간, 도시로의 이주를 감행하게 된다.  이는 도시지역의 프롤레리아트 층의 누적으로 이어지고, 개간은 후에 다시 지주세력에게 빼앗기게 되어, 토지소유에 기반한 사회적 불안은 1920년대 내내 지속된다.  오히려 1930년대에 이르르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주-소작관계에 불안을 느낀 일본제국은 일본제국의 자본과 국가, 이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한국인 지주를 억누르고, 도시지역의 무산자를 활용한 착취로 전환하게 된다.  1920년대까지 일본제국과 이해를 같이하던 한국인 지주세력은 팽당하고, 위축되게 된다.  혹자는 이런 상황에서 1945년이후의 농지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이미 1930년이후에 한국의 지주-소작상황은 악화 일로를 겪고 있었고, 이를 국가의 공인된 형태로 해결할수는 없었지만, 그 심각함은 극에 달해 일본제국도 해결책을 모색하고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1945년이후에 북한은 1946년에, 남한은 1950년에 농지개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저항이 없다거나 완전한 성공을 하였다는 것은 아니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산자의 누적은 곧바로 임금노동자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일단 주로 일제가 한국에서 침탈해가는 곡물의 도정, 이동을 위한 항만 부두 노동등에 무산자들이 임노동에 고용된다.  이어서 일제가 도입한 인력거, 민족자본의 영역으로 등장한 양말 메리야스 산업, 성냥 등의 산업에 임노동자가 고용된다.  따라서 1920년대는 아직 임노동자의 숫자가 많지는 않아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고,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특히 1920년대 초반이 되면, 일본은 물론이고, 연해주 방면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한국으로 밀려들어 온다.  관념이나 세계사적 흐름에 의해 노동운동의 이념은 지식인들에 의해 제공되고, 이들에 의해 조직이나 운동이 시작된다. 노동자들 자신들은 가혹한 노동조건에 영향을 받아 자구적인 자조 조직의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는 한일간의 지식인이나 노동운동의 연대가 잘 이루어지던 시기라고 볼 수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소위 중국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하기 위한 사회주의과 민족주의 세력이 합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신간회의 결성에서 드러나듯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연합전선이 형성된다. 여기에 지식인과 노동자, 민족주의적인 색채의 흐름까기 결합하여 대 연합체가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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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과 모래는 국유인가?

역사/1920-29 2010. 6. 20. 08:56

국가가 자연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근거로 자연을 마음대로 개발하여 자연을 훼손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요즘 4대강 사업을 하며,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댐을 만들어 고인물로 만드는 사업, 강바닥의 모래를 준설하여, 이를 팔아서 사업비를 대겠다는 발상, 수자원공사는 강은 국가의 소유이므로 수자원공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발상, 돈이 없으므로, 돈을 빌려 공사를 하고 이를 갚지 못하면, 결국은 수자원 공사가 팔아먹을 수 있는 개발된 토지, 강물, 모래를 팔아서 갚을 수 있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발상일까?

19세기 말에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미국의 당시 대통령에게 호소했던 자연은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 지속가능 발전의 지표에는 자연자원이 가장 먼저 나와서 자연을 훼손시키면 지속가능 자원은 줄어들어 발전이 늦어진다는 것, 자연은 훼손되면, 복구가능한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복구가능한 시간에 맞추어서 서서히 개발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것, 사유지가 아니라고 해서 국유지는 아니라는 점, 강원도 태백의 카지노를 국가가 소유하였듯이 4대강을 국가가 소유한 것은 아니라는 점, 자연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의 소유이고, 이를 개발하려면,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 자연은 법칙은 국가의 독단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언제부터 자연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관념을 갖게 되었을까? 강의 모래, 강의 강물이 수자원 공사의 소유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나? 1920년대 일본제국이 조선의 개간사업을 통해 농지를 늘리고, 여기에 작물을 재배하여, 일본본국의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공업원료를 공급하려고 할 때, 강 연변의 개발자들에게 개발후의 소유권을 국가가 공인하였다. 공인의 정도가 아니라, 개발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저리 융자를 해주고, 이주하려는 일본인들에게 이들 토지를 주었던 것이다. 조금 뒤늦은 시점이지만, 상당수의 한국인 지주들도 여기에 나서서, 개간을 하고, 매립을 하여 토지확보에 나섰다. 일본제국을 위해 일차적으로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한국의 대지주들이 동조하여 이익을 향유하였던 것이다.

일제로서는 저렴한 개발비용, 저렴한 생산비에 힘입어 일본제국의 인민들에게 저렴한 식량을, 그리고 일본의 공장들에게 저렴한 원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를 생산한 한국의 소작인들은 비료대금(금비), 수리조합비(물의 사용료), 농지개량비(대개는 동척이나 식산은행으로부터 저리 융자를 통해 조달)를 부담하고, 토지에 맞지 않는 개량 종자, 지주에게 바치는 5할의 소작료 등은 부담하고 나면, 자신들은 생산한 작물을 손에 만지지 못하고, 저렴한 곡식으로 연명하여야 했다.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토지를 빼앗기고, 그나마 작은 땅을 부치면서 농사를 짓던 소자작농민들은 가지고 있던 토지마저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바라보면서, 결국은 건설업자들은 수자원공사로부터 건설비를 받지 못하게 되면, 연안지역 개발권을 받게 될 것이고, 수자원공사는 강물값을 올려 지방민들의 농업용수, 수돗물 원수의 값을 올려서 지방주민들의 부담을 늘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물 원수의 수질이 악화되어서 수돗물 정수비용이 늘어나고, 수돗물의 가격을 상승할 수 밖에 없다. 모래를 사용하여 토지개량을 하면, 그 비용은 결국 농민이 댈 것이고, 이를 위해 융자를 해줄 농협과 같은 금융기관들은 부실해 지거나 아니면 농민들의 부채를 늘려서 피해를 안게 될 것이다. 1920년대에 개간사업을 통해 지주들과 일제 이주민들이 토지를 수탈하고, 소작인들은 더 늘어나고, 금융부채에 시달린 현상을 지금도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참고 문헌
김현숙, 2006, “식민지 시대 종족마을의 토지소유 관계와 지주경영: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장기황 家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70집: 67-101
오미일, 2009, “일제시기 호남재벌 현준호의 학파농장과 자본축적 시스템”, 한국민족문화, 35권: 57-103
이송순, 2003, “전시기 조선의 지주권 약화와 지주경제의 실태,” 한국사학보, 14호 34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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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란 자율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역사/1920-29 2010. 6. 19. 07:41

일제는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이후에, 한국을 근대화 시켰다.  근대화를 새로운 제도의 도입, 생산성의 증대, 국가의 능력 강화로 규정한다면,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화, 특히 식민지적 근대화는 한국민의 자율성을 약화시켰다.  지난 토요일 (6월 5일)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학, 일부 회관(연구와 발표하는 곳, 그러나 연구하는 곳은 아니라고 중국인 교수가 지적한다)에서 200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Beckman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은 유효한 인간에 대한 경제학적, 심리학적, 생물학적 기반을 찾는 것이었다.  이 강연의 핵심은 동기화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지적인 능력보다 중요하며, 이는 어릴 때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생물학적으로 이러한 비인지적 능력은 유전자까지도 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1920년대의 한국의 식민지 상황을 살펴보면서 한민족의 유전자에 자율성,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국가의 사대주의, 학문과 생활의 사대주의, 생각의 사대주의, 판단과 기준의 사대주의의 수준이 이제 거의 100년이상된 외세의 수탈에 한민족의 유전자가 바뀌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화와 자율성의 상실이라는 주제는 실은 식민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가 매우 심하고 강압적으로 그리고 노예근성을 만들었을 정도로 심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근대화가 식민지 경험이 없이 진행된 곳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고, 노동자들의 힘으로 공장의 혁신을 강제하고, 식민모국의 잇점으로 공장주들(자본가)이 협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현실은 근대화가 강압적으로 진행되고, 이에 대한 저항은 살인적으로 진행되어, 오히려 심리적으로 동기화가 부여되지 못하고, 자율적 해결능력을 상실한 데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제는 이미 1905년부터 한국을 무력으로 강점한 후에는 자신들의 식민정책을 수행한다.  이는 한국의 요구가 아니라, 일본의 인민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고, 일본의 경제적, 대외적인 필요에 따라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그리하여 위생 의료사업이 침투되고, 수리사업이 진행되고, 금비보급, 개간과 간척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모두 사실이나, 이러한 사업들이 대지주, 일본인 지주화를 야기하고, 자주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실패의 정도가 매우 컸던 것이다.  즉 재래 볍씨에는 금비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급하여 사실상 생산성 향상이 늦어진 점, 수리사업의 결과 대지주의 이익은 그대로 온존하고(소작료는 여전히 5-6할을 받았고, 수리사업을 위한 동의율도 과반수면 되고, 토지기준으로 2/3로 정하였다), 상당수 개간사업의 결과는 일본에서 온 이주민들이 지주로 전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국민들은 이제 체계적으로 수리조합을 통해, 총독부에 종속되고, 금융적으로 총독부와 식산은행과 동척에 채무자로 전락하게 되어 결국, 토지를 수탈당하게 된다.

특히 경남의 경우에는 재래의 수리시설이 유지되지 못하여, 이를 보수하고, 새로이 개간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 지역이다.  그리고 수리조합의 발달도 한국 전체로 보면 빨랐던 지역이므로, 아마도 일본인 지주의 증가가 심하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적인 지리조건 외에도 지정학적으로 일본인들의 심리적인 근접성, 친근성, 수탈의 지리적 용이성 등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러한 일본과의 친근성이 해방이후의 적산물자 이전,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된 일본자본의 한국이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 문헌
우대형, 2005, "일제하 만경강 유역 수리조합 연구", 동방학지: 139-179
정승진, 2009, "한국 근현대 농업수리질서의 장기적 재편과정 (1908-1973): 만경강 유역 전북수리조합의 합병사례 분석", 243-274
이애숙, ?, "일제하 수리조합의 설립과 운영," 한국사 연구, 50-51호: 319-362
우대형, 2005, "개량농법의 이식과 농촌의 양극화," 역사와 사회?: 234-251
우대형, ?, "1920년대 한국 미곡생산성의 정체," 경제 사학, 25호: 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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