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 2010. 8. 27. 17:57
어제 저녁에 문화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가졌다. 경남발전연구원의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들어가자 김하경 선생님이 [아침입니다] 책을 건네 주신다. 책의 들어가는 글이, "불가능한 꿈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고, 책의 중간 내용에도 정월 초하루에 쓴"꿈과 희망", 그리고 "현실과 꿈"과 같은 무엇인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신 편이다. 나는 전에 경남정보사회연구소에 나온 마을백일장 입상 작품집에서 연구소를 비유하면서, 꿈을 담는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일이 있다. 현실은 꿈을 꾸기도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이를 실현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밤의 꿈은 낮에 일어난 일에 많이 기인한다. 낮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즐겁게 이를 위해 매진하였다면, 밤의 꿈은 악몽이 아니라, 즐거운 꿈, 더 나아가기 위한 꿈이 될 것이다. 반면에 낮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못했고, 남이 꿈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밤의 꿈은 악몽으로 변하여,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를 것이다.
경남발전연구원에 오면서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연구원이 하는 일은 결국, 도민들의 꿈을 현실의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정책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 내고, 이 중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을 찾아내어, 도청에 제시하여, 실현하게끔 하는 일일 것이다. 도민들의 꿈은 무엇일까? 그리고 도민들의 꿈이 항상 정당한 것일까? 며칠 전에 참여예산제의 전단계로 분야별 토론회를 진행한 일이 있었다. 상당수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정책을 통해 이루기 위해 여러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꿈 중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아름다운 꿈도 있었고, 자신이나 단체의 주장을 하는 듯한, 제안도 있었다. 자신만의 꿈이 아닌, 모두가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 대동세상이 우리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도, 내가 남을 위하면, 남은 나를 불신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는 선제적으로 남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정책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정책은 많은 이들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 정책일 것이고, 특정인에게만 혜택이 제한적인 정책은 편협된 정책이 될 것이다. 내가 경남발전연구원장이 되면서, 필자에게 마치 모든 정책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처럼 하소연을 늘어 놓는 분들이 많다. 한이 많다. 정부에 대한 정책에 대한 한이 정말로 많이 맺혀 있는 것 같다. 정책연구원장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아이디어를 수집하여, 정책으로 제안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상대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기에 편안하다. 편안하다고 하여,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주워 담고 있다. 꿈을 기록하고 이를 검토하고 있다. 내 방에 들어오면, 이를 정리하여 각 해당 연구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검토시키고, 정책으로 전환이 가능한지 문의하고있다. 결국 나도 실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워담다 빠진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책으로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교양 2010. 7. 31. 19:35
경남정보사회 연구소의 한마을 한책읽기에서 선정한 책 중에 하나가,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2007, 문학세계)였다. 이책을 받아든 순간, 만화책을 그것도 세권짜리 순정만화, 이런 것을 한마을 한책읽기의 선정도서로 정하다니, 그러면서도 왜 이런 책을 선정했는지 궁굼했다. 오늘 마침 더위를 식힐 책을 실피다가, 이책이 눈에 띠었다. 더우니, 그저 만화책같이 쉽게 읽을 책을 정한 것이다. 세권이다. 제목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아내를 먼저 보낸 늙은 사내가 혼자된 할머니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할 수 없어 그대로 바꾼어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잔잔하면서도 순정을 그린 것이다. 무대는 서울의 옥수동 산동네, 주인공은 그래도 잘 사나, 우유배달을 하는 혼자된 할아버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꼬장 꼬장한 할아버지이다. 첫장면은 나이들 사람이 죽으면, 호상이라고 하는 상갓집의 장면에서 이에 호통치는 어른의 모습으로 나오고, 이날의 상갓집은 결국,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이웃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은 자살한 부부노인의 상갓집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이 장면은 몇년전에 미국에서 혼자 할머니의 병간호 수발을 들던 할아버지가, 자신이 곧 죽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내를 혼자 두고 죽을 수 없어 죽인 사건이 생각나게 한다. 결국 이 할아버지도 몇달후에 죽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내를 살인한 할아버지를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이 만화와 다른 점은 이 때에도 미국에서 자식이 나타났지만, 전혀 죄의식을 별로 없이 다만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너무도 사랑하였으므로, 선처해 달라는 정도가 기사화된 일이 있다. 이 만화는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손을 떼어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자식들에게 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집에서 경남대에 다닌 길에도 아침에 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댓거리 번개시장에 가는 모습을 거이 매일 보게된다. 내가 이야기를 어느 신문인가에 소개하면서, 나도 그렇게 늙으면 좋겠다고 느낌을 적었더니, 처가 그런 것은 쓰지 말라고 한다. 늙는 것이 슬픈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늙는 것은, 아니 나이드는 것은 어쩔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 것을! 요즘 경남발전 연구원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커다란 조직체의 장의 한 일도 없다. 전국적인 상황을 보니, 대개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과 친한 지식인들 중의 한사람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비교적 잘 운영되는 곳은 연구원장이 자신만만한 곳이다. 대구경북연구원의 홍철원장님이 그런 분이라고 주위에서 전한다. 이분은 공무원들에게 절대로 연구원에 부당한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전한다. 이런 자신감은 내적으로는 연구원들의 연구 결과와 조직운영의 자신감, 그리고 자신이 이제 나이도 들었는데, 무슨 용심이 있겠는가하면서 사심이 없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도 경남대의 김정대 교수가 행행공무사의 교훈의 말씀을 당부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많으면, 상대적으로 욕심이 적을 것이라고.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들은 사람에게서 관용이나, 지혜,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세태에 이 만화는 어른의 모습을 순정하게 보여준 점에 특징이 있다.
교양 2010. 7. 24. 15:43
경남정보사회연구소의 책읽기 난에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올릴 수가 없다. 무슨 시스템이 바뀐 모양이다. 여기에 올리게 되었다. 어제 연구소 이사회에 참석하니, 연구소 이사님들이 경남발전 연구원장 취임을 축하한다고, 장미꽃다발과 진행중인 한마을 한 책읽기에서 선정된 책을 선물했다. 풀어보니, 그 중의 한 책이 주득선과 차오름, 2006, [명화속에 숨겨진 사고력을 찾아라](주니어 김영사)이다. 마침 집에 큰 아이가 빌려온 책인 이명옥, 2009, [한조각의 상상력, 아침 미술관] (21세기 북스)와 선동기, 2009,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가 있다. 같이 읽어보니, 명화를 소개하는 형태이나, 보다 대중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주득선과 차오름의 책은 청소년이나,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보다 분석적이다. 그림에 나타난 요소들을 분석하고, 이를 사회현실로서 분석한다. 특히 김홍도의 씨름과 점심이라는 작품의 해석은 흥미롭다. 특히 씨름에서 경기하는 두사람의 신분이 다름을 지적하고, 이들이 같이 경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마을의 전통적인 공동체 전통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오가 되면 평민들은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보통때는 길에서 눈만마주쳐도 나이에 상관없이 무조건 양반에게 허리가 휘도록 절을 해야 했던 평민이, 이날 만큼은 양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씨름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금쪽처럼 여겨야 했던 양반의 몸을 번쩍 안아 있는 힘껏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한풀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습니다"(17쪽). 이말의 진실을 알수 없지만, 저자의 해석을 그대로 믿는다면, 단오는 마을의 축제로서 기능한 셈이다. 양반의 몸을 내동댕이 칠수 있는 기회이니까.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걸수 있는 기회이니까? 일한 번 단오날의 축제를 재현해 보자.
이명옥의 책은 하루 하루 365일을 기준으로 일단 이 책은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편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에 대한 약간의 단상을 적어놓은 것이다. 해석의 재미는 조금 약한 편이나, 저자가 다음편이 나오면, 오늘과 같은 7월 24일에 보아야 할 작품과 해석이 있을 것이나, 6월의 더위에읽을 만한 것으로 보니, 감명보다는 단편적인 지식의 습득이 흥미로운 책이라는 느낌이 난다. 반면에 선동기의 책음 작가별로 30명을 선정하고, 이들의 작품 경향을 세가지로 나눈 다음에 한 작가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대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작가가 지적하듯이 자신의 감수성과 해석의 상상력을 드러낸 책이다.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 중에서도 일상을 담은 그림이라는 제목에 속한 3명의 작가의 작품 해석을 읽었다. 19세기 후반의 파리의 상류사회의 애환을 그린 작품이 많은 앙리 제르벡스의 작품들의 소개를 흥미로왔다. 특히 <롤라>라는 작품은 창녀와 하루밤을 자고난 사내가 등장한다(172-173쪽). 당시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던 뮈세의 시 <롤라>에는 이렇게 묘사된다고 한다. "마리안의 화대는 비쌌다. 그녀와의 하루밤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써야했다. 롤라는 우울한 눈빛으로 지붕위로 돌렸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창문 끝으로 발길을 돌렸다. 롤라는 돌아서서 마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로한 상태였고 다시 잠에 떨어졌다"(173쪽). 이 글의 모습이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같은 19세기 후반의 가난한 자들의 모습을 프랑스의 어촌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쥘 파스티앵-르파주이다. 일하는 사람들, 거지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특히 거지들의 모습을 그린 것은 정말, 우리의 고민을 나타낸다. 거지들은 양반이나 귀족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세상이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을 찾아가며, 동정을 구한다. 이웃들의 따스한 시선이 나타나 있다. 거지의 비참한 몰골과 따스한 시선이 아름답다. <걸인>에는 어린 아이가 늙은 걸인을 내보내는 시선이 나타나 있다(192-193쪽). <눈먼 거지>와 이 아이를 이끌고있는 커다른 흰 색의 개가 누워 있다(194-195쪽). 프랑스 사회의 이중성을 보고 있다. 롤라와 마리안, 걸인과 아이의 모습이 교차된다. 이것이 당시의 프랑스였다. 책을 읽으면 항상 우리의 현실이 생각난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이중성은 바로 우리사회의 이중성을 암시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의 영국의 어민들의 삶을 육지에 남아 있는 여인들의 애환을 중심으로 작품을 구성한 이는 우러터 앵글러이다. 주제는 주로 남아있는 여인들, 바다에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들, 바다에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들의 육지에서의 삶의 모습이 그것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의 어촌에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