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인민, 아니면 황국신민

역사/1920-29 2010. 8. 30. 07:52

사람들을 표시하는 말은 시대에 따라, 의미가 형성되어 지시한다.  백성은 그냥 여러 성을 가진 일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을 숫자가 아닌, 하얀 색을 의미한다면,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인민이라고 한다면, 이는 인이라는 양반계층과 민이라는 피지배층을 가리킨다.  따라서 매우 정치적인 의미이면서도,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나 아니면 이념체제가 등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요즘 널리 사용하는 국민은 황국신민의 준말로서, 일본의 천황을 떠받듯는 사람으로 의미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국민은 신민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 어휘이다.

1920년대의 백성들과 지배체제나 지배이념을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즉 국가가 토지와 민중을 장악하고, 지배해 나가면서, 과거의 자율적인 공동체가 와해되면서, 공동체에 의존하여 살아가던 이들이, 살길이 막연해지고, 의존할 데가 없어지면서, 국가나 국가 주도적인 사회가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토막민이나, 도시의 빈민들에 대한 국가 주도의 사회적인 부조체제의 등장,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국가 부조체제의 등장, 어린이에 대한 경제적 주체화와 동시에 착취의 심화, 그리고 이와 동시에 국가의 보살핌을 강조하는 이념의 등장이 그것이다.  1920년대는 또한 사회의 건설이나, 자치론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되면서, 이를 둘러싼 고민이 심각해지던 상황이다.  고민은 자치론이나, 소외된 계층의 사회적 소살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난 것 같다.

아무튼 국가, 시장경제, 공동체가 아닌 사회적인 요소로 이를 해결하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때의 사회는 순수히, 국가와 독립적인, 아니면 시장경제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장의 수혜자들과 국가의 권력자들, 전통적인 신분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서구나 일본의 경우에도 이런 면은 사실이엇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국가주도, 아니 식민당국의 권력이 주도하였다는 점이 더욱 드러났다고 보여진다.  이는 결국, 사회 역시 식민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 사회의 시초부터 내재된 국가 주도성이 문제가 된다.

현재의 상황에서 역시 사회는 주로 국가와의 대결내지, 국가에의 의존을 주된 과제로 주어지는 듯하다.  이는 다른 사회와는 달리, 시민운동이 국가와 연관되어 움직이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일제의 잔재는 결국, 해방후에도 역시 국가가 사회를 주도하려는 국민운동적 사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군국구의 일본이 착근시킨 국민운동적 사회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내재적 자율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가게하는지도 모르겠다.

:

정책으로 담을 수 있는 꿈

교양 2010. 8. 27. 17:57
어제 저녁에 문화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가졌다.  경남발전연구원의 강당에서 개최되었는데, 들어가자 김하경 선생님이 [아침입니다] 책을 건네 주신다.  책의 들어가는 글이, "불가능한 꿈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고, 책의 중간 내용에도 정월 초하루에 쓴"꿈과 희망", 그리고 "현실과 꿈"과 같은 무엇인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쓰신 편이다.  나는 전에 경남정보사회연구소에 나온 마을백일장 입상 작품집에서 연구소를 비유하면서, 꿈을 담는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일이 있다.  현실은 꿈을 꾸기도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이를 실현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밤의 꿈은 낮에 일어난 일에 많이 기인한다.  낮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즐겁게 이를 위해 매진하였다면, 밤의 꿈은 악몽이 아니라, 즐거운 꿈, 더 나아가기 위한 꿈이 될 것이다.  반면에 낮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못했고, 남이 꿈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밤의 꿈은 악몽으로 변하여,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를 것이다.

경남발전연구원에 오면서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연구원이 하는 일은 결국, 도민들의 꿈을 현실의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정책아이디어를 많이 만들어 내고, 이 중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을 찾아내어, 도청에 제시하여, 실현하게끔 하는 일일 것이다.  도민들의 꿈은 무엇일까?  그리고 도민들의 꿈이 항상 정당한 것일까?  며칠 전에 참여예산제의 전단계로 분야별 토론회를 진행한 일이 있었다. 상당수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정책을 통해 이루기 위해 여러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꿈 중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아름다운 꿈도 있었고, 자신이나 단체의 주장을 하는 듯한, 제안도 있었다.  자신만의 꿈이 아닌, 모두가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 대동세상이 우리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도, 내가 남을 위하면, 남은 나를 불신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는 선제적으로 남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정책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정책은 많은 이들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 정책일 것이고, 특정인에게만 혜택이 제한적인 정책은 편협된 정책이 될 것이다.  내가 경남발전연구원장이 되면서, 필자에게 마치 모든 정책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처럼 하소연을 늘어 놓는 분들이 많다.  한이 많다.  정부에 대한 정책에 대한 한이 정말로 많이 맺혀 있는 것 같다.  정책연구원장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아이디어를 수집하여, 정책으로 제안하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상대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기에 편안하다.  편안하다고 하여,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주워 담고 있다.  꿈을 기록하고 이를 검토하고 있다. 내 방에 들어오면, 이를 정리하여 각 해당 연구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검토시키고, 정책으로 전환이 가능한지 문의하고있다.  결국 나도 실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워담다 빠진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책으로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

나이가 들면

교양 2010. 7. 31. 19:35

경남정보사회 연구소의 한마을 한책읽기에서 선정한 책 중에 하나가,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2007, 문학세계)였다.  이책을 받아든 순간, 만화책을 그것도 세권짜리 순정만화, 이런 것을 한마을 한책읽기의 선정도서로 정하다니, 그러면서도 왜 이런 책을 선정했는지 궁굼했다.  오늘 마침 더위를 식힐 책을 실피다가, 이책이 눈에 띠었다.  더우니, 그저 만화책같이 쉽게 읽을 책을 정한 것이다.  세권이다.  제목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아내를 먼저 보낸 늙은 사내가 혼자된 할머니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할 수 없어 그대로 바꾼어서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잔잔하면서도 순정을 그린 것이다.  무대는 서울의 옥수동 산동네, 주인공은 그래도 잘 사나, 우유배달을 하는 혼자된 할아버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꼬장 꼬장한 할아버지이다.  첫장면은 나이들 사람이 죽으면, 호상이라고 하는 상갓집의 장면에서 이에 호통치는 어른의 모습으로 나오고, 이날의 상갓집은 결국,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이웃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은 자살한 부부노인의 상갓집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이 장면은 몇년전에 미국에서 혼자 할머니의  병간호 수발을 들던 할아버지가, 자신이 곧 죽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내를 혼자 두고 죽을 수 없어 죽인 사건이 생각나게 한다.  결국 이 할아버지도 몇달후에 죽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내를 살인한 할아버지를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이 만화와 다른 점은 이 때에도 미국에서 자식이 나타났지만, 전혀 죄의식을 별로 없이 다만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너무도 사랑하였으므로, 선처해 달라는 정도가 기사화된 일이 있다. 이 만화는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손을 떼어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자식들에게 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집에서 경남대에 다닌 길에도 아침에 한 노부부가 손을 잡고 댓거리 번개시장에 가는 모습을 거이 매일 보게된다.  내가 이야기를 어느 신문인가에 소개하면서, 나도 그렇게 늙으면 좋겠다고 느낌을 적었더니, 처가 그런 것은 쓰지 말라고 한다.  늙는 것이 슬픈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늙는 것은, 아니 나이드는 것은 어쩔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 것을!  요즘 경남발전 연구원을 맡아서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커다란 조직체의 장의 한 일도 없다.  전국적인 상황을 보니, 대개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과 친한 지식인들 중의  한사람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비교적 잘 운영되는 곳은 연구원장이 자신만만한 곳이다.  대구경북연구원의 홍철원장님이 그런 분이라고 주위에서 전한다.  이분은 공무원들에게 절대로 연구원에 부당한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전한다.  이런 자신감은 내적으로는 연구원들의 연구 결과와 조직운영의 자신감, 그리고 자신이 이제 나이도 들었는데, 무슨 용심이 있겠는가하면서 사심이 없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도 경남대의 김정대 교수가 행행공무사의 교훈의 말씀을 당부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많으면, 상대적으로 욕심이 적을 것이라고.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들은 사람에게서 관용이나, 지혜, 어른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세태에 이 만화는 어른의 모습을 순정하게 보여준 점에 특징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