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역사/1900-1919 2013. 9. 11. 16:23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지식산업에 1910년대의 마산에서 살은 일본인의 체험 기록이 나온다.  "하타다 다카시는 190811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21년 마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중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기까지 약 17년 동안을 조선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 2이다" (25).

"개항한 1898년에는 마산 근교를 포함하여 일본인 이민자 수는 103, 1900년 마산포 사건을 전후하여 3백명으로 증가하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이후에는 2천명으로 급증하고, 하타다가 태어난 1908년에는 3,687명에 이르렀다....1912년 당시 마산의 이민자들의 일본 지역 출신지역은, 혼슈(本州)의 야마구치(山口), 히로시마(廣島) ,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현에 이어 에히메(愛媛) 현과 함께 오카야마 현이 6위로 7백명의 이민자 수를 보여주고 있다 (32).  출처: 朴宗根, 1995, “旗田巍先生馬山”, 旗田巍先生追悼集刊行會, [追悼 旗田巍先生]: 140-141).  오카야마 현의 사람들은 통영 현재 도남동 관광단지 입구에 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준 외, 2007, "경남 통영 강산촌의 형성과정과 주택변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회계, 23권 8호 (통권 226호), 8월호를 참조하시오.

"1906년에 의사였던 하타다의 부친이 오카야마 현(岡山縣)에서 마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이주 동기는 하타다의 조부가 경영하던 주점 (酒店, 사카야)가 망하자, 조선이란 신천지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하타다의 부친 하타다 가네타로 (旗田兼太郞)가 마산으로 이주했다" (하타다의 누이인 하타다 게이코 旗田惠子의 증언) (31).  1911년 마산에 있던 빈전 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일문)에는 마산에 당시 8명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정도, 2011. 8. 8, 100in.com에 올라온 것).  이때에는 이미 마산병원이 자혜의원으로있었기도 한 시기라서 의사이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즉 김형윤, [마산야화]에 "1909년 신마산 마산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마에하라가 철도병원 위탁 산과를 경영했으며, 마산병원 도구가와는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로 쳐서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다.  마산병원은 경남 자혜병원으로 됐다가, 경남 도립 병원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월영초등학교 뒷편, 헌병대장이 살았다던 인근의 언덕 집에 [자혜병원 산부인과]라는 나무 팻말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산부청이 1915년에 발간한 [마산안대](일문) 책자에는 마산병원이 마산중부 경찰서, 또는 월초등학교 동편 맞은 편으로 추정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조용호, 1999. 1. 25일자 경남신문).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당시에 하타다의 부친은 8명중 한면의 의사로서 근무했으며, 아마도 초기에는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 후에 마산병원에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로는 마산병원의 역사가 더 밝혀져야하지만, 1908년생인 하타다가 초등학교 중간에 병원이 이전하여 이사하였다는 말이 나오기에 그렇다.  그러면 대강 1915-2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카다의 생가는 일본인 거리가 급속히 발전한 러시아 영사관 동쪽 마산천 주변, 즉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의 경계에 있었다 (마산천은 현재 창원천이라 불리우는 제일각 옆, 제일여고의 연애 다리가 있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일본인과 조선인 거리의 경계라는 표현은 잘못,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근처는 본정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 이은진 지적). 그곳에 살다가 하타다가 소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1915년경으로 추정, 이은진 추가), 그의 일가는 일본인 거리로부터 약 4-5킬러미터 떨어진 동쪽 지역으로 이사했다 (마산역까지는 직선 거리 6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걸어서 거리라고 하더라도 1킬로 미터 미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이은진 추가). 1905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마산선 철로를 부설하였는데, 마산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 거리가 러시아 영사관 주변 (현재의 월포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에서부터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집 주변에는 일본인 소학교 (월영 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와 관공서 (마산우체국, 이은진 추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타다의 집도 醫院 건물을 세워 조금씩 넓혀 갔다" (35).  앞서 조용호 기자의 글에는 인근에 창원 군청이 있었고, 장군동에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34쪽에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거리 사진이 게재 => 멀리 보이는 공장은 주류 공장 (창포 동성, 창포 한백 아파트로 추정, 그러나 사진 도로가 구부러진 방향이 현재의 도로 방향과 달라서 후에 허정도에게 문의해보아야 할 사항... 이은진 추가).

책을 읽다가 흥미로와서 적어 보았다.  최근에는 일제하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다.  필자의 메모에 성신대 김주희 교수가 쓴 박사학위 논문에 마산 가포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일본신문에서 기사화 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문의해 보아야겠다.  오늘 성신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주소가 불명하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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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역사/1930- 2013. 3. 4. 16:54

 

(1) 극단주의자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Braunthal, 1956).

  (2) 파펜 시기: 1932720일에 파펜은 연립정부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라운을 물리친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입장과 비슷하게 당장의 실업문제가 심하므로, 미래에 문제가 심각하면 파업을 하겠지만, 현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도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당장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조합, 정당 그리고 철의 전선들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떠 보았다. 대개는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철의 전선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일반 파업이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주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자, 곧 이어서 파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되돌이켜 보면,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민당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바이마르 정권 기간 내내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aunthal, 1956).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무행동의 결정은 후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데 저항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Braunthal, 1956).

  (3) 술라이혀 시기: 1932123일에 파펜정부를 승계한다. 술라이혀는 독일 장성들이 이끄는 노동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은 히틀러의 등장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직노동자들과 교섭에서 술라이혀는 장단기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술라이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대 노조인 ADGB와 만났으나, 오히려 노동조합과 사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당할 것을 우려해서 논란을 벌인 끝에, 사민당과 노조는 정부와의 연정을 거부했고, 이 상태에서 술라이혀 정부는 출범하였다(Braunthal, 1956).

  1932-33년 초에는 실업율이 40%에 육박 (안병직, 2002: 227).  특히 청소년들의 실업율, 도시지역의 실업율이 높았다실업율과 나치의 등장은 관계가 있으나, 직접적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율이 높은 지역은 공산당이 강세.... 공산당원의 80%이상이 실업자들. 일부는 나치의 친위대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민당의 지지세력은 취업노동자들 (안병직, 2002: 233). 실업자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원자화되었다 (안병직, 2002: 235).  나치의 지지세력은 실업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소규모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농촌의 농업노동자, 혹은 철도나 우편 등 공공부문에 취업한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대도시나 공업화된 지역보다는 농촌이나 지방 중소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병직, 2002: 239).

  (4) 히틀러시기: 대부분의 일반 당원이나 노조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또한 히틀러의 등장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조직하라, 그러나 시위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131일자 노조의 결정에는 새로운 히틀러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하려고 한다고 정하였다. 2월중 까지만 해도, 노조는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으로 결정하였다. 3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폭력을 앞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봉급생활자 노조에서는 정치적인 결정의 영향은 노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10일 후에 개최된 ADGB 노조도 역시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공식적인 결정이후에 지방 노조의 소식지들은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견해의 표현을 자제하고 경제적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는 노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노조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못했다. 노조의 신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기에 이들 소식지들도 논조에 조심스러워 했다. 이어서 히틀러 정부는 공장 내 평의회에서 ADGB구성원들을 몰아 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일부는 특히 전통적인 숙련 노동자들은 나치와 협력하려고 했다. 노조는 나치의 대표자와 회담을 통해 입장을 드러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328일에 AFA 노조는 정부에 새로운 노동자 조직 방침에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점증했다. 415일에 정부가 조직하는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노조는 노조원들 개인이게 일임한다는 선언하였다. 때로는 나치의 이념에 동조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전 기간을 통해 나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Braunthal, 1956).

  19333월에 실시된 종업원 평의회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해산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73.4%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나치가 내세운 공장세포 NSBO11.7%의 지지율을 보였다 (안병직, 2002: 240).

    참고문헌

안병직, 2002, “바이마르 시대의 노동계급과 노동운동,”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Gerard Braunthal, 1956,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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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노동정책

역사/1930- 2013. 3. 3. 15:43

(1) 전반적인 평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와 선동 가운데 특정 요소들, 예를 들어 독일에서의 지도자 원칙 (종업원에 대한 사업장 간부의 독재적 폭력사용), 인종차별주의 (타민족들에 대한 강제노역의 정당화), 민족공동체와 사이비 사회주의 (노동의 숭상, 노동업적의 강화, 생산투쟁), 국수주의 (군수산업 이윤, 군수산업에서의 노동강도의 강화) 등이 얼마만큼이나 착취계급의 직접적 이윤창출욕구에 부응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일차적으로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착취계급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가 아니라, 이들의 기본적인 정치적 이해에 상응하는 기능들 (맑시즘의 척결,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계급투쟁으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국수주의 타인종과 타민족을 향한 증오감의 고취, 전쟁과 식민지주의 예찬)을 떠 맡아야 한다” (Eichholz, 1980/1987: 331-32).

객관적인 소득 분배 데이터의 분석 결과, Jürgen Kuczynski, “파시즘 하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적대성은 독일의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또는 다른 민족의 어떤 역사에서보다도 더욱 신속하게 첨예화되었다” (Eichholz, 1980/1987: 346).

유일한 대안은 팽창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은 경기 부양에 앞서 배상금의 종식과 노동운동의 약화를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나치가 가져갔다. 대외 경제적 압력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노동운동이 대공황을 통하여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황에서 나치는 집권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치가 권좌에 올랐을 때, 경제는 이미 최저점을 지나 회복세로 돌아선 뒤였다” (김학이, 2002: 180).

(2) 나치 집권 직전

19321월에는 실업자가 6백만 명이 등록되었다.

대공황은 전체 독일인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마저도 앗아갔던 것이다” (김학이, 2002: 178).

(3)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취해진 조치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에 의해 달성한 모든 성취물들을 무효화 시킨 파시스트 법률들은 이미 히틀러 독재의 초기 몇 달 안으로, 극히 반동적인 독일 독점자본 세력들의 결정적 참여와 직접적인 영향아래서 생겨났다” (Eichholz, 1980/1987: 338).

독일 산업전국연맹의장, Gustav Krupp, 1933220, “이제야 말로 독일에서 내정 문제들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시이다”.  19333월 독일 산업전국연맹, “새로운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은 노동조합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야 비로소 착수될 수 있다

3-4, 자유노동조합과 경영협의회에 대한 테러의 물결

44, 경영대변과 경제적 연합에 대한 법: 이 법에 의하면 경영협의회 선거는 1933930일까지 중지될 수 있었고, 국가적대적 또는 경제적대적인 의미헤어 설치되어 있는 경영협의회들을 해산하고 새로운 친정부적 경영협의회로 대체하기 위한 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Eichholz, 1980/1987: 339).

52, 나치돌격대 (SA), 나치친위대 (SS)에 의한 노동조합 건물의 점거, 자유노동조합의 해체 및 그 재산의 압수

510, 독일 노동전선 Deutschen Arbeits-front DAF 이 창립

519, 노동의 신탁에 관한 법

193397일의 괴델러의 진정서, “경제는 의미없는 임금협약들의 사슬로부터 드디어 최종적으로 해방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고, 8시간 노동일이 철폐되는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1-42).

  (4) 1934년 노동질서법

  1934112, 제국 경제장관 Kurt Schmitt, “법 초안은 이제는 경제계에 있어서도 지도자 원칙을 고착시키고, 계급투쟁의 사고들을 제거하며, 이 계급투쟁의 자리에 공동체의 사고를 대체시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명예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할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2).

1934120, 노동질서에 관한 국민법 (AOG): 이 법의 주요한 개념적 기초들, 특히 업적 공동체로서의 사업장 공동체의 이념에 따르면, 이곳에서 착취와 계급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도자(기업가)와 추종자(노동자)가 공동체적으로 작용하고 상호간에 의지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념들은 이미 20년대에 지도적인 콘체른들, 특히 Siemens 콘체른, 강철산업 연합회의 ... 등이 개발하였다” (Eichholz, 1980/1987: 341).

191811월 혁명의 결과인 경영협의회를 완전히 제거하고, 신임협의회를 도입 => 그러나 이 제도는 1934년과 35년 선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불참, 만은 수의 무효표, 반대투표, 적대자 명단의 나열 등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패배하였다.

  망명 사민당 Sopade의 독일 정세 보고서, 1934626,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집권자에 대한 불만 표출을 자제하고 있다” (김학이, 2002: 139).

19341030, “낙관주의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전례없이 격렬하였던 정치적 갈등 뒤에 찾아온 안정은 신뢰를 강화하고 있다. 기업가들은 노조를 괴멸시킨 정권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용창출에 기꺼이 협조하고, 노동자들은 과거 같았으면 용납하지 않았을 임금 삭감을 감내하고 있으며, 관리들 역시 사실적인 의구심을 옆으로 치워놓고 있다. 당장은 거대한 실험이 성공한 듯 보인다. 220만 명이 일자리와 빵을 되찾았다고 한다“ (김학이, 2002: 139).

  참고문헌

김학이,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오인석 편, [바이마르 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Dietrich Eichholz, 1980/1987, “Faschismus und Ökonomie zur Problemen der Entwicklung der Produktionsverhältnisse unter der faschistischen Diktatur” “파시즘 체제하의 경제 독일의 경우”,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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