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노동정책

역사/1930- 2013. 3. 3. 15:43

(1) 전반적인 평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와 선동 가운데 특정 요소들, 예를 들어 독일에서의 지도자 원칙 (종업원에 대한 사업장 간부의 독재적 폭력사용), 인종차별주의 (타민족들에 대한 강제노역의 정당화), 민족공동체와 사이비 사회주의 (노동의 숭상, 노동업적의 강화, 생산투쟁), 국수주의 (군수산업 이윤, 군수산업에서의 노동강도의 강화) 등이 얼마만큼이나 착취계급의 직접적 이윤창출욕구에 부응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일차적으로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착취계급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가 아니라, 이들의 기본적인 정치적 이해에 상응하는 기능들 (맑시즘의 척결,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계급투쟁으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국수주의 타인종과 타민족을 향한 증오감의 고취, 전쟁과 식민지주의 예찬)을 떠 맡아야 한다” (Eichholz, 1980/1987: 331-32).

객관적인 소득 분배 데이터의 분석 결과, Jürgen Kuczynski, “파시즘 하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적대성은 독일의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또는 다른 민족의 어떤 역사에서보다도 더욱 신속하게 첨예화되었다” (Eichholz, 1980/1987: 346).

유일한 대안은 팽창적인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은 경기 부양에 앞서 배상금의 종식과 노동운동의 약화를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나치가 가져갔다. 대외 경제적 압력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노동운동이 대공황을 통하여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황에서 나치는 집권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치가 권좌에 올랐을 때, 경제는 이미 최저점을 지나 회복세로 돌아선 뒤였다” (김학이, 2002: 180).

(2) 나치 집권 직전

19321월에는 실업자가 6백만 명이 등록되었다.

대공황은 전체 독일인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마저도 앗아갔던 것이다” (김학이, 2002: 178).

(3)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취해진 조치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이 투쟁에 의해 달성한 모든 성취물들을 무효화 시킨 파시스트 법률들은 이미 히틀러 독재의 초기 몇 달 안으로, 극히 반동적인 독일 독점자본 세력들의 결정적 참여와 직접적인 영향아래서 생겨났다” (Eichholz, 1980/1987: 338).

독일 산업전국연맹의장, Gustav Krupp, 1933220, “이제야 말로 독일에서 내정 문제들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시이다”.  19333월 독일 산업전국연맹, “새로운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은 노동조합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야 비로소 착수될 수 있다

3-4, 자유노동조합과 경영협의회에 대한 테러의 물결

44, 경영대변과 경제적 연합에 대한 법: 이 법에 의하면 경영협의회 선거는 1933930일까지 중지될 수 있었고, 국가적대적 또는 경제적대적인 의미헤어 설치되어 있는 경영협의회들을 해산하고 새로운 친정부적 경영협의회로 대체하기 위한 법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Eichholz, 1980/1987: 339).

52, 나치돌격대 (SA), 나치친위대 (SS)에 의한 노동조합 건물의 점거, 자유노동조합의 해체 및 그 재산의 압수

510, 독일 노동전선 Deutschen Arbeits-front DAF 이 창립

519, 노동의 신탁에 관한 법

193397일의 괴델러의 진정서, “경제는 의미없는 임금협약들의 사슬로부터 드디어 최종적으로 해방되어야만 한다”.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고, 8시간 노동일이 철폐되는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1-42).

  (4) 1934년 노동질서법

  1934112, 제국 경제장관 Kurt Schmitt, “법 초안은 이제는 경제계에 있어서도 지도자 원칙을 고착시키고, 계급투쟁의 사고들을 제거하며, 이 계급투쟁의 자리에 공동체의 사고를 대체시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명예의 개념을 최초로 확립할 것이다” (Eichholz, 1980/1987: 342).

1934120, 노동질서에 관한 국민법 (AOG): 이 법의 주요한 개념적 기초들, 특히 업적 공동체로서의 사업장 공동체의 이념에 따르면, 이곳에서 착취와 계급투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지도자(기업가)와 추종자(노동자)가 공동체적으로 작용하고 상호간에 의지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념들은 이미 20년대에 지도적인 콘체른들, 특히 Siemens 콘체른, 강철산업 연합회의 ... 등이 개발하였다” (Eichholz, 1980/1987: 341).

191811월 혁명의 결과인 경영협의회를 완전히 제거하고, 신임협의회를 도입 => 그러나 이 제도는 1934년과 35년 선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불참, 만은 수의 무효표, 반대투표, 적대자 명단의 나열 등에 의해 파시스트들이 패배하였다.

  망명 사민당 Sopade의 독일 정세 보고서, 1934626,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 때문에 집권자에 대한 불만 표출을 자제하고 있다” (김학이, 2002: 139).

19341030, “낙관주의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전례없이 격렬하였던 정치적 갈등 뒤에 찾아온 안정은 신뢰를 강화하고 있다. 기업가들은 노조를 괴멸시킨 정권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용창출에 기꺼이 협조하고, 노동자들은 과거 같았으면 용납하지 않았을 임금 삭감을 감내하고 있으며, 관리들 역시 사실적인 의구심을 옆으로 치워놓고 있다. 당장은 거대한 실험이 성공한 듯 보인다. 220만 명이 일자리와 빵을 되찾았다고 한다“ (김학이, 2002: 139).

  참고문헌

김학이,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오인석 편, [바이마르 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Dietrich Eichholz, 1980/1987, “Faschismus und Ökonomie zur Problemen der Entwicklung der Produktionsverhältnisse unter der faschistischen Diktatur” “파시즘 체제하의 경제 독일의 경우”, 김세균 편역,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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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이마르 공화시기 지식인들의 전체주의적 성향

역사/1930- 2013. 3. 2. 15:47

 1.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762항목, “유럽의 민주주의가 힘의 해방이라고는 조금도 말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나태함의 , 피로의, 약함의 해방이다” (Nietzsche, 1880년대/1988: 445).

 모든 민족의 머리 위에는, 모든 선의 표적이 걸려 있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 민족이 극복한 것들의 표적이다. 보라! 이것이야말로 그의 권력에의 의지가 지르는 소리이다” ( Nietzsche, 1885/2010: 79).

 니체의 비이성주의는 결국 범 게르만주의와 히틀러 스타일의 인종주의로 귀결되었다. 비이성주의는 이시기의 독일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 독일의 철학과 사상이 제공하였던 인간의 약한 측면에 피난처를 제공하였던 그 근거를 없앴다....이러한 비이성적 본능의 강조 등은 결국 히틀러의 제삼 제국 시기에 독일 신념 운동에서 다시 등장한다....“더구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이데올로기는 미래의 나치들에게 일단 니체의 뜻이 오해되고, 곡해되고, 그리고 진실된 의미가 뒤틀려지자, 나치의 독트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Vermeil, 1956: 18).

 2. 1924-1929년의 기회와 좌절

 1924-29년의 황금기 (6년간):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 시기는 독일이 정상적이었다고 판단하지만, 실은 이시기에 이미 후기 독일의 모습이 잉태되고 있었다” (Taylor, 1946).

 1926힌덴 부르구의 당선은 독일 국민이 의원내각제적 정부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전쟁전의 권위주의적 정부가 제공하던 안락한 안전으로 도피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니콜스, 1977/1980: 140).

 슈트레제만은 가장 중요한 국경협상을 東歐의 프랑스 맹방들 (특히 폴란드와 체코)를 제외시킨 채 마음에 드는 서방국가들에 국한시켜 진행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4대 강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협의하여 유럽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개념이 1938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악명높은 뮌헨의 배신에서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의 사건들을 예고해 주는 전조였다” (니콜스, 1977/1980: 133). 1926년에 슈트레제만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정당을 통해 구체적인 이익이 표현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며,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이러한 부분적 목표가 정치적 리더쉽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공화국 정부가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면 사전에 연립정당간의 타협과 협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가 의회를 무시해버리지 않는 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니콜스, 1977/1980: 148).

 1928년 가을, “독일 국가민족당의 정책은 이제 공화국에 대한 거칠고 무제한적인 반대로 굳혀졌다” (니콜스, 1977/1980: 150).

 3. 독일 지식인의 전체주의적 경향

 프랑스에서 새로운 정치적 및 문화적 가치를 대변하면서 등장한 사람들이 주로 보수적 이념과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독일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일군의 문명비평가 내지 사회비판가들은 교육시민 계층출신으로 빌헬름 제국의 주도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111).

 대학의 경우 역시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바이마르 체제를 경멸했다. 2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보다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로 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니콜스, 1977/1980: 147).

 4. 19331월 히틀러의 등장

 히틀러에게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이 오랫동안 지체된 셈이었다. 이 지체는 독일인들 원망의 비극적 비상치성(하나로 일관성있게 묶을 수 있는 끈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부유하고 (떠돌아 다니고) 무책임한 젊고, 폭력적인 자들이 허가받은 깡패로서의 기회를 쟁취하였다” (Taylor, 1946: 25).

 독일인들은 절망의 마지막 순간에 민족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혼란에 협박을 받아서 그들의 높은 철학적 사유의 능력과 전통을 놓치게 된다. 독일의 가장 훌륭한 전통으로 추앙받던 것이 이제 전체주의적 지배의 도구로 변하게 되었다( Anderson, 1949).

 참고문헌

박용희, 2002,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식인과 정치문화”,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Eugene N. Anderson, 1949, The Struggle for Democracy in Germany, Chapel Hill,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A. J. 니콜스, 1977/1980, [바이마르 공화국과 히틀러], 과학과 인간사

Friedrich Nietzsche, 1880년대, [Der Wille zur Macht 권력에의 의지], 청하, 1988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85/201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ura], 누멘

A.J.P. Taylor, 1946, The Course of German History: A Survey of the Development of Germany since 1815, New York, Coward-McCann

Edmond Vermeil, 1956, Germany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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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군단과 재향군인회

역사/1930- 2013. 2. 26. 14:35

 

밤에는 야경꾼이 돌고, 마을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위대가 구성되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외세가 침입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섰다. 따라서 국가가 조직한 군대 외에도 역사적으로 민간이 조직한 군사조직은 항상 존재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독일의 경우에 프러시아에 17세기부터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국가외 조직이 존재했었다, 특히 국가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나폴레옹에 의한 해방전쟁 시기에 애국적으로 마을을 지키려는 의용자위대가 조직되었고, 이는 국가에서 칭찬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참전장교와 사병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자유군단이 조직되었다. 자유란 아마도,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자율적인 군대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미 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말미암아, 베르사이유 협약에 의거하여 국민 징병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유군단의 이름으로 1차 대전 후에도 수십만명 (혹자는 백만명 단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40-50만 명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이 속해있었고, 이들의 규모는 정규군이 10만 명으로 제한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숫자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국가의 위기시에 심지어, 히틀러의 등장과 같은 시기에도, 오히려 정부의 정규군이 히틀러의 돌격대와 자위대에 눌러 있을 정도였다고 보면된다. 히틀러의 돌격대와 보위대는 자유군단 출신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이들 자유군단은 무슨 일을 하였고, 어떻게 재정을 충당하였는가? 자유 군단은 겉으로만 보면, 국가적인 수준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괴하고, 프랑스가 배상금의 불이행을 근거로 라인지역을 점령하자, 파업을 선동하고, 폴란드 지역에서 전위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신문 광고를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용병으로 고용할 수있다고 광고도 하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의 경찰이나 군인이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마치 직업군인처럼, 급여를 받고, 추가적인 보너스도 충분히 받고, 연금혜택까지 받았다. 이들의 수요는 국가적인 수요를 빙자하여 사업적인 수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군단과 이들이 히틀러의 등장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자동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또 다른 연구 대상이다. 이에 대해 J.J. Schokking, 1955, “Militarism in Berman Society”는 국민 징병제의 등장이 상비군 제체와는 다른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상비군의 폐쇄성을 혁파하여, 상비군이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뭉쳐있는 상황을 완화시킨 반면에, 국민 개병제는 국민들의 심리나 행동방식 속에 군사주의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킨 면을 강조하다. 이렇게 확산된 결과 그들의 확신은 단순한 충성심을 넘어서서,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John L. Snell ed., 1959: 60). 구체적으로 가장 민감한 청춘의 시기에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특유의 사나이의 특성을 갖게되었다. 또한 군대에서 맺은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었고, 이는 민주적인 질서로 재편하는데 장애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호의군대화가 진행되어서, 전쟁에서의 패배나 내부로부터의 혁명과 같은 방식이 아니면 이것이 타파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에,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바이마르 제국을 끝장낸 노동자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바이마르 민주주의 체제가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독일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체제도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Schokking은 바이마르 체제에서의 자유군단과 히틀러가 자유군단과 독일인들의 군사주의적 성향을 이용한 것은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는 너무 히틀러가 시대에 대해 완벽하게 독일사회를 이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독일의 군대사회적 성격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도 군사조직에서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사실상의 군사훈련을 민간 항공사, 민간 항공기 제조의 제조를 진행하였고, 또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훈련도 진행했다. 그리고 민간 군사조직이 정규군에 비해 적어도 4-5배 이상이 존재하였기에 쉽사리 군대로 재편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더해, 군사전략이나 새로운 군사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능숙하게 대해 전격전을 활용한 점도 히틀러의 대담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은 공수부대의 활용, 전차군단과 통신장비를 활용한 적군의 종심을 관통하는 전격전, 전략에서 후방과 전략적 거점을 상공을 통해 장악하여 심리적으로 상대방의 저항의지를 초기에 꺾어 버린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도 히틀러의 전쟁을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헌신적으로 지지하였는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다. 상당수의 해석에서는 외부의 과격함 (볼세비키)을 싫어하였기에, 내부의 과격함(히틀러)을 선택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에 이미 미국에서는 전쟁에 게임 논리를 도입하여 전략게임을 랜드연구소를 통하여 개발하고 있었다. 독일의 병력자원, 무기자원, 국민들의 사기, 전반적인 경제능력 등은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팽창해져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전쟁 후기로 접어들면서 대담한 작전을 두려워 한다. 즉 수세로 몰리면서 대담성이 줄어들고, 그래서 초기에 나타난 독일군의 전격전은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Christopher Ailsby, 2001/2007, [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2차세계대전 최강 독일 공수부대의 신화], 프래닛 미디어

Gorden A. Craig, 1955, The Politics of the Prussian Army, 1640-1945, Oxford, The Clarendon Press

Allan Shepperd, 1990/2006, [프랑스 1940: 2차 세계대전 최초의 대규모 전격전], 플래닛 미디어

Robert G. L. Waite, 1952, Vanguard of Nazism: The Free Corps Movement in Postwar Germany, Cambridge, Mass.: The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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