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역사/BC 2013. 10. 5. 14:15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현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낭만적 민주주의였다고 평가할 수있다.  아마도 유권자 3만명 정도의 도시 (실제 거주인구는 15-20만명의 정도), 그리고 실제 집회에 참석하는 인구는 6천-8천명 정도였다고 추정하고있다.  대개 약 170년 정도 지속했을 것으로 예측한다.  직접 민주주의는 세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민회 assembly에 참여하여 토론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들을 대표하는 council을 선출하는 것인데, 이는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첨에 의해 선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재판에서의 배심원인데, 이것 역시 추첨에 의해 선발되었다.  이중 assembly의 실제 운영방식을 살펴보면,

Josiah Ober, 1993, "Public Speech and the Power of the People in Democratic Athens", PS: Political Science & Politics, September: 481-485에 의거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의 기록은 약 150건의 직접민주주의 때 발언한 내용이 전해내려온다.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있다.

민회는 (시민모임)는 매년 40회정도 모였다. 모임은 7일전에 예고되고, 대개 반나절이 걸렸다. 모든 시민에게 공개된다. 아마도 3만여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개는 6천-8천명이 참석한다. 일찍 온 사람들에게는 하루 일당이 주어진다. 매 모임의 안건은 미리 500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council에서 결정된다. 이들 council 구성원들은 추첨에 의해 연간 복무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들 council은 안건에 대해 추천하는 답을 내놓기도 한다.

집회에는 대개 20-25%정도가 참여하지만, 사실상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사전에 발언하는 사람들이 당일에 예상되는 사람이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석하기에 특정 계층이 과잉대표되거나 과소대표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당일 회의의 사회는 하루동안만 하게되며, 이는 추첨에 의해 선출된다. 의장은 당일의 안건의 순서를 정하여 공지한다. 만일 안건에 대한 council의 추천이 있다면 공지하고, 의견을 구한다. 누구나 발언할 권리가 있으며, 이때 반대의견, 수정의견, 완전히 새로운 안건으로 제안할 수 있다. 이는 동료 참석원들이 이들의 발언을 들어 주는 한에서 이루어 진다. 구성원들이 발언자의 발언에 대해 지루하면, 소리를 질러 내려오게한다.

발언자들이 모두 발언이 끝나면, 손을 들어 찬반을 묻게 된다. 단순다수결로 결정하고, 이것이 끝나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아테네 사람들은 중요한 안건을 결정한다. 외교문제, 세금징수 등. 실제로 이 집회에서 제안되고 채택된 법률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김봉률, 2011, [어두운 그리스 - 사유와 젠더, 민주정의 기원] (경성대출판부)이 하고있다.  두가지이다.  하나는 이들의 민주주의가 결국은 전쟁을 위한 민주주의였다는 점, 그리고 추첨제에 의한 council구성은 실은 민중의 권력이 선출직 장군에게 옮아가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책을 읽은 것이 아니고, 교수신문에 저자가 쓴 서평을 읽고 옮긴다.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주도했다는 걸 알면서 그 침략전쟁을 치고 나간 주체인 민회가 민주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정과 추첨제, 토론과 자유가 이 전쟁에 복무하도록 결국 짜여졌다면? ...노예사냥, 약탈, 여성지배, 무역이 목적이었던, 풍요로웠던 고대 아테네를 지배했던 전쟁은 그 자유의 절정이었다...페리클레스 시대 민회는 페르시아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언어, 같은 신화를 지닌 헬라스 도시국가의 자유를 빼앗기 위한 전쟁에 골몰한다"

이에 대해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실은 전쟁에 인민의 노력(귀족의 군대에서 민중의 군대인 보병, 다양한 계층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성공적인 운영이 가능한 해군의 전함 운영)을 동원하고, 재산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에 대해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전쟁은 항상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도 하였고, 발전시키기도 한 역사를 상기하려고 한다.  즉 외부의 위협에 맞서 민주주의는 대개 단일의 전제자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또한 전쟁은 대중의 호응을 얻고, 희생을 요구하여야 하기에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촉진시킨다는 두가지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만 지적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를 논한 사람들은 직접 민주주의는 자신들이 의회의 안건만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법의 집행 앞에서 인민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기에 인심을 얻기 위해 부를 분배하고, 명예와 덕을 쌓으려고 노력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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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의 원인

역사/20세기 2013. 9. 30. 13:41

한계레 21 (979호) 2013. 9. 30일자 pp.32-33에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 실렸다. 이중 기사의 제목으로 나온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 당선을 위한 것?"이란 제목이 실리고, 글이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고 서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은주 기자는 "실제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한 행위였고, 이승만 당선시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관권선거 (마산에서는 경찰이 주요역할, 전국적으로는 자유당과 방계국민운동조직, 반공쳥년단과 같은 깡패조직, 부수적으로 교사, 공무원을 동원), 북한이 당시에 저지른다고 비판한 3, 6, 9인조 집단 내부 감시선거 (투표함에서 기표시, 상호 보여주고 조장에게 확인을 받은 후에 함에 넣는다), 반대자들에게 투표권 주지 않기, 야당참관인 몰아내기, 기자들 취재 금지, 사전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는 것, 반대표 무효표로 만들기, 개표시에 바꿔넣기 등을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선거 관행은 오랜 기간, 아니 지금도 관권선거개입이 하나의 한국 정치의 관행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정보기관의 선거개입 여부에 대한 논쟁도 사실 여기에 기인한다.  당시에도 야당을 지지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아부쳤고, 이번 선거에서 국정원의 심리 전단 소속 직원들의 활동은 주로 여기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반대자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는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 자체를 무효선언을 하였고, 이승만은 망명 길을, 이기붕 일가는 가족 모두 자살(장자이자 이승만의 양자가 쏜 권총으로 죽었다), 당시 주동자인 내무부장관과 깡패 조직의 수괴들은 나중에 사형에 처해진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 꽃을 피우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영국의 한 기자가 한국의 정치를 평하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을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1960년 학생들 (애초에는 고교생들, 후에[ 대학생들 합류, 당시 대학생은 4월 1일에 개학하여 늦게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소생시켰던 것이다.

당시에 이기붕은 이미 만으로 84세에 달하여 일설에 따르면, 50년대 중반부터는 사실상 대통령 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기붕이 장악하였다는 말도 나돈다.  아무튼 이승만은 영웅, 신격화하여, 동상을 세우고, 영화를 만들고, 정자가 세워지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보안법 통과,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등으로 폭압정치로 나아가고 있었다.  위의 문장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은 이승만 역시, 당시의 사람들이 평가할 때에도 스스로의 당선을 위해서는 이미 유력 경쟁자인 조병옥이 사망하여 궐위상태이므로, 그렇게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밀어부친 점이다.  당시는 대통령과 부통령선거가 분리되어 있어서, 정은주 기자가 표현한 것처럼, 대통령이 당선되면,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의 선거에는 부정이 없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만 부정이 있었다는 것도 틀린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 정부내에서 부정선거가 기획되었고, 그리고 1960년 만이 아니라, 이미 1960년의 보궐선거나 이전 선거에서도 부정이 자행되었었다.  그리고 자신도 부정선거의 덕으로 4선에 당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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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린 씨앗을 거두고 있다.

시사 2013. 9. 25. 12:55

시리아 사태의 역사를 탐색해 들어가면, 결국 강대국 정치의 모습이 들어난다.  1차대전을 기점으로 오스민 터키가 망하고, 이를 시리아와 레바논을 불란서가 위임통치하고, 다른 부분 즉 사우디를 포함해 동쪽의 지역을 영국이 지배한다.  이들의 지배 정책은 편의 상 지배이므로, 민족이나, 종교, 언어, 또는 민의와 무관한 행정 편의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충실한 지배 정책을 채택한다.  이때 채택된 정책은 대부분, 종교, 민족, 문화적 균령을 배경으로 상호 분열과 상호대립을 조장하고, 절대로 하나의 세력을 중심으로 통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다.  2차대전후에 레바논은 결국 권력을 3개의 종파가 균점하고, 시리아로부터 떼어낸다. 이는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직접대결의 장으로 변하지 않고,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시리아의 대통령은 소수민족 대표이자(인구의 12%정도를 차지), 외부에서는 시아파로 분류되나, 자신의 독자적인 종료를 갖는 종파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시아파를 이루고 있는 이란과 그리고 이락 남부 지역과 연결된 것을 이해되나 실상은 다른 종파라는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가 시리아의 군대에 주력으로 키운 세력이다.  소수민족을 군사력의 주력으로 키워놓고 이들인 결국은 시리아 정부를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펴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사회당 소속이다.  외교전에는 내부적인 이념보다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것 같다.  시리아의 현대통령은 사실상 프랑스의 비호아래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프랑스 정권과 멀리지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아마도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이익도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시리아는 상대적으로 아랍제국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하고, 따라서 아랍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의 행태를 보면, 아프리카의 사태에도 종종 개입하는 것을 본다. 즉 개별 국가 차원에서 양자간의 차원에서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대개는 식민지 시설 종주국의 입장에서 개입한다.  일본이 오염된 수산물을 한국이 금지시키자, 이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대만에 대해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면서.  아마도 과거 식민지 종주국의 입장에서 손을 보려는 것 같은 인상이다. 프랑스가 현재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에 개입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리고 이락에서 바로 자신들이 세운 정권에 의해 스스로 공격을 당하고 있듯이.  아마도 시리아에서도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익이 민중의 이익과 다를 때 생기는 문제가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불거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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