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일본인 소년이 목격한 마산 3.1운동

역사/1900-1919 2013. 9. 11. 17:42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사학자], 지식산업사에는 1908년에 신마산지역에서 태어나 마산 3.1운동을 목격한 진술담이 실려있다. 이는 물론 하타다다카시가 말년에 회고록에 나온 기록을 원용한 것이다.

"소학교 때의 일이다. 하타다 소년은 구마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신마산 장군천 다리 근방에서 우연히 삼일운동의 독립만세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320, 25, 30일 즉 5일장이 서는 날을 이용해 시위행진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구마산시장에 집합해 신마산에 있는 府廳警察署 등 관청을 향해 행진해 갔다. 일본군대와 경찰은 신마산 입구의 다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작접에 나섰고, 90여명 이상의 조선인을 체포하였다.

하타다는 노년에 당시의 일을 글로 적었다. 그에 따르면 우연히 맞닥뜨린 시위에는 조선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과 어린 여자까지 합세해 만세를 부르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났지만, 그들은 어떠한 가해 행위도 없었고, 다만 귀가를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때 경찰들이 몰려와 시위대를 둘러싼 뒤 곤봉으로 마구때렸다. 시위가 있은 뒤 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구속되었다. 경찰서는 신마산 시가의 변두리에 있었다. 일본 아이들은 경찰서 주변에 모여, 조선인들이 연행되어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행되어온 조선인들은 구치소에 다 넣을 수 없게 되자, 경찰은 경찰서 안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철조망을 치고 그 안에 조선인을 몰아 넣었다. 그걸 본 하타다는 어린 마음에 비가 오면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하타다 소년은 조선인이 남녀 모두가 시위하고, 더욱이 자신과 동년배인 아이들까지 시위 행렬에 참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에 아무말도 못하던 조선인들, 특히 노인과 아이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가 자신이나 일본인들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경찰이 몰려와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모습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42-43).

저자는 마산 3.1운동이 20, 25, 30일에 발생한 것으로기록하였으나,실제로는 21, 26, 31일에 발생한 것으로 자료를 통해 논증되었다 (남부희, 1997, "마산 창원지역의 3.1운동 성격", 한국민족운동사 연구, 15; 김봉렬, 2002, "마산의 3.1운동", 경대사론, 12/13호).

기록에 따르면, 3차례시위가 모두 구마산 정기시장날을 이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타다 다카시가 3차 시위중 어느 시위를 목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체로 3차례 시위에 대해 각각의 격렬성, 폭력성의 정도는 다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차 시위 - "구마산장날 장터는 시위참가자를 비롯하여 장으 ㄹ보려고 나온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볐다.  시위주동자들은 보부상으로 가장한 김익열에의해 시장에 들여온 태극기를 독립선언서와 함께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들은 정오 경 마산발 삼랑진행 열차의 기적소리를 신호로일제히 태극기를흔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이어지자 주위의 행인들도 가담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3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마산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15천여명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3천여명은 거의 전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짐작한다.  평화적 만세시위에 대해 일제는 처음부터 강압적 폭력적 방법의 진압으로 일관하였다.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며, 단시간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자, 마산주재 일본군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총검을 앞세워 시위대를 무차별 탄압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 해군 경비대의 군함 조무호를 마산포로 출진시켜 전투태세를 방불케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동인물 50여명이 마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2)

2차시위 -  "오후 2시경 구마산장터에 모인 군중은 앞서 제 1차 구마산장날 시위에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가두로 진출하였다.  시위행렬이 북마산파출소를 지나 마산형무소로 나아가며 시위군중은 3천여명으로 극격히 불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에 비하여, 그 정도가 좀더 격렬해졌다.  일부 과격시위자들은 마산형무소까지 쳐들어가 수감된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외칠정도였다.  시위군중의 확산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을 급파하고, 마산 가포동의 육군 중포병대대 병력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무장 군경의 무차별 진압속에 이날 시위에서도 주동자 14명이 체포 연행되었다" (김봉렬, 2002: 183).

3차시위 - "3차의거인 3월 31일, 구마산 일대에서 약 2천여명의 군중이 2시간에 걸쳐 만세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때 일경은 물론 日軍 중포병대대원까지 동원하여 탄압함으로써 이날의 의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03).  이 기록은 앞선 2차 의거시에도 군까지 동원하였다고 나오므로, 2, 3차 모두 군인이 동원된 것으로 이해된다.  "구마산장날 시위에는 약 2,5백여명의 군중들이 참가하였으나, 시위의 정도는 1, 2차에 비해 더욱 격렬해 지고있었다.  시위군중들은 마산 형무소로 진출하여, 애국지사들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특히 이날 시위에는 형무소 간수까지 참여하였다.  시위군중의 만세함성에 흥분한 한국인 간수 박광연이 제복을 벗고, 시위대속으로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형무소간수까지 시위군중에 합세하자, 시위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만세시위가 절정에 이를 즈음, 진압을 위해 예외없이 무장 일군경이 출동하였다.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또 다시 시위군중 20여명을 연행하였다" (김봉렬, 2002: 183-84).

하타다의 기록과 논문들의 기록을 비교하면, 하타다는 형무소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마산 장터에서 신마산의 부청과 경찰서를 향하여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를 장군천 다리에 저지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약 90명이 연행되었다고 하여,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2, 3차의거는 주로 1차 의거나, 앞선 의거에서 구속된 인사들을 석방하라는 것이 주요요구중에 하나였고, 2, 3차 의거는 1차 의거에 비해 적은 숫자가 연행되었다고 논문들에서는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한 하타다의 목격에는 경찰 만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경찰과 군인이 동시에 출동한 2, 3차의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하타다는 1차의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서와 부청은 모두 신마산의 현재 경남대 평생교육원, 경남종합사회복지관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의 현 파출소로 추정되기에 그렇다.

폭력성에 대해서는 남부희는 적었다고 표현하였고, 김봉렬은 더욱 심해졌다고 표현하나 모두, 1차 시위에서는 격렬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있다.  따라서 하타다 다카시는 1차의 거를 목격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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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의사와 그의 아들의 삶

역사/1900-1919 2013. 9. 11. 16:23

고길희, 2005, [하타다 다카시,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지식산업에 1910년대의 마산에서 살은 일본인의 체험 기록이 나온다.  "하타다 다카시는 190811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1921년 마산소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중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기까지 약 17년 동안을 조선에서 생활한 재조일본인 2이다" (25).

"개항한 1898년에는 마산 근교를 포함하여 일본인 이민자 수는 103, 1900년 마산포 사건을 전후하여 3백명으로 증가하고, 러일전쟁 뒤인 1905년이후에는 2천명으로 급증하고, 하타다가 태어난 1908년에는 3,687명에 이르렀다....1912년 당시 마산의 이민자들의 일본 지역 출신지역은, 혼슈(本州)의 야마구치(山口), 히로시마(廣島) ,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현에 이어 에히메(愛媛) 현과 함께 오카야마 현이 6위로 7백명의 이민자 수를 보여주고 있다 (32).  출처: 朴宗根, 1995, “旗田巍先生馬山”, 旗田巍先生追悼集刊行會, [追悼 旗田巍先生]: 140-141).  오카야마 현의 사람들은 통영 현재 도남동 관광단지 입구에 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준 외, 2007, "경남 통영 강산촌의 형성과정과 주택변용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회계, 23권 8호 (통권 226호), 8월호를 참조하시오.

"1906년에 의사였던 하타다의 부친이 오카야마 현(岡山縣)에서 마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이주 동기는 하타다의 조부가 경영하던 주점 (酒店, 사카야)가 망하자, 조선이란 신천지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하타다의 부친 하타다 가네타로 (旗田兼太郞)가 마산으로 이주했다" (하타다의 누이인 하타다 게이코 旗田惠子의 증언) (31).  1911년 마산에 있던 빈전 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일문)에는 마산에 당시 8명의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정도, 2011. 8. 8, 100in.com에 올라온 것).  이때에는 이미 마산병원이 자혜의원으로있었기도 한 시기라서 의사이름도 등장하고 있었다.  즉 김형윤, [마산야화]에 "1909년 신마산 마산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는 마에하라가 철도병원 위탁 산과를 경영했으며, 마산병원 도구가와는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로 쳐서 조선 총독부에 기증했다.  마산병원은 경남 자혜병원으로 됐다가, 경남 도립 병원으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월영초등학교 뒷편, 헌병대장이 살았다던 인근의 언덕 집에 [자혜병원 산부인과]라는 나무 팻말이 쓰러져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산부청이 1915년에 발간한 [마산안대](일문) 책자에는 마산병원이 마산중부 경찰서, 또는 월초등학교 동편 맞은 편으로 추정되어 확인이 필요하다 (조용호, 1999. 1. 25일자 경남신문).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당시에 하타다의 부친은 8명중 한면의 의사로서 근무했으며, 아마도 초기에는 개인 병원에서 근무하다, 후에 마산병원에 근무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 이유로는 마산병원의 역사가 더 밝혀져야하지만, 1908년생인 하타다가 초등학교 중간에 병원이 이전하여 이사하였다는 말이 나오기에 그렇다.  그러면 대강 1915-2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하카다의 생가는 일본인 거리가 급속히 발전한 러시아 영사관 동쪽 마산천 주변, 즉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의 경계에 있었다 (마산천은 현재 창원천이라 불리우는 제일각 옆, 제일여고의 연애 다리가 있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일본인과 조선인 거리의 경계라는 표현은 잘못,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근처는 본정으로 불리우던 곳이다 – 이은진 지적). 그곳에 살다가 하타다가 소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1915년경으로 추정, 이은진 추가), 그의 일가는 일본인 거리로부터 약 4-5킬러미터 떨어진 동쪽 지역으로 이사했다 (마산역까지는 직선 거리 6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따라서 걸어서 거리라고 하더라도 1킬로 미터 미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 이은진 추가). 1905년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마산선 철로를 부설하였는데, 마산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당시 일본인 거리가 러시아 영사관 주변 (현재의 월포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에서부터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집 주변에는 일본인 소학교 (월영 초등학교, 이은진 추가)와 관공서 (마산우체국, 이은진 추가)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하타다의 집도 醫院 건물을 세워 조금씩 넓혀 갔다" (35).  앞서 조용호 기자의 글에는 인근에 창원 군청이 있었고, 장군동에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34쪽에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 거리 사진이 게재 => 멀리 보이는 공장은 주류 공장 (창포 동성, 창포 한백 아파트로 추정, 그러나 사진 도로가 구부러진 방향이 현재의 도로 방향과 달라서 후에 허정도에게 문의해보아야 할 사항... 이은진 추가).

책을 읽다가 흥미로와서 적어 보았다.  최근에는 일제하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되었다.  필자의 메모에 성신대 김주희 교수가 쓴 박사학위 논문에 마산 가포지역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생활을 일본신문에서 기사화 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번 문의해 보아야겠다.  오늘 성신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주소가 불명하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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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등장과 노동계의 대응

역사/1930- 2013. 3. 4. 16:54

 

(1) 극단주의자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시민들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Braunthal, 1956).

  (2) 파펜 시기: 1932720일에 파펜은 연립정부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브라운을 물리친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입장과 비슷하게 당장의 실업문제가 심하므로, 미래에 문제가 심각하면 파업을 하겠지만, 현재는 유보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도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당장의 행동은 자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조합, 정당 그리고 철의 전선들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떠 보았다. 대개는 피의 숙청을 두려워하면서 부정적으로 응답하였다. 마찬가지로 철의 전선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일반 파업이 내전을 가져올 것이라며 주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이 나자, 곧 이어서 파업을 선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되돌이켜 보면, 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옳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는 노동조합과 사민당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바이마르 정권 기간 내내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aunthal, 1956). 어떤 의미를 가지건 간에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무행동의 결정은 후에 나치즘이 등장하는 데 저항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Braunthal, 1956).

  (3) 술라이혀 시기: 1932123일에 파펜정부를 승계한다. 술라이혀는 독일 장성들이 이끄는 노동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구상은 히틀러의 등장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직노동자들과 교섭에서 술라이혀는 장단기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술라이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대 노조인 ADGB와 만났으나, 오히려 노동조합과 사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당할 것을 우려해서 논란을 벌인 끝에, 사민당과 노조는 정부와의 연정을 거부했고, 이 상태에서 술라이혀 정부는 출범하였다(Braunthal, 1956).

  1932-33년 초에는 실업율이 40%에 육박 (안병직, 2002: 227).  특히 청소년들의 실업율, 도시지역의 실업율이 높았다실업율과 나치의 등장은 관계가 있으나, 직접적 지역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업율이 높은 지역은 공산당이 강세.... 공산당원의 80%이상이 실업자들. 일부는 나치의 친위대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민당의 지지세력은 취업노동자들 (안병직, 2002: 233). 실업자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원자화되었다 (안병직, 2002: 235).  나치의 지지세력은 실업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로 소규모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의 노동자들이거나 아니면, 농촌의 농업노동자, 혹은 철도나 우편 등 공공부문에 취업한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대도시나 공업화된 지역보다는 농촌이나 지방 중소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안병직, 2002: 239).

  (4) 히틀러시기: 대부분의 일반 당원이나 노조원들은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또한 히틀러의 등장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조직하라, 그러나 시위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131일자 노조의 결정에는 새로운 히틀러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하려고 한다고 정하였다. 2월중 까지만 해도, 노조는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에서도 중립을 지킬 것으로 결정하였다. 35일의 선거에서 나치가 폭력을 앞세워서 승리한 이후에도 봉급생활자 노조에서는 정치적인 결정의 영향은 노조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10일 후에 개최된 ADGB 노조도 역시 마찬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런 공식적인 결정이후에 지방 노조의 소식지들은 조합원들에게 정치적인 견해의 표현을 자제하고 경제적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치는 노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서 노조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못했다. 노조의 신문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기에 이들 소식지들도 논조에 조심스러워 했다. 이어서 히틀러 정부는 공장 내 평의회에서 ADGB구성원들을 몰아 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조합원들은 일치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일부는 특히 전통적인 숙련 노동자들은 나치와 협력하려고 했다. 노조는 나치의 대표자와 회담을 통해 입장을 드러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328일에 AFA 노조는 정부에 새로운 노동자 조직 방침에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정부의 노조에 대한 탄압은 점증했다. 415일에 정부가 조직하는 노동절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노조는 노조원들 개인이게 일임한다는 선언하였다. 때로는 나치의 이념에 동조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전 기간을 통해 나치에 저항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Braunthal, 1956).

  19333월에 실시된 종업원 평의회 선거에서 자유노조가 해산의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73.4%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나치가 내세운 공장세포 NSBO11.7%의 지지율을 보였다 (안병직, 2002: 240).

    참고문헌

안병직, 2002, “바이마르 시대의 노동계급과 노동운동,” 오인석 편, [바이마르공화국: 격동의 역사], 삼지원

Gerard Braunthal, 1956, “The German Free [Socialist] Trade Unions during the Rise of Nazism,”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XV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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