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39건

  1. 2009.06.12 관리의 학정에 백성은 일할 의욕을 잃는다
  2. 2009.06.11 서울과 19세기 파리
  3. 2009.06.11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4. 2009.04.08 금욕은 지배로 이어진다.
  5. 2009.04.07 차별사회와 시장경제
  6. 2009.04.06 조선시대에 객고를 푼 기록들
  7. 2009.04.06 조선후기의 대외관
  8. 2009.04.04 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9. 2009.04.04 왜 침을 뱉을까?
  10. 2009.04.04 1803년 진동의 사회세계

관리의 학정에 백성은 일할 의욕을 잃는다

역사/19세기 2009. 6. 12. 08:01
19세기 조선의 역사에서 외국인들이 조선을 바라보면서 지적한 가장 뼈아픈 것은 조선의 백성들이 가난하고, 일할 의욕이 없으며, 다른 한편 허식과 과시에만 힘을 쏟는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의 원인으로 관리들의 탐학을 지적한다. 관리들은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면, 빼았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빼앗는 방식은 세금, 징병과 노역, 그리고 물자를 빌려주고 되갚게하면서 막대한 이자를 물리는 방식이다.  그외에도 수령이 갖고 있는 사법권을 사용하여 인신구속과 고문을 자행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일할 의욕이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기회가 있다고 하여도 우선 이런 관리들과 결탁하려 돈을 벌려하거나, 즉 기생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돈을 버는 방법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논하면서 법에 의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막스 베버도 사회경제사에서 지적한 바 있다.  지금도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법의 공정한 집행, 공권력의 자의적인 집행이 없어야 인민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점차 우리나라가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지대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19세기 조선은 한편으로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자의적인 징세, 노역부과, 금전 수탈, 인신구속, 사법권을 주었으면서도, 대외적인 교섭의 권한은 철저히 막았다.  즉 대외적인 무역이나, 교섭이나, 바다를 이용하여 개척할 수있는 여지는 없앴던 것이다.  설사 개별 수령들은 외국과의 교섭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고종의 서울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막았으므로, 해양을 통한 개척에 소홀하였다.  관리들의 부패와 지방 수령들에게 해양교류를 중앙정부의 이름으로 막은 것은 일본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즉 일본은 관리들의 부패를 막았고, 비록 중앙정부는 해양과의 교류를 막았지만, 토쿠가와 막부가 지방 토호들의 해양 교류를 적극적으로 막거나, 그럴 힘을 갖고 있지 않아, 지방 토호들은 비교적 적ㄱ극적이고 활달하게 해양을 이용하여 교류를 확대하여 나갔다.  오늘의 우리도 지방분권을 강화하여 지방을 모아서 구성하고 있는 우리나라 전체의 활력을 살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방침이 시대적으로 제대로 방향으로 가지 않는 시대에는 더구나 다양하게 지방정부가 활동하여 미래에 대비하여야 한다.

조선은 해양세력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기 위해 해안가를 일부러 나무도 없고, 민가도 없고, 황폐하게 보이려고 시도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매우 무모한 시도였다고볼 수 있다.  해양은 실은 국가의 주권이 매우 불명확한 영역이다.  따라서 국가가 단순히 해안가를 척박하게 보임으로써 해양세력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바다를 포기한 것이오, 해양자원을 활용하고, 해양시대를 뒤늦게 대처함으로써 국가 멸망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장이라고 한다면, 위장한 후에 이에 대한 대비를 하여야 하는 데, 이러한 노력도 없었다.  오늘도 우리는 아직 바다를 두려워 하는 것 같다.  바다에 대한 쟁탈권이 격화되는 현상도 나타나고있다.   바다를 가까이하고, 즐기고, 바다의 개방성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지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오늘의 바다는 여전히 다가가기 어렵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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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19세기 파리

역사/19세기 2009. 6. 11. 10:11
지난 5월 초 주말에는 오랜 동네 친구들, 미국에서 온 친척, 독일인 부부를 각각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그리고 5월 말에는 서울에 소재한 고려대학에서 대학문제에 대해 발표하고, 밤에는 서울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5월의 서울 방문은 전체적으로 5건의 모임에 참여한 셈이다.  이중 2건은 미국에 살다 온 친구와 친척, 그리고 한 건은 오랜 친구들(미국에 살다온 친구의 만남은 동네 친구의 모임과 겹친다), 교수들과의 모임, 그리고 독일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이런 모임을 하게 되면, 나는 대개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것에 매우 마음이 설레면서 간다.  그런데 만나고 나면, 친한 것의 순서에 반해서 만족감이 온다.  즉 독일인 부부와 만나서는 선물도 교환하고, 얘기도 일본 대학생들, 한국에 정치와 외교 문제를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 그리고 헤어지면서 또 언제 어딘가에서 만나자고 기약없이 헤어진다.  그럼, 대개는 학회에서 일 이년에 한번은 보게되는 것 같다.

고려대에서의 발표에서는 서울과 지방에서 겪는 교수들의 일상적인 생활, 대화, 그리고 학문적 분위기에 대해 평가하였다.  솔직한 심정이다.  서울이라는 곳은 현재, 만나면 지나치게 정치화, 그리고 지대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경쟁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객관적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즐기기 보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현실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토론을 맡은 분도 동감을 표한다. 자기가 지방에 가서 같이 차를 동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동료 교수들의 주제가 개를 기르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거의 한시간 이상을 서로 즐겁게 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고 약간은 놀랐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교수들이 만나면, 국가와 정책, 누가 힘이 있고, 누구를 통해야 잘되고, 그런 얘기나 아니면, 집값과 같은 주제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런점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미국에서 온 친구와 친척도 오랜 만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래 나는 그사람들로 부터 최근의 미국 얘기를 듣고 싶었으나, 전혀 듣지못하고, 한국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중국적 또는 한국의 시민권을 회복하는 문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있었다. 나는 미국에 80년대에 살면서 미국에 사는 한국분들이 가능하면 미국 사회에서 열심히 살고, 힘을 모으고 협력하여 미국에서 당당한 한 몫을 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에 계신 한국계 분들이 지나치게 고국 격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독일에 1년 가 있을 때에도, 한국을 그리워 하는 것 까지는 괜찮지만, 독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당당하게 적응하기 보다는 고국의 문제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에 답답해한 적이 있다.  독일의 일본인들은 국제 교류퍼레이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일본 문화의 밤도 있으나, 한국은 당시 오스나부룩과 광명시가 자매결연 도시였으나, 사실상 교류가 중단된 상태였고, 교민들도 적극적으로 독일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오랜 친구를 늦게 만나 맥주와 치킨을 즐겼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60년대에 만났으므로, 지금 만나면 사실 그때 잘 몰랐고, 이제서야 새로 사귀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살던 동네가 있으니, 그런 얘기하고, 세월이 변한 것, 각자 살아온 것을 말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서로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나고 나서도 무엇인가 깨림직하다.

19세기 프랑스 파리 사회를 묘사한 작품 중에 발자크의 인간희곡이 있다. 여기에 보면, 파리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한다.  돈에 물들고, 생산적인 일보다는 정치와 권력에 기대어 돈을 버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도 당시의 모습은 수전노 같은 삶을 묘사한 것이지만, 현재 서울의 삶은 수전노가 아닌 착취자, 흡혈귀, 기생자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앞으로 서울과 지방의 삶은 어떤 형태로 개념화할 수 있을지모르지만, 내적 식민지, 아니면 생산자와 기생자, 지대추구자와 생산자 등의 개념이 나올 것 같다. 사회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학문의 혁신은 지방에서 가능할 것 같다.  서울은 학문 외적으로 에너지를 쓸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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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

역사/19세기 2009. 6. 11. 08:03
19세기 역사에서 안타까운 점은 왜 조선은 같은 조건 (쇄국)에서 일본과 다른 길을 걸었느냐일 것이다.  분명히 조선과 일본은 쇄국의 측면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거나 일본이 더 쇄국이 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국내 총생산 대비 무역 규모를 보면 조선왕조와 일본 토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비슷한 정도의 2%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이 부분적으로 화란(네덜란드)과 대외창구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쇄국 이전과 이후의 국가의 능력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역량이 아닌 민간의 역량은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고, 물론 일본이 시장경제, 문화적인 활성화, 마을 공동체의 역동성이 더 도드라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국내 경제의 활성화, 해외 문화의 유입과 국내의 고급문화의 융성, 마을 단위에서 보여지는 공동체 유제의 존속 등은 일본이 더 강고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의 국가 능력, 즉 과세와 징수, 강병정책, 이를 유지하기 위한 해외 사례의 학습, 국민의 여론을 의식한 정치라는 면에서 일본은 한국의 정국(왕조 또는 국가 능력)에서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조선의 과세는 이미 1400년대에 최고의 융성을 보였다가, 1600년대에 전쟁을 기점으로 그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이러한 ㅅ상태를 1800년대까지 이어진다.  군대 역시, 고종도 여러차례, 서양의 무기체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왕실의 안위도 보존하기 어려울 만큰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외의 사례를 배우기 여러차례 정부주도로 파견하였으나, 이들이 정부에 보고한 것은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이었고, 정략적인 경우가 많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어었다.  일본의 경우에 어찌되었던 의회를 구성하였으나, 1897년 독립협회가 요구한 의회의 설립에 대해 고종은 거부하고, 오히려 탄압하였다.  일본측은 부국 강병을 위해서는 과세를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 인민들의 여론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생가하였다.  또한 일본은 천주교가 일본에 의료와 교육사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국가가 나서서 인민의 마음이 천주교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 나서서 의료에 교육사업을 선점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쯤 되면,그것이 아무리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위민 정책을 취했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여론 정치를 도입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우는 여전히 국가의 능력을 키우기 필요한 것에 대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미 대외적인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종속이론가들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론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부국은 강병에서 오고, 강병은 대외관계의 전략적 조절 능력에서 온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자주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내적인 정치적 사회적 통합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내적인 통합이 되지 않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적대와 증오의 정치가 판을 친다.  물론 객관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그 기반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국내 여론의 통합이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관건이 되는 점은 공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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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은 지배로 이어진다.

역사/19세기 2009. 4. 8. 13:36

절제와 금욕이 결국은 제국주의와 남에 대한 지배로 이어지는 과정을 미국의 19세기 역사에서 본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17세기에도 청교도 혁명을 통해, 또는 캘빈 주의자들이 스위스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지배할 때에서 금주, 통행금지, 노는 것에 대한 경계, 육체적 향락에 대한 적대감을 품어왔다.   청교도들의 전통은 영국에서 사라졌었도 미국으로 건너와서 힘을 떨치고 있다.  자기 절제란 것이 자연과의 싸움에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절제를 통해 미래의 탐욕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타자에 대한 지배로 나아가는 첩경이 되는 것 같다.  금욕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즐거움을 미래 또는 이승, 또는 종교에 귀의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재 이세상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만다.  청교도들에게 현재는 다만 고통이다.

주홍글씨에서는 청교도들은 사회적으로 위선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인정치 못하고 인감의 감정과 영혼의 자율성을 인정치 못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청교도는 자신들과 다른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부시대통령이 이락을 침공할 때 (2003년), 부시는 다른 나라들을 악마의 축이라고 정의내리고 자신의 행동은 악마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금욕주의자인 부시대통령은 전혀 술과 담배를 멀리하였지만, 그렇다고 역사적인 안목이나 생활을 리듬을 살린 즐거움을 취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성경책을 읽고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금욕과 절제를 남들에게도 강요하고,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신들과 다른 종교라는 이유로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상당수의 독재자들은 금욕주의자인 것은 아마도 이들이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미국의 인디언 말살정책은 1800년을 전후한 시점, 그리고 중반까지 이어진다.  미국에 정착한 영국인들, 그리고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 이후의 백인 정착자들은 애초에는 인디언들과 전쟁을 벌이긴느 하였었도, 여전히 이웃을 맞대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서, 백인 이주자들은 팽창주의 전략을 취하면서 인디언들이 가진 자연과의 공생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금욕주의, 기독교 맹신주의를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이름으로 자신들이 인디언을 내쫓고, 말살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물론 마찬가지로 흑인 노예에 대해서 백인이 우월한 이유를 기독교와 그리고 금욕과 절제의 문화를 가졌으므로, 즐거움과 자연과의 포월의 삶을 가진 다른 종족은 미개하고  보고, 정복의 대상으로 당연시한다는 것으로 정당화하게 된다.

자신의 욕구에 충시랗기 보다는 하느님의 욕구을 우선시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이웃을 무시하고, 현실 보다는 저승과 내세의 삶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의 원형을 미국 19세기 초반에서 찾을 수 있다.  즐거움과 쾌락을 향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즐거워도 공허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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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사회와 시장경제

역사/19세기 2009. 4. 7. 14:21

19세기의 서양문화사를 보면 명백하게 흐르는 두가지 갈래의 논의가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정성에 대한 논의이다.  때로는 시장경제의 화폐는 신분의 구속을 타파하고 인간성을 해방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시장경제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시장의 평가기준에 의해 그 정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가능하게 만든 공장에 대한 찬사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즉 기계적 사고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생각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기존의 인간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것들도 이제는 기계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에는 바비지나 Ure같은 이들이 앞장서서 이념을 전파하고 실제로 이에 걸맞는 현재의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고안해 내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가 거구 유럽의 박물관에 가보면, 이들이 사용하던, 방직기내의 종이를 이용한 연속기계동작장치, 시계가 일정시간이 되면 여러가지 장난감 같은 것들이 줄지어 나와서 쇼를 하는 모습, 간단한 음악 곡조를 연주하는 기계 등은 이미 산업혁명이전부터 등장하였던 마분지 같은 종이에 구멍을 뚫어 연속동작을 가능하게 만든 장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물론 당시에 다윈의 진화론 그 자체는 종교적인 교의에 젖어있는 이들에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서 이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적으로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곧 효력을 발휘한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우생학적으로 백인이 유색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사고를 널리 퍼뜨리고 이를 정책에 곧바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19세기 후반에 백인이 다른 유색인을 상대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지배하게 되는 현상의 배후에 놓인 논리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2차세계대전시에 히틀러가 우수한 아리아인이 다른 인종을 지배해야 한다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만들었다.  19세기 초기에 신대륙에서는 원래의 주인인 인디언을 내쫓는 작업을 진행하였고, 민주주의는 백인들에게만 한하였고, 인디언에게는 이러한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음을 명백히 하였다.  인디언이 자율성을 갖는다고 하여도, 다만 당시의 흑인 자유인에 해당하는 자유를 인정하였고, 백인과 동등한 자유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재산권, 기득권, 이주의 자유, 참정권 이 모든 것들이 인디언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왜 인종차별에 기반하여 발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당시부터 시작된 인종차별 또는 사회적 차별은 지금도 제도로서 조직원리로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만 사람만바뀌고 있을 뿐이다.  즉 식민지시기에는 일본인이 가장 상층의 착취자로서 기능했다면, 그 후에는 특정한 계층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고 사회의 작동원리는 여전히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분업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사회적 차이의 포용이 아니라, 사회적 배제와 차별로 나아가는가에 대해서는 단지 체계의 작동원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역사상의 사회내의 제 세력에 의한 기득권 다툼의 논리가 더 적합할 것이다.  즉 반자본주의적 신분적 질서를 옹호하고 싶은 기득권이 자신들의 지대이익을 추구하려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진보적인 힘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자본주의는 신분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경향이 더 강함을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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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객고를 푼 기록들

역사/19세기 2009. 4. 6. 21:07
조선시대에도 관료들의 기록을 보면 다모, 관기, 가창자 들이 등장한다.  즉 관료들이 지방에 가면 다모가 와서 방안일을 도와준다.  아마도 부억일, 청소, 세탁을 도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의 일을 더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모도 관의 고용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청에는 또한 관청의 기생이 노비로서 존재했다.  관기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나오는데, 1500년대에 나온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하고, 임진란 때 동래인가 양산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랑하던 관기가 와서 같이 싸우다 죽은 사건이며, 진주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논개도 관기였을 것이다.  관기는 노비로서 바깥나들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유일한 탈출구가 젊고 생생한 관리를 사랑하여 첩으로 들어가 노비를 대신 내는 것이 유일한 신분탈출구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기는 상대적으로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예인의 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상당한 정도의 훈련을 거쳐서 교양을 어느정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주로 부른 노래는 시조를 포함하여, 12가사 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로 가거나, 북경에 연행을 갈 때에도, 각 지방을 지나면서, 특히 압록강이나 부산진의 항구에서 이국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때로는 다른 지방에서 만났던 관기들이 와서 이별을 아쉬워 하는 경우도 많았고, 서로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멋진 낭만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노래방에서 도우미 여인들을 불러놓고 질탕하게 놀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일본의 통신사나 북경에 간 연행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좀 더 철저히 해서 해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국내의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국내 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했으면 좋았을걸하는 아쉬움은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에도 지방의 수령이나 현감이나 아무튼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올때 대개는 맨손으로 오지 않고, 지방의 술이나 고기, 또는 토산품을 지니고 온다.  그럴 때 혹 기생도 동반하여 데리오 오는 경우도 있었던 것같다.  그 중에 한 여인에 이순신이 상당히 빠져 있었던 기록도 나온다.  이순신은 매우 꼼꼼 하여 이를 일기책의 빈자리에 몇번 만났는지도 기록하고, 같이 잠을 잔 다음날에는 모이 피곤하다는 말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철처히 하는 이순신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인들 외에도 상당한 가창 전문 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서울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후기로 접어들면 지역의 재산가들도 자신의 집에 가창자들을 불려들어 노래를 즐겼다.  초기에는 시조, 나중에는 긴 시조들(가사), 그리고 후기에 접어들면 판소리로 바뀐 것으로 이해된다.  1500년대부터 노래 가사에 나오는 사랑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개성과 감정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일찍 유학이 과학과 사실주의로 흐른 후에 낭만주의가 나왔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노래가 그냥 현실의 당파싸움, 유학적 현실 구속, 어려운 경제생활에 대한 체념의 한 방식으로 등장했다면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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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대외관

역사/19세기 2009. 4. 6. 16:56
조선은 1600년경을 전후로 해서 일본이라는 섬나라와 그리고 대륙에 있는 청나라(처음에는 후금, 그리고 나라이름이 변하여 청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많은 이들이 전쟁노예로 이들 나라에 끌려 갔다.  우리 지역(창원, 함안, 웅천)에는 주로 임진왜란와 정유대란때 일본의 남쪽지역(오사카)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려는 움직임이 조선 정부차원에서 통신사로 갈때마다 이루어지고, 상당수의 포로들이 송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편 벌써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설사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하여도, 조선에 돌아올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일본에서 이미 가족을 형성하였으므로 그대로 살게된다.

일본은 당시에 이미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고 있었고, 왜구라는 이름으로 중국 남부해안가, 그리고 심지어는 인도네시아 지역까지 무역에 진출하고있었다.  1600년대의 덕천 막부에서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지속하였고, 남부 중국 해안가와는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체제도 우리보다는 훨씬 질서있고, 문화도 발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세계지도를 갖고 않았던데 비해 일본은 이미 세계지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의도적으로 일본은 미개하고, 조선은 소중화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지만.  특히 1763-4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과 김인겸은 그들의 일본 기행 기록을 통해 일본의 문물이 발달하였고, 이를 조선에 도입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조엄은 고구마를 도입하고, 뒤이어 수차(물레방아, 관개시설) 같은 것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1866년에 청나라 북경에 간 홍순학은 그의 나이 57세에 국가 책무로 갔으면서도, 압록강을 건너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는 것, 그리고 경기지역을 떠나본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6개월에 걸쳐 북경을 다녀오면서 안전부절못하고, 북경에서 본 것은 강대국 청나라를 본다.  그러나 생가해 보면, 당시의 청나라는 아편 전쟁을 두차레 겪고 난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공격에 완전히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북경을 갔으면서도, 국제정세파악은 제대로 보지못하고, 부모슬하를 떠나는 것만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오늘 나는 세계지도를 본다.  북한이 쏘아올린 3단계 로켓 발사체가 어디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미국은 핵무기 확산저지의 기회로 삼고 있고, 일본은 해외팽창을 위한 군대보유를 금지한 헌법의 개정의 기회로 삼고 있다.  우리는 7월에 고층의 외나로도에서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미사일 300Km이상의 사거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을 자기네 경제권 내에서 통제하려 할 것이고, 러시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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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수출로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영국은 국내 아편 사용은?

역사/19세기 2009. 4. 4. 17:05

1840년 중국의 아편 수입금지에 맞서 영국은 인도에서 제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판을 두른 함대를 파견한다.  이 함대는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 북경으로 가는 세금물품을 실은 배를 공격하여, 그 항로를 차단함으로써 북경에 있는 중국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아편을 어느정도는 복용하고있었고, 특히 필리핀을 장악한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직접 담배를 가져와, 여기에 아편을 피는 방법이 개발되자 아편 흡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고한다.  이에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신대륙이 아닌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서 재배되는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여 부족한 무역수지를 메우려고 하였다.  영국이 갠지스 강 유역을 장악하자, 영국은 홍차, 비단, 중국도자기 등을 수입하기 위하여 아편을 수출한다.  중국에 영국이나 인도에서 생산한 면과 모직물을 팔려는 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칙수는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국왕에서 당시에 영국에서도 인체과 정신적으로 해로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을 비난하고, 이를 영국 국왕이 직접 금해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에서는 영국에서 아편을 법률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지적하나, 서양의 서적에서는 대개 영국에서 당시에 법률적으로 금하지 않았다고 정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국에서는 당시에 로드넘이라는 아편과 알콜을 섞은 물질을 음용하는 것으로 아편중독자가 생기고 이를 의사들이 정부에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정부는 그 폐해는 알고있었지만, 유통과 무역을 담당하는 세력들의 로비에 의해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영국에서는 1860년경에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1860년경은 실은 중국에 대해서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전역에 걸쳐서 아편무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던 때이다.  따라서 영국은 자국에서는 아편을 금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아편을 공식 무역으로 허용하라고 무력으로 강제한 국가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아편은 적은 량은 의료용으로사용되고, 19세기 초반에 풍미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에게는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형상화 능력을 신장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편중독이 되면, 신체가 서서히 마모되어 죽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남부에서 심하게 추정하는 사람들은 2천만명 이상이 아편중독자였다고 한다.  영국과 서구열강들은 1906년이 되면 중국에 아편을 금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으로 강대국이란 힘이 있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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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침을 뱉을까?

역사/19세기 2009. 4. 4. 13:10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위중에 독특한 것이 침을 자주 뱉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래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또한 보도에 따르면 최근에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결핵에 걸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연간 6만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가래침을 뱉는 습관과 결핵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을 삼가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침을 뱉는 것은 서양에서는 결핵균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히 금지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타구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손수건을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침을 뱉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지난해에도 북경 올림픽 때 중국 당국이 거리에 침뱉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였고, 싱가폴에서는 벌금을 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길거리에 침뱉은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다.

침을 뱉는 것은 사회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분 나쁜일이 있을때 침을 뱉는다.  그것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뱉는 것이 가장 의미가 강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침을 뱉을만한 사회적 의사표현을 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결핵이 많이 퍼지는 사회적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물론 19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결핵이 많이 퍼진 것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먼지때문일 것이다.  공장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각종 건설공사에서 생기는 먼지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순수히 인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공장과 국가의 필요성때문이다.  자본가들은 폐결핵에 걸린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들에게 전염을 시키고 노동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2세 노동자들을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할 것을 겁내하였다.  국가는 특히 전쟁시기에 군인들사이의 전염을 겁내하였고, 그래서 마산에도 1941년에 일본 상이군인들을 위한 결핵요양소가 생긴 것이다.  마산에도 또한 현재 마산대학교의 전신인 마산간호전문대학이 현재 마산의료원 터에 1956년에 개교하여 주로 간호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마산은 1910년에 진주에 생긴 국립병원 자혜원에서 만든 병원을 1914년에 세웠다.  이것이 현재 마산시청 근처의 마산의료원이다.  이후 유명한 문인들이 마산에 요양차, 대개는 결핵때문에 찾아 머물렀다고 한다.  나도향도 1920년대에 마산에 내려와 요양을 했다고 한다.  이후 아마도 1941년에 현재의 결핵병원 위치에 결핵 전문 병원을 일본상이군인을 위해 지은 것 같다.  아무튼 마산은 우리나라에서는 요양이 필요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바닷가의 공기기 결핵 치료에 좋다는 생각, 그리고 따뜻한 기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육군병원, 철도병원 등도 이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도 육군 병원은 마산 인근에 위치해 있다. 

마산은 온화한 기후, 바닷공기를 기반으로 해서 전통적으로 발달했던 의료 도시로 만드는 것도한 방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마산이 전국에서 가장 조용한 도시가 되었다고 마산시나 신문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사가 많이 실렸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가장 잠이 잘오는 도시, 또는 미세먼지가 적은 도시를 선정하여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것이 있다.  나는 마산시가 현실을 인정하여 무리하지 말고, 오히려 마산은 조용한 도시, 먼지가 없는 도시, 온화한 기후를 가진 도시, 바닷가 공기가 상쾌한 도시라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도시 발전 전략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연구와 개발를 하기 좋은 도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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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진동의 사회세계

역사/19세기 2009. 4. 4. 11:01
지난 3월 26일 참여연대 행사가 끝나고, 창동 훌러건 뒤자리 자리에서 우무석 시인이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읽어보기를 권유받았다.  진동에 유배온 학자가 스스로 표현하기에는 심심풀이로 바다의 어물과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김려는 아마도 현재 진동면사무소 부근인 진해현청사 부근에 살고 있으면서, 조그만 배를 타고 며칠씩 나가기도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바, 그리고 정취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톨해 당시의 사회세계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동은 매우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그래서 거제도에서 젓갈을 싣고 와서 모시와 바뀌어 가고, 고성에서도 와서 젓갈을 팔고 그랬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적극적으로는 동래의 장사들에게 일본 수출용 어물을 팔기도 하고(대개는 껍질이나 말린 것), 인근 함안, 칠원, 영산까지는 직접 어물을 팔러가기도 했다. 서울의 상인들이 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팔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세금매길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근의 섬들에서는 어획한 물고기들을 진동으로 가지고 와서 거래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진동에는 많은 외지의 사람이 살기도 하고 거쳐가기도 한다.  우해이어보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은 떠돌이 중과 주막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저자 김려와 같은 유배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상당수의 외지인들이 진동에 머물다 떠나고, 이들을 대상으로 주막, 식당, 여인들 장사가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동의 당시 사회는 어장에 대한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어 아무나 바다 어장을 차지할 수는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수 있는 채소같은 것을 채취하여 화폐로 교환하여 다시 이를 갖고 식량을 구입하는 교환이 발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진동의 1803년 시기는 화폐경제가 상당한 정도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려는 서울에 비해서 이곳 사람들의 치장에 대해서 촌스럽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 사람들 흉내를 내기 위해 여러가지 치장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세계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봄 도다리라고 부르는 것을 이곳에서는 가을 도다리로 부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거의 현재의 마산과의 거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동과 현재의 마산(당시에는 그래도 마산창이 있었고, 어항도 발달되어 있을 테인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는 거래가 있을 법한데도 마산과의 거래에 대한 표현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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