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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9 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2. 2009.01.28 종교 -> 과학 -> 산업혁명
  3. 2009.01.22 독일적인 것의 등장
  4. 2009.01.21 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5. 2009.01.16 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6. 2009.01.15 지식의 개방이 발전을 가져온다
  7. 2009.01.14 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길이다.
  8. 2009.01.04 혼란이 역사의 진보로 가기 위한 조건들
  9. 2009.01.03 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10. 2009.01.03 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노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역사/17-18세기 2009. 1. 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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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과학 -> 산업혁명

역사/17-18세기 2009. 1. 28. 15:07

역사를 배우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의문은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느냐? 라는 초보적인 질문에서부터 서양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지구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영향을 강요하게 되었느냐에 있다.  중세의 서양이 종교에 의해 지배되던 세상이라면, 르네상스를 거치고, 지구상으로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간단하게 서술하고,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서 외우는 것의 이면에는 상당한 진통과 역사의 반동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탐험은 물론 해외 식민지 개척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차적인 동기이기는 하지만, 항해술의 발달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가 중요하게 된 이면에는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의 국가 재정 확보, 이를 통해 전쟁능력의 고양,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전쟁에 의한 영토 침략의 유혹이 존재했을 것이다.  혹자는 전쟁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었고, 국가는 전쟁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까지 평하기도 한다.  아무튼 서양의 17-18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왕조들간의 영토야욕을 툴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전쟁이나 종교전쟁, 징집된 군인들에 의한 전쟁은 아니었다.  상비군이거나 또는 용병이거나 대부분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의 경우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예를 들면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는 농민들을 아무런 급여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는 형태였거나, 아니면 왜군의 경우에는 조선을 정복하여 그 약탈품을 소유하게끔 하여 군인들을 독려하였다.  물론 당시에 참여한 명나라군들은 급여를 주는 군인들이었다.

부의 축적에의 갈망이 곧바로 과학적인 사상의 보급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한편으로 절대주의 국가체제나 로마 교황청의 명목상의 허가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가 지배의 신성함을 보장받는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국가 지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전쟁무기나, 전쟁에 소요되는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산업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11600-1700년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종교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속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종교재판을 통해 사상과 표현을 통제하는 한편, 건축물이나 무기, 길, 항구, 터널 등의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종교나 세계관에 대한 갈등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서, 종교전쟁의 폐해는 일반인들까지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따돌림을 행하게 된다.  사회적인 따돌림과 희생양은 사회적인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느낀 사회격변(생산성의 발달, 도시의 등장, 사회적 격차의 심화, 지식의 보급에 의한 종교적 권위의 상실)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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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적인 것의 등장

역사/17-18세기 2009. 1. 22. 16:05
오늘 아침 신문에 해외에 있는 한국 무역관에서 조사한 한국의 제품과 다른 나라 제품에 대해 구입자들이 지불하려고 하는 가격이 나왔다. 한국 제품을 100달러에 구입하는 것이라면, 독일 제품은 같은 제품에 대해 독일 것이기때문에 150달러를 지불하고도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건 제조 능력은 세계적으로 독일이 제일 앞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필자도 독일 오스나부룩에서 2002-3년도에 13개월간 생활한 경험이 있다.  독일 사람들은 행동도 기계처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정과 눈물이 많고, 한편으로는 사적인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법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라는 점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하면 엄격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면을 강조한다. 현재 한국 방송공사 사장하는 이병순을 말할때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신경질적인 냉혹함"(내부의 의견)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기본적으로 여러종류의 통치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프러시아를 가장 기반이 되는 나라로 여긴다.  이는 프러시아가 현재의 독일 영토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서가 아니라, 프러시아의 역사적인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프러시아의 영토는 실은 1300년경에 발트해 연안(현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랜드 북부 등)의 영토에 기반하여 시작된 나라이다.  그러나 후에 브랜덴 부르그와 합치고,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가지면서 독일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 우리가 보통 독일이라고 하면 대개는 프러시아를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어 한 독일인이 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고 하면, 이는 브랜덴 브루그 사람(프러시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러시아가 현재의 독일 영토를 장악하면서, 현재의 강대국 독일을 만든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는 프러시아의 1600년대 특히 1700년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은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다.  해외 식민지 개척에도 뒤졌고,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에도 뒤늦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1700년대의 프러시아는 고문의 근절,법의 지배, 관료제, 상비군, 의무교육제도, 철학, 문화가 꽃 핀 나라로 기억된다.  헤겔, 칸트 등의 철학자가 생각난다.  이를 서양에서는 계몽군주제의 등장으로 치부한다.  1700년대 이후에 독일에는 계몽군주가 등장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를 표현하기를 오전에는 스파르타, 오후에는 아테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즉 한편으로는 근검절약, 강인한 심성, 절제와 중용의 심성을 가졌으면서도, 대화와 관용, 창조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독일은 1600년대 초반의 30년 종교전쟁이후에 스웨덴에 패하여 현재의 베르린 지역에서 현재의 러시아의 칼리닌 그라드(발트해 연안)로 수도를 옮기는 치욕을 겪는다.  그러나 치욕을 거울삼아, 대 반전을 꾀한다.  Frederik William(대 선후)가 집권하면서, 상비군을 갖추고, 절대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즉 자신의 치욕을 거울삼아 대반전을 꾀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 외부의 이질적인 개신교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활력으로 삼는 정책은 독일의 활력이 냉정한 문화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독일은 1800년대 초반에 나폴레옹에게 배패한 후에도, 리를 거울삼아 농노 해방, 유대인들의 해방, 자치권의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한다.  우리의 경우에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면 오히려 감추기 바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나라를 만드릭 위해서 오히려 외부에 개방하고, 신분 해방을 통해 사회의 활력을 찾은 점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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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역사/17-18세기 2009. 1. 21. 11:35

1600년경은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전기가 마감되고, 왜와 청나라의 침략으로 조선후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는 조세 자료와 신분에 관한 자료가 망실됨에 따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거두어 들일수있는 재정은 더욱 악화되나, 반면에 신분자료의 망실은 신분제도의 동요가 일어나서 자산에 의해 신분상승이 일어나고, 재산이 없으면 양반이라도 신분 하락을 겪던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외부의 침략에 의해 내부의 개혁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국가 융성기라고 부를 정도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다고는 하나, 이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비후어 보면 발달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와의 연계는 청나라, 왜, 유구 열도정도 만이 관에 의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므로, 이웃의 일본이나 청나라도 쇄국정책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외부의 정보에 어두웠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유럽대륙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을 개척한 상태에서 대량으로 상품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해외 식민지는 동인도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왕실과 국가가 세운 주식회사의 형태로 진출하지만, 이들 회사는 토지 점유, 군 고용, 독점 무역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의사 국가의 형태를 취한다.  포루투갈, 스페인의 시대를 끝내면서 1600년경에는 네덜란드가 공화정의 형태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독립하고,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간다.  이어 영국이 1600년대를 거치면서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의 실험을 거치면서 왕권을 제약하고,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한다.  프랑스는 절대주의 국가로서 중농, 중상주의 국가를 만들어 간다.  국가는 단순히 한 나라의 인민들의 생산물을 수취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국가가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시기이다.  여기에서 국제적인 통용화폐인 은이 남아메리카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은행-> 은을 다루는 상점).

유럽대륙은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전쟁의 시기를 거친다.  전쟁의 방식은 겉으로는 내부의 왕권을 둘러싼 전쟁, 왕의 권력과 귀족간의 내전, 해외식민지 쟁탈전의 양상, 종교전쟁의 형태를 띤다.  유럽대륙의 지배체제는 왕정, 공작령, 후작령과 같은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띤 것, 도시국가 체제, 수도원과 가톨릭 교구가 지배하는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혹자는 유롭대륙은 약 200여개 이상의 통치단위로 나위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잦은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이러한 작은 단위들이 본격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유럽은 국가간의 전쟁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이데올로기가 각 나라에서 그것이 가톨릭이건, 루터교, 또는 캘빈교, 청교도 등의 형태로 공유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어느정도의 규칙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물론 전쟁은 대부분 용병들에 의한 전쟁이므로, 왕정간의 전쟁이지, 국민들간의 전쟁은 아니었다(종교전쟁의 경우에는 인민들간의 살륙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용병들과 전쟁 무기, 재정 능력에 따른 전쟁이었으므로,  비교적 서로간에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또한 아직 국경선이 획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식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면전의 양상을 띠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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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역사 2009. 1. 16. 16:12

조선의 탄생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설된 상황에서
이미 여진족, 왜구, 홍건족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려왕조 대신에 국가 재건의 차원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 좁은 국토라서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너질 왕조가 너무 오래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아마도 지방이나, 상업의 약화가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조선 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문화나 재정이 튼튼한 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웃나라나 서구의 역사에 빗대어 보거나, 원나라 지배이전의 고려시기의 해양상업의 발달에 비추어 본다면 퇴보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계가 고려 왕의 명령을 어기도 모처럼 만에 찾아온 중국 대륙과의 호쾌한 전투를 마다하여 유약한 이성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성분이나 그의 경력을 보면 한반도의 변경을 오가면서 여진족, 홍건족, 왜구를 물리치면서 지역을 누빈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약한 그릇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다만 명나라를 섬기고,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삼음으로써, 국민들의 개방적인 기상이 취약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명나라만 하여도 남송을 이어받은 명나라는 초기에는 해양상업에 대해 금지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동아시아(남중국해) 해상 무역권을 발달시켰다.  물론 우리나라도 소극적으로 이 때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무역을 한 흔적이 있고, 심지어는 태조때에는 태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물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들 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무역을 청해와서 한 소극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라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공포, 삼별초 난에 대한 해상 세력에 대한 공포감이 강하여 해상무역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세종때 대마도를 정벌하면서도 왜구가 한반도를 공격할 것에 우려를 심히 하였다.  물론 조선조에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고려말에 비해서는 왜구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왜구는 이때(설사 일본의 공식적인 나라와는 구분한다고 하여도) 중국의 해상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중국도 1300년대후반과 1400년대 초반을 통해 동남아의 말라카, 인도의 갤리컷에 진출하였다.  조선만 여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선전기의 역사에서 서구의 르네상스, 지구상의 발견, 상업의 부흥 등의 근대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안에 고려때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무역과 제국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세종조의 시기에 나타났던 문예부흥, 국가 기틀의 마련이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너무 좁은 평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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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개방이 발전을 가져온다

역사 2009. 1. 15. 11:21

가톨릭이 지배했던 중세를 지내고, 1400년대에 들어서면 비잔틴(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지식인들이 이태리로 망명)과 이슬람 권의 지식과 문화가 유럽에 유입된다.  이 과정에서는 많은 과학적 지식들이 수용되고, 창작되고, 확산된다.  물론 이러한 지식의 수용과 확산에 반발하여 종교재판, 화형식, 마녀사냥, 이단서적 금지 등의 방식으로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 또한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가 앞섰다고 주장하는 금속활자보다 우수하지는 않아도 1457년에 구텐베르그는 이를 이용하여 시편을 발간하고, 이후 약 50년간에 걸쳐 유럽에서는 매년 약 2만여권의 책들이 보급되게 된다.  당시의 책은 대개 수도원에 갖혀있는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구텐베르그로 인해 비로서 지식이 일반 대중에게 쉽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라무스는 1543년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책을 발간한 후에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당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라무스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당시에는 구텐베르그의 인쇄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감추어서 사용하는 것 보다는 공개적으로 출판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화적 인정방식의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적 기록에는 1562년경부터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이루어 진 것으로 나타난다.  마녀사냥이란 사회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회나 자연 현상이 발생했을 경우에, 이를 도저히 설명할 방식이 없으므로 이웃의 한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희생양에게 모든 잘못된 현상의 원인으로 돌리고, 이를 불에 타 죽임으로써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을 말한다.  따라서 미신과 사회적 배쳑에 기반한 현상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루노는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92년 5월 23일에 베니스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구속된다.  결국 1600년에 우주의 무한성을 말했던 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다.  또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유럽 사회는 종교적으로도 1400년대에 체코에서 시작되면서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유럽에서의 가톨릭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체제이면서, 동시에 법률을 가지고 있고, 교회가 다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헌금을 받아서 사용하는 막강한 경제적 부를 동시에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주교는 하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귀족계급에서 선출되었고, 신부들은 다만 하나의 고용인이었다.  1500년대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위그노와 가톨릭의 대결, 1600년대의 30년 종교전쟁 등은 썩은 종교 가톨릭에 대한 정화운동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계관과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물론 모든 개신교가 모든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칼빈교는 특히 스위스에서 기독교 광신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영국에서도 1600년대에 청교도 혁명은 모든 시민들에게 청교도 윤리를 강요하였다.  따라서 한편으로 가톨릭과 비슷하게 개신교도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의 종교이므로 누구나 믿어야 한다는 강한 독선에 빠진 점은 비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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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살길이다.

역사 2009. 1. 14. 18:38
서양에서는 중세가 마감되는 1350년경부터 날씨는 차가와지기 시작하지만
르네상스라는 문화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문화권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서 망명해온 인적 자원과 문화적 영향을 보강하고
몽골 제국의 탄생으로 용이하게 된 동방무역을 통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임으므로서 유럽이 세계 역사를 지배할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영향력 약화, 이슬람이 강대해졌다가 다시 약화되는 시기, 유럽의 민족국가가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나는 가끔 우리는 이 시기에 무엇을 했던가하는 자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나라는 물려났고, 그러나 명나라가 들어서서 조선을 지배하려고 한다.  바깥 일본 열도에서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어 왜구가 날뛰고, 각지의 장군들이 서로 지역을 기반으로 쟁투를 벌이게 된다.  한 일본인이 이 시기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반도에는 당시에 일본의 지역의 장군들과 같은 사람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일본은 1600년경에 되어서야 전국이 통일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등장하지만 이는 곧 명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적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1400년대는 한반도에서도 문예부흥, 국가의 기반을 정립하는 시기가 된다.  조선조 역사에서 조선 전기가 조선 후기에 비해 국가가 더 강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1500년말에 벌어진 전국 통일의 시점에서 오오다 지역(지금의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역)을 공격하는 풍신수길은 10만 군인을 동원한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할 때에도 역시 15만 군인을 동원하므로,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는 정도가 나온다.

임진왜란 2년전인가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이들의 국력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신들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해외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곡해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한반도가 완전히 일본에 먹히는 1910년경에도 한반도에는 2만정도의 병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는가?  조선 전기의 내부 상황은 내부적으로 초기의 개국공신들과 왕권, 그리고 새로운 사림 세력들, 재지 토호 세력들이 상호 각축을 벌이는 양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내부적인 정치적인 다툼을 위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실질적인 경쟁과 다툼 보다는 정치적인 타협와 야합을 통해 인민 착취의 균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역사에서는 이 시기가 융성했던 한 시기라고 평가할 수있을지 몰라도, 세계사에서는 뒤떨어지는 시기가 된 것이다.

일본의 한 영주는 이미 1500년대 초반에 푸르투갈의 무역을 받아들였고, 일본의 왜구들은 중국 해안가에 진출하고 심지어는 동남아까지 진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은 1400년대에 정화 원정대를 아프리카 동쪽까지 보내던 시기이다.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4군 6진을 설치할 동안이다.   바깥정세를 잘 살피는 것이 약소국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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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이 역사의 진보로 가기 위한 조건들

역사 2009. 1. 4. 08:11
유럽이 당시 가장 경제적으로 앞선 중국을 추월한 시기를 1300년경으로 잡는다면,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라, 고도의 경제적 생산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의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중세는 대개 프랑크 왕국의 국가체제가 바이킹들(노르웨이와 덴마크인들)에 의해 몰락하고, 지방분권적인 봉건영주체제가 건설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들도 통치기구의 하나를 이루게 된다.  봉건 영주체제란 영주들이 그들의 가신들에게 나누어준 봉토를 다시 농민들에게 분배하여 경작하여 세금을 바치고, 영주는 이들 가신들을 무력으로 보호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영주는 사실상 국가의 역할을 담당하여 군사와 사법권을 행사하게 된다.  유럽은 어느정도는 왕에 의한 국가체제라는 것이 형식상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체제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앙집권 국가체제에서는 대개 노예제도를 이용한 생산, 또는 용병을 사용하는 징병체제르 갖추고 있었지만, 봉건체제는 노예제가 아닌 자유로운 농민(때로는 농노라고 불리우기는 하여도), 가신들에게 나누어진 봉토를 다시 분배받아 농사를 짓는 제도였다. 따라서 신분적으로는 자유로왔다.  노예제에 비해서는 농업생산이 늘어났다고 평가한다.  물론 인구도 늘어났다.  이를 거두어 들인 가신과 영주들은 잉여생산을 이용하여 교환을 촉진하게 된다.  상업과 도시의 등장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중앙국가가 강력하게 농업과 상업을 통제하던 시절보다 한결 생산력도 늘어나고 유통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내부적인 요인외에도 해양을 이용한 장거리 무역도 발전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흑해, 북해연안 도시들간의 무역이 발전하게 되고, 이는 도시들간의 연합이나, 중앙아시아 대륙이 징기스칸에 의해 평정됨으로써 한층 쉬워졌다.

봉건제도의 등장과 더불어 등장한 기사계급은 예비된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집답이면서 동시에 가신과 영주, 또는 더 큰 영주 연합체를 위해 봉사하는 집단이었으나, 항상 체제 위협적인 불안한 세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들은 결국 십자군전쟁을 통해 해외의 식민지 건설, 동방지역과의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담당한다.  당시에 문물이 앞선 이슬람 세력들은 십자군을 너무 얖잡아 보기도 했고 내부적으로 수니파와 쉬이터파와의 갈등, 지역적인 분열이 이들에게 패배한 원인이라고 보면 될것이다.  즉 십자군은 상대적으로 가톨릭의 결집된 세력이었던데 반하여, 이슬람권의 방어세력은 분열되어 있었다.

유럽과 이슬람과의 교류는 결국, 앞선 무역능력을 보유하고있던 이슬람권의 아라비아 숫자, 회계제도를 도입하게되었고, 대규모의 근대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한반도 역시 바다에는 마산에서 출발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 배가 6척정도가 개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대마도의 왜구들은 한반도 해안을 유린하였으며, 제주도와 유구(오키나와)간의 왕래도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우리가 장보고에서 알듯이 중국 연안과의 왕래도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다는 국가의 세곡선, 상인들의 국제무역, 인민들의 피난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리가 유럽과 다른점은 우리는 해외와의 문명 접촉을 통해 내부적인 개혁(인민들의 평등을 기초로 한 경제활력화, 지방분권을 통한 전체적인 국가의 기반 강화, 외부 문화의 수용)등에 소홀하였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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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발전을 위한 전단계에서 발생한다.

역사 2009. 1. 3. 17:31
유럽 중세의 역사는 비판의 의미를 지닌 중세봉건사회라는 표현에서부터, 암흑시대라는 표현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즉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농노제도와 봉걵건제도에 딸린 영주가 농노들이 결호낳기 전에 처녀와 미리 잠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흑사병, 마녀사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십자군 전쟁, 농업혁명, 도시의 등장, 기사도(궁정사회), 직업장인의 등장, 분업과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발전과 내지 무역의 등장, 한자 동맹, 바이킹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 정착 등을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평가 또는 관찰의 뒤에 있는 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변화의 동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사학자들은 중세 온난화 현상을 주장한다.  즉 80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현재의 기후보다 1도가량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간할 수 있는 땅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산물이 풍성하게 수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쪽에서는 바다가 얼음에서 녹고, 유빙의 한계가 극지방으로 밀려감으로써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들와 그린랜드 나아가 현재의 캐나다 북동부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점, 덴마크인들은 노르만디와 영국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느 점을 지적한다.  즉 중세의 온난화시기는 농업의 풍요로음과 동시에 바이킹들이 적극적으로 바다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동서양의 관계, 더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서부 유럽과 중국과의 교류라는 측면,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이슬람 권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관계까지 넣고본다면, 중국이나 이글람 권보다도 열등한 문명을 지니고있던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이들 두개의 문명권보다도 앞선 문명을 구가하는 과정이 이 중세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현재의 유럽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겠다.

중국은 11세기에 거란과 여진을 밀어내고, 다시 훈족을 밀어내어 간접적으로 유럽에 파급효과를 준다. 특히 훈족은 앞선 시대의 북방에서 내려오는 민족이동을 야기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거란과 금나라 역시 유럽의 문명과 대면하여 최초로 중국을 소개하는 민족이 된다.  이후 1200년대들어서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한편으로는 흑해를 장악하던 라틴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내의 교역의 안전성을 보장하여, 지중해 연안의 장거리 무역이 더욱활발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베니스가 현재 크로아티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 연안, 흑해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유럽의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지중해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유럽은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1000년대 말부터 막강한 사라센 제국과 겨눈다.  이는 내부적으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과 힘을 합치고, 유럽의 봉건적인 내부 무장 세력들의 힘을 결합시켜 외부로 향하게 하는 의도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의 문명과 본격적인 교류를 통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과의 문명 접촉은 직접적으로는 흑사병의 창궐, 종교재판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의 중세 역사를 통해 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수용하여 앞으로의 발전의 전략을 삼는 것이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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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바다를 통해 무역과 침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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