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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31 생물학적 차별이 사회제도로 침투한 19세기 후반기
  2. 2009.03.29 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3. 2009.03.26 시장에 포섭되는 군중들
  4. 2009.03.24 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5. 2009.03.18 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6. 2009.03.13 공장과 가내공업이 의존해서 발달한다.
  7. 2009.03.12 실천이 노동에 대한 논쟁과 조사를 자극했다.
  8. 2009.03.06 거래 비용이 경제성장을 좌우한다.
  9. 2009.03.05 식민지의 기반위에 건설된 부국들
  10. 2009.03.04 순진하여 자치 능력이 없다.

생물학적 차별이 사회제도로 침투한 19세기 후반기

역사/19세기 2009. 3. 31. 16:08

19세기 전반기가 서구 열강들이 자국내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어, 내부적으로 그 해결방식을 찾았다면, 19세기 후반기는 자국내의 문제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즉 19세기 전반만 하여도, 식민지 제국들은 먼곳에 있었고, 그곳에서 서구 열강의 내부로 영향을 그다지 크게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유럽(구대륙)에서 신대륙(미국)으로의 이주, 흑인노예의 이주, 인디언 학살,인디언들과의 혼혈 정도가 인종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상 내부적인 문제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부에서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하고, 뒤이어 미국은 미시시피 강을 넘어 서부로 서부로(방향이 서부라는 말이지 지형적으로 보면 현재 미국의 중부에 해당한다) 개척하는 시기였다,  철도로 대륙이 연결되고, 목화 프랜테이션, 그리고 북동부 지역(뉴 잉글랜드지역과 새로운 접경)에 신흥공업도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의 이주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중 플랜테이션에는 흑인 노예들이, 북동부의 지역에는 대부분 구대륙의 이주민들이, 그리고 철도 연결을 위해서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대거로 이주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 미국 내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이주민들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있는 이들에게는 이들 피지배계급이 어느정도 분열되어 있는 것이 통치에는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이미 발전한 다윈의 진화론에 빗대어, 사회적으로도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으로서 사회적인 경쟁에서의 승자를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사람들도 대부분, 흑인, 이주자, 인디언을 포함하는 민주주의를 주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노예들이 제외되었듯이, 대부분의 사회 하층민은 배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제는 이것이 겉으로 보면 단순히 인종주의적인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종주의가 그 원칙대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종주의란 사회적으로 차별을 합리화시키는 하나의 이념적 도구일뿐이지, 백인이라고 누구나 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19세기는 미국 신대륙에는 구대륙에서 기근을 피해(아이랜드의 감자기근), 또는 1948년의 노동자 폭동을 피해 온 사람들, 또는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이들, 종교자유를 위해 온 사람들 등 수 많은 각자의 동기에 의해 피신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기존에 살던 주로 WASP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남북 전쟁후에는 남부의 사람들이 북부의 사람들에 의해 차별을 많이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에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물론 나중에는 중국인들이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을 철도노동자로 들여온 거의 직후부터 차별적인 법률들이 계속해서 제정되었다.  이점은 최근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영어 공용화법안을 통과시켰다가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불법으로 판정받은 것을 상기하면 알 수있다.  즉 주 정부의 차원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면된다.  인종주의적 차별이 미국에서만 발생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인종주의적인 정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스카프를 학교에서 금지시키고 있다.  프랑스를 말할때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킨 나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민족주의적인 민주주의가 당시에도 모든 나라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이탈리아에서는 초기에 환영을 받았고, 독일에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었고, 스페인에서는 초기에는 상당수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환영하다고 결국은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즉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시 민족을 우선시하는 민주주의였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1950년대, 그리고 1962년에 해결된 아프리카 알제리아 독립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민족과 결부되고, 인종주의와 결부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를 정당화한 이념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조선말기의 선각자들도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부국강병론을 주창하였다.  물론 부국강병을 제대로 실행할 능력도 없었지만, 부국강병론 자체가 바로 제국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의 우리도 역시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한 경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에서 보겠지만, 경쟁은 탐욕과 차별에 근것한 경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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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학살과 흑인노예를 통해 자유를 얻은 백인들

역사 2009. 3. 29. 08:11
제목이 자칫 인종주의적인 표현이다.  물론 모든 백인이 모든 인디언과 흑인의 희생위에서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의 백인들도 노예, 특히 채무 노예로 살았고, 유럽대륙에서도 채무 노예와 동부 유럽에서는 농노가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 흐름, 즉 대채적인 흐름은 아프리카의 서중부의 해안가에서 잡해온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남미의 광산과 북미의 목화 플랜테이션, 아니 더 나아가 북미의 공장지대에서도 노예들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혹자는 노예는 아주 오래된 전통적인 제도이므로, 노예가 신대륙으로 유입된적이 그리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족간의 전쟁을 통해 잡혀서 거래되었고, 실제로도 신대륙으로 백인 상인들에 의해 팔려간 흑인 노예들도 이들 아프리카의 부족들간의 내지 거래를 통해 수집되어 수송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수요가 대규모의 노예를 만들어 낸 것만은 사실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동인은 자본의 등장, 돈을 버는 돈의 등장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착취가 가능한 수단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이 추상적인 논리에서는 자본주의의 착취의 기본 원리인 것으로 보이지만, 노예 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도 말할 수있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 유럽대륙의 일부 발달한 자본주의를 제외하고는 노예노동이 가장 기본적인 공장노동 또는 플랜테이션, 광산 노동의 형태였다고 까지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상당수의 백인들이 농촌에서 쫓겨나고, 도시에 몰려들어 무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중 성공한 이들이 임노동자가 되었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자유노동자, 채무 노예가 되어간다.

흑인 노예들은 실제로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졌다.  영화 만딩고를 통해 보면 잘이해할 수 있듯이,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잡혔다고 다 신대륙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상당수의 국가들이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노예 제도 자체를 금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노예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한다.  즉 공식적인 금지가 현실적인 금지는 아니었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말이다. 잡힌 노예들 중에서 가장 일을 잘할 것 같은 흑인들만 노예로 팔려간다.  실제로 노예들의 키를 기록한 것에 따르면,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당시의 백인들보다도 키가 더 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인한 노예들도 보름내지, 한달정도 걸리는 신대륙으로의 여행에서 거의 선반에 쌓아놓듯이 운반하는 체제에서, 똥오줌을 가릴 수 있는 화장실 시설도 없었기에 상당수 아마도 30-40%정도는 죽거나 병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노예 장사가 이익이 많이 나기에 상당히 성행했던 것 같다.

남미의 경우에는 일찍이 노예제도가 발달하여, 광상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노예가 많은 도시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노예가 전체 도시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하였다.  노예들중 일부는 채무를 갚거나, 노예들도 백인과 결혼하여 새로운 신분이 상승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순수한 백인들 보다는 백인과 결혼한 흑인들이나, 인디언들도 상당수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노예를 거느리는 수는 많게는 수백명씩 거느리면서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20여명을 거느리고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노예가 삶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가내 노동을 위한 노예도 상당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소작제도나 임차농이 발달해 있었다. 소작제도는 대개 수확량의 1/3을 지주에게 주고, 1/3은 농지 경작의 비용으로, 나머지 1/3을 소작농이 갖는 제도였다.  따라서 미국의 소작제도도 조선에 비해 전혀 착취의 정도가 적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심한 착취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차지농은 땅을 돈을 주고 빌려서 농사를 짓는 제도이다.  공장이나 상점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회사로부터 채무를 지게되고 이러한 채무는 자섹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어 결국 대를 이어서 채무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제도는 미국에서도 거의 196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법률적으로 불법화되고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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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포섭되는 군중들

역사 2009. 3. 26. 18:05
19세기 서양사는 대체로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도시와 시장경제라는 무대에 등장하면서, 착취와  저항, 은폐와 드러내기, 즐기기와 억압이 뒤얽히면서 정치적인 타협과 대결, 그리고 자유와 탄압이 지속된다.  물론 그 중심적인 영역은 개인들이면서, 동시에 한 가족의 적응, 그리고 이웃과의 연대전략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뒷받침에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영국의 노동자 생활을 연구한 톰슨에 의해 분석되는 것을 차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같이 임노동자라기 보다는 양반계층, 귀족 계층, 상인층, 장인(제조업자), 공장노동자, 자유로운 노동자 들이 얽혀 있었던 시기의 일반 평민들의 삶을 분석하는데에는 한층 더 유용한 것이다.

개인들의 처지 역시, 임노동자라는 표현보다는 무산자 계층들, 즉 점차 공장이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제조업자들의 힘에 눌린 장인층들(소규모 자영적인 성격을 가진 제조업자들), 장인층의 아래에서 기술을 배운 숙련노동자들, 또는 이미 기계가 들어오기 전의 공장에서 숙련을 가지고 있었다가 기계가 등장하면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에게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숙련노동자들, 단순한 저임 노동자들, 도시에 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공식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자유노동자들 모두가 아니, 농촌에서 도시로 가기위해 대기하고 있는 소농 소작자들 역시 무산자 층에 속할 것이다.  이들 모두는 19세기의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시장경제체제에서 그 고통에 적응하고, 타협하고, 저항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개인에게 결혼은 과거의 농촌시절과는 달리 어느정도의 사회적응과 돈벌이가 가능해야 혼사문제를 풀수 있기에 결혼연령은 늦어 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결혼 역시 하나의 가족 생계전략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키가 크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인정되는 여성은 일찍 좋은 조건에서 결혼 기회를 가질 수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결혼기회가 협소하였다.  여성의 신체와 결혼을 연구한 논문(영국의 사례)에 따르면, 신체의 크기는 과거의 영양상태를 표시해주고, 또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후에도 공장에서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육체적인 강인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허약한 육체 보다는 강한 육체조건을 선호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를 임금이나 채용가능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가족은 아직도 말이 부인들이 노동한다고 하였지만, 부인들이 노동에 나서는 것은 거의 최후에야 나서는 것이었고(미국의 사례), 우선적으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노동에 나서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어야 했다.  우리의 1960년대에 농촌의 처녀들이, 그리고 소년들이 중학교와 일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태와 유사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도시에서는 자기 집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하숙을 통해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주려는 전략이 우세하였다.  부인들이 노동에 나가는 것은 거의 최후의 수단이었고, 이런 관행도 19세기 후반이 되어어야 가능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공장이나 노동에 나서는 경우에는 주위의 온갖 멸시에 시달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군중들은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놀이를 조직하고, 공동체에서 지주(젠트리)나 자본가(제조업자나 상공인들)을 야유하는 축제가 발달하였지만, 19세기 중반이후에 접어들면, 노동자들의 놀이는 이제 자본가의 상품 영역속으로 편입되게 된다.  즉 개별화되고, 상품화되고, 조직화된다.  따라서 개인간의 사적인 상호작용은 줄어들고, 영화나 프로 스포츠를 즐기게 됨으로써 활동적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여가를 즐기기는 어렵게 되었다.  즉 노동자는 오히려 여가를 즐기기 위해 다시 노동을 더 해야하고, 이웃들보다는 고립된 상태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할 때 왜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 하지 않고, 더욱 많은 노동을 통해 화폐임금을 획득하려 하나고 질문하면, 대개는 쉬는 시간에 돈이 없으므로 할일이 없다고 한다.  바로 서구로 따지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공동체적인 놀이가 사라지고, 돈에 의해 여가가 향유되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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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의 등장으로 취착당한 사람들

역사 2009. 3. 24. 08:27
19세기 세계적으로는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의 피해를 입은 계층의 반발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8세기부터 임노동이 본격적으로 영국에서 등장하고, 이에 따라 봉건제 농촌에서 소농이나 예속농으로 일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에서 임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유럽대륙, 신대륙, 그리고 나머지 제국주의 침탈의 대상이 되거나 아직 되지 않은 나라들의 경우에는 여전히 장안노동, 노예노동, 농촌 노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임노동이 서서히 그러나 강고하게 등장하면서 공장에서 아니면 플랜테이션의 농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임노동의 형태와 동시에 존재하던 노예 또는 자유 노동자의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이다.

임노동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계층은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장인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장인과 도제제도를 통하여 제조직종의 특정분얄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인들이 공장제도를 통하여 기계를 도입하여 이제는 어린이나, 부녀자가 하는 노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잘 아시다시피, 기계파괴운동이 간헐적으로 그러나 이들의 반발에 의하여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19세기가 되면 일단 영국이나 유럽대륙에서도 장인노동은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 정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사라진 나라이고, 유럽대륙은 그래도 서서히 파괴되지 않았나 싶다.  재미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들 장인 노동자들이 TRADE UNION을 세운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조합이 사용하고 노동조합의 명칭이다.  trade union이라는 말은 실은 장인노동자들의 단체임이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소극적인 그리고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주로 한다는 이유로 도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미국은 이들 장인노동자들이 독자적으로 19세기 노동운동을 격렬하게 주동한다.  이후에 서서히 숙련노동자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19세기 말에가서야 나타난다.

19세기는 실은 임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고, 장인노동자의 시기도 아니었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노예노동이 판을 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않을까 싶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거래가 19세기 중엽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지되지만, 밀무역은 여전히 판을 치고 있었고, 플랜테이션에서는 노예제도를 선호하고 있었고, 매매춘이나, 상당수의 가내노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로는 채무노예라고 불리우는 노예들은 자본주의 시대에도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신체포기각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노예는 아니지만, 이제 막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나, 농촌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이들은 자유노동자로 살아갔다.  자유 노동자라는 뜻은 이념적인 뜻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일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로운 만큼 도시내의 각종일을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물장사, 오물치우는 일, 거리에서 사람들을 나르는 일, 짐을 나르는 일, 음식물 장사 등은 거의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심할 경우에는 매매춘으로 들어가거나, 그래도 편하게 다시 노예상태나 다름없는 가내일꾼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의 등장으로 고용된 신규 노동력은 어린아이들과 부인노동의 등장이다.  이들은 남성노동의 감소를 가져와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전략의 하나로 일단 아이들의 노동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인 노동의 등장은 가족의 전략에서는 가장 최후의 전략의 하나였다.  물론 일부 선진적인 영국의 도시에서는 부인노동자들이 선진 여성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노동운동을 벌인 일이 있지만, 이 역시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었다.  가장 노동운동이 덜 필요한 이들이 나선 노동운동이라는 것이다.  즉 임금노동의 필요성이 적은 여성들이 나서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 인식과 행동의 한계일수 밖에 없다.  즉 인간은 자신의 객과적 처지를 알수는 없고, 그들의 불만은 항상 상승하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집단과 비교하고, 그럴때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아주 피곤하게 종일 일을 하고 남들과 말할 기회도 없고, 세계의 흐름에 대한 지식이나, 인적인 조직적인 네트워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시간도 없거니나, 설사 불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 고립되어 집합행동을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국에서 일찍이 여성노동과 어린이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노동시간은 19세기 초에는 하루에 12시간을 넘어섰고,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하는 제도였다.  이런 제도에서는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외에 다른 생각이나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맺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이 되면 독일을 선두로 해서 노동자들을 위한 정당이 등장한다.  맑스주의 이념이 공식적으로 인터내셔널을 통해 채책되고, 엥겔스, 그리고 카우츠키와 베른쉬타인을 통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현재의 독일의 사민당은 바로 189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된다.  당시에 사민당은 전체 유권자의 20%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농업문제, 수정주의 문제를 전환점으로 기폭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정당으로 지금도 유럽과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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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다

역사 2009. 3. 18. 08:19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단축, 그리고 임금의 향상이라는 문명의 진보를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의 진보라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수의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을 곧 알 수 있다.  즉 소위 자유 노동자들 또는 자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나, 당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귀족이나 지주계급은 아니었고, 이제 장거리 무역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한 이들, 그러면서도 봉건의 속박에서 풀려난 계층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였다.

노예들에 비해서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19세기는 전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노예제도가 철폐된 시기이다.  물론 프랑스는 조금 일찍, 미국은 남북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조선은 갑오경장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예가 조선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있었고, 미국의 경우에도 이미 19세기에 접어들면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 노예의 수도 격감하고, 그 값도 비싸진 상태에 있게 된다.  따라서 노예제도의 폐지와 별도로 실질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노예제도는 존속하기 어려워진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사건을 이해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동시간의 역사에서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중세시대나, 원시사회가 근대 문명의 발전단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의 노동과 풍족한 삶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짧은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노예 상태에서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해가 뜨면 일하기 시작하고, 하가질 때까지 일하고, 겨울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적어도 15분씩은 추가로 일하는 상태가 근대 초기의 모습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는 19세기 초에 들어서서 하루 12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노동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19세기 초 이전에는 12시간 노동이 대부분이었고, 19세기 초에 일부 선진적인 자각을 가진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제한을 말할 때에도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의 상태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부녀자, 아동 가릴 것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ㅏ.

가장 심한 착취가 일어나고, 가장 일찍 근대 공장이 발달한 영국에서 비로서 정책적으로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부녀자 노동, 아동 노동에 대한 규제를 시작한 것이 12시간 노동제의 도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를 새도 없는 부녀자, 어릴 때부터 공장에 들어와 10살이 넘으면 늙어버려 생식 능력이 사라져 버리는 아이들을 두고는 건강한 노동자를 다시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말로만 자유노동자이지, 실은 노예의 특징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노예제도가 유지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아무리 쾌적하고 일생이 보장되는 삶을 누린다해도 노예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없었고, 결혼의 자유도 없었고, 그래서 가능하면 자신의 일대에서 이승의 고통이 종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노동시간은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하루임금제도를 채택한 곳에서는 하루에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일을 시키는 것만이 고용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양이 오래 떠서 오랫동안 일을 시킬 수있는 여름에는 하루 임금제도를 채택하고, 낮이 짧은 겨울에는 성과급제를 실시하였다.  오늘날 5월 1일이 노동절이 된 것은 미국에서 1886년(?)에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였다.  현대인들은 일에 중독되어 사는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주로 미국, 영국의 청교도들이 만들어낸 관습이다.  일어나서 해가 떠 있을 동안에는 일을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의 하나님의 소명처럼 여겼다.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돈을 적게 버는 사람이 일을 적게하는 사회라고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사회를 관찰하고 주장한다.  아마도 미국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분명히 과거에 비해서는 노동에 대한 관념과 여가에 관념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조선은 아직 19세기에 그다지 시간에 대한 관념이 발달되어 있지 못했다.  일본에 지난해 말에 방문해서 오오다와라 성의 박물관에 가보니,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에 휴대용 해시계같은 것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시간관념이 일찍 발달한 것을 알 수있다.  우리의 경우에 조선시간 조정의 시간관념은 아직 아침부터 일찍 3-4시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오락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현재의 근무체제와 조선시대의 관료들, 아니면 공식 기관의 근무체제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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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과 가내공업이 의존해서 발달한다.

역사 2009. 3. 13. 11:50
19세기 서구의 산업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면적인 분석을 피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는 우리가 보통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주요한 항목들이 전체 사회를 지배하면서 전일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것이 비자본(또는 전자본)주의적과 결합하고, 서로 이용하고 착취하고, 수탈당하는 가운데 확산되고 수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저발전의 발전이나, 세계체제론의 관점 또는 역사적 발전으로서의 자본주의라는 관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공장체제의 발전과정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벌어지고있는 공장내 하청, 파견노동, 소사장제, 외부하청, 또는 과거의 선대제와 비슷한 방식까지 실은 전자본주의나 비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불가피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의 산업발전은 이미 1600년대부터 시작되어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모직산업이 발전하여 양을 키우고 이를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고 옷을 제작하였다.  옷을 제작하는 의류산업은 대부분 매우 영세한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공장이라는 것은 아직 증기기관이나 전기가 도입되어 기계를 움직이는 형태라기보다는 풍력이나 수력, 또는 동물의 힘을 이용하여 기계를 돌리는 형태였다.  물론 기계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17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지만 점진적으로 기계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당시의 공장제도는 물론 장인과 도제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힘은 1800년대 초반되어서야 꺽이고 심지어는 소위 기계파괴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1800년대 초반 이전의 단계는 장인과 도제에 의한 생산이었다고 한다면 1800년대 초반에는 기계가 도입되어 장인과 도제가 아닌 새로운 기술과 숙련제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숙련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도제제도는 아닌 새로운 형태라는 점이 중요하다.  기계는 여전히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었고, 상당정도는 어린이나 부녀자와 같은 힘없는 사람이거나, 농촌에서 갓 올라온 이농자가 고용되어도 쉽게 적용할 정도도 있었지만(맑스나 엥걸스가 묘사한 바 처럼),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숙련과 교육을 통해 높은 생산성을 올림으로써 이들에 의존한 공장운영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1820-30년대는 따라서 영국에서는 공장과 계급, 그리고 정치제도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공장내에서는 장인의 와해와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분화, 장인의 노동자 계급화, 숙련노동자의 고임금화, 저숙련노동자의 비참한 생활, 사회적 불안에 따른 영국의 선거법 개정(평등을 강조)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 모직이 아닌 면직 산업의 발전과 괘를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즉 미국 남부지역에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의 목화밭이 형성됨으로써 이제 값싼 옷감을 만들어 낼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미국은 1800년대 초반만 해도 아직 공장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중반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구 유럽대륙에서 저임 노동력, 기존 계급관계나 관습에 때 뭍지 않은 참신한 노동력이 등장함으로써 기계화, 대규모 공장 경영이 가능해지고, 노동자들의 단결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선호하는 노동자 군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미국은 바로 소수의 인종적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외하고는, 인종적 분열과 과거 경험과의 단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본가들이 손쉽게 노동자들을 수취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19세기말에 이르르면 미국은 서서히 철강산업이라는 든가에서 근대적 경영기법이라 불리우는 기계제의 도입과 이에 따른 작업제도의 개편이 장인노동자들의 저항 없이 진행되게 된다.  경영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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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 노동에 대한 논쟁과 조사를 자극했다.

역사 2009. 3. 12. 14:06
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노동자에 대한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현재 우리는 세계의 공장이라는 표현은 중국을 가리킨다) 영국은 숙련 노동자, 그리고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 숙련노동자들의 해체, 유년, 부녀 노동자가 등장한다. 장시간의 노동시간뿐만이 아니라, 이들 가구들이 빈곤에 허덕이며, 부랑자와 거지가 들끓고,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게 된다.  이럴때 정부와 일부 선량한 자본가들이 돈을 내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사를 개시한다.  정부가 한 것의 유명한 것들은 1900년대 초반이 이루어져서 나중에 맑스의 자본론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영국에서 새로운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입안하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현실을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적 전략으로 후진 식민시장을 통해 노동자들이 혜택을 받아 실질임금이 올라가는가 하면, 심지어는 상층 일부에 대해서는 나중에 레닌에 의해 노동귀족이라고 불릴 정도의 상류계층이 등장한다.  반면에 전반적인 노동자들의 상황은 특히 해외에서 이민자들이나, 농촌지역에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이때 영국의 해운회사를 운영하는 Booth는 영국 런던의 빈곤을 조사하는 대규모 프로잭트를 시행하고 책으로 17권을 펴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르 쁠레가 사회조사를 시행하게 된다. 물론 소설가 에밀졸라는 광산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과 저항을 그리는 소설 레미저라블을 저술하기고 한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의 시기는 사회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시기이다.

상당수의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에 돈을 내어 놓는다.  카네기 재단이 설립되고, 폐결핵을 고치기 위한 자선사업이 진행된다.  그럴정도도 자본가들이 보기에 노동자들의 재생산이 어려울 정도로, 아니면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노동자들의 생활이 비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우리는 현재 맑스의 자본론, 엥겔스의 1844년의 영국 노동자들의 생활상태, 또는 후에 1963년에 쓰여진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당시의 영국 노동자들의 상태의 일부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회조사를 정책에 사용하는 관행은 이후 특히 도시의 빈민층이나 주택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사회조사운동"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사회학에서는 1930년대 초반에 발표된 라자스펠트의 오스트리아에 있는 한 마을의 실업 상태를 현지 관찰과 각종 자료로 조사한 것으로 휙기적인 사건으로 치고 있지만, 이미 이전에 상당한 향의 조사 자료와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있다.

같은 시기에 레닌은 제 2 인터내셔날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서 민족주의, 또는 기회주의, 수정주의 등으로 흐르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결국은 제국주의 강국 내에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식민지국가의 노동자와의 구분을 시도하게 된다.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동귀족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노동자 계급내의 높은 소득을 받는 계층이라는 것 뿐만아니라, 이들이 경제주의, 편협한 자기이익주의, 상류계층을 모방하는 관행을 발전시킨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런데 레닌은 이를 넘어서서 이것이 노동자들의 국제연대, 아니 국내 노동자들의 대동단결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태도, 그리고 최근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발생한 많은 노동조합이 이명박이 싫어하는 자신들의 사장을 내 쫓는데 동조하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의 노동자들도 레닌이 말한 노동귀족적 경향이 매우 강하구나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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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비용이 경제성장을 좌우한다.

역사 2009. 3. 6. 08:17

제도경제학자들이 새로이 해석하는 경제성장의 동력은 단순한 요소 투입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물적 제도적 거래비용의 절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자유로운 시장 거래라는 개념일 뿐만아니라, 서로 모르는사람들이 만나서 장기적인 물적 거래 또는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드는 데 있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은 상호간에 신뢰하고 믿음을 갖고 거래하기보다는 속이고 단기적인 이익을 갖고 떠나는 것이 유리한 전략일 수 있다.  또는 계속 시장에서 거래를 한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거래 상대자를 바꾸거나 장기적인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높다.

이런 불신 가득한 시장거개를 방지할 수 있는 주체는 거래 상대자들이 아니라 국가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즉 국가가 지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시장거래를 확보하기 위한 기준의 확보, 이를 규제할 수 있는 감시능력, 기록, 사후적인 처벌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시장거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19세기에 세계 여러나라가 모두 경제성장 전략을 취했을때 왜 초기에는 영국이, 후기에는 미국이 경제성장에 성공했는가를 밝힐 때 이러한 논리를 적용하기도 한다.  단순하고 모든 거래 당사자들이 이해할 수있는 기준(규율, 법),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물건에 대한 측정,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능력), 감시한 결과를 기록하고 분류하여 처벌이 가능하고 반복적으로 기준을 어긴 사람에 대한 과중한 처벌을 할 수있는 국가의 능력(관료제의 발달), 처벌할 수 있는 사법체계, 관료들을 통제할 수있는 국가의 능력, 정치쳬계에서 민주적으로 각계각층이 참여함으로써 기준을 시장거래를 원활하게 하고 행위자들이 이를 정서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는 세금을 통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세금이 많이 걷혀도 관료제를 비효율적으로 운영하면 이들을 운영하느 데 들어간다거나, 관료제 자체가 매우 자의적으로 운영되어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조선조 말기의 사회는 수령이 곧 법률집행기관이었고, 왕조는 국가와 왕조를 구분하지 않고, 재정을 운영하여 왕조조차도 국가 재정을 책임지지 않았다.  즉 국가는 빈곤하여 군대도 관료제의 운영경비도 마련하지 못하였지만, 왕조는 여전히 궁궐을 짓고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사치와 허례에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료들이나 수령들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각자의 권한을 갖고 자의적으로 수탈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조선조 말의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업이나,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었고, 너무나 많은 수탈이 있었으므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사업(경제성장의 기반)을 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은 1500년경에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장거리 식미지를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현지의 지배체제를 위임하지 못하고, 본국의 왕조가 직접 지배함으로써 원격 식민지의 관료체제를 통제하기 위한 각종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어 내었다.  많은 규칙은 정교한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각종 피할 수있는 예외적인 조항이 많아지고,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관료)에 의해 자의적으로 운용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스페인은 지주들(공업원료 생산자, 길드)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외부의 새로운 진입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따라서 초기의 강력한 제국은 그 활력을 잃고 네덜란드, 영국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반면에 미국은 단순한 법률체계를 기반으로 서부 개척에 나섰고, 정치적으로도 사회환경적으로 신규 인력에 의한 , 그리고 신규 자본들이 투자하는데 거래 비용이 들지 않았다는 점을 미국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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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기반위에 건설된 부국들

역사 2009. 3. 5. 11:14

19세기는 국가나 시장의 측면에서 팽창, 침략,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 시작된 해였었다.  이전의 사회는 단순히 국가의 야욕이나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에 의해 민족의 이동과 이민족의 침략이 행해졌다면, 19세기 접어들어서는 마치 침략이 국가나 한 사회경제의 생존조건인 것으로 드런나 시기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뒤밧침하는 이론들이 진화론, 약육강식, 시장경제론(분업과 무역에 의한 상대적 이익), 문명화 이론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유럽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라고 명칭을 붙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이 왜 팽창을 자신의 중요한 생존전략으로 내세웠는가에 있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유럽이 해외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고 하여도, 이들의 식민지 경영은 실제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원료공급지로서의 천연자원의 수탈, 제조업 공산품 시장의 개척, 금융자본의 투자처로서의 기능은 미흡했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이들 국가에 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반 투자에 많은 돈이 들었다고 주장한다.  즉 도로나 철도의 건설, 항구와 공항, 이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의 고용 등에 많은 돈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강대국들은 서로 상대국들끼리 무역양이 많고 식민지 국가와의 무역량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양이 적다고 중요치 않다는 주장은 임계점, 위험 회피 장의 마련, 통제 가능한 경제 영역의 구축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즉 식민지라는 것이 산업선진국의 주요 무역 상대는 아닐지 몰라도 이들이 없으면 안전하게 다른 강대국과 경쟁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경쟁을 위해서는 내적으로 기술개발이나, 제도 혁신, 자본투자, 노동력의 강화나 외연적 확장을 통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에 이는 사실상 쉽지 않은 전략이다.  따라서 손쉽게 이를 강요할 수 있는 방식은 식민지에서 아주 값싸게 원료를 수탈하거나(강압적인 방식이나 사기적인 수법에 의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내적인 혁신을 이루어내는 것보다 휠씬 값싼 방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 제국들이 19세기에 해외 식민지 쟁탈에 사활을 건 것은 그들 서구 제국끼리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전략이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것을 당하는 나라나 공동체, 인간들은 노예상태로 빠진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서구 내부에서도 모든 이들이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상당수의 프롤레타리아트들(임금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상승이라는 혜택을 받는다.  19세기 전반의 전반적인 기술 숙련 장인 노동자들의 지위가 약화되면서 농촌에서 풀려나온 1세대 임금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신분상의 구속에서 해방되고 어느정도 살만한 임금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자본가들 역시 소규모 수공업적인 자본가들이 이제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여 기계와 설비를 설치하여 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기술을 배워나가야 했다.  벌써 19세기 후반되면 독점자본가들, 대규모 자본가들이 나타나 이들이 서구 사회의 국가정책을 요리하고, 노동자들의 탄압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자선단체를 만들어서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대학들도 세우고, 재단도 만들어서 너그러운 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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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하여 자치 능력이 없다.

역사 2009. 3. 4. 07:28
19세기는 서구 열강세력들이 본격적으로 국가를 병합하여 직접 통치의 시대로 접어든 시기이다. 이전에는 무역 독점이나, 동인도 회사, 서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지, 한 국가가 직접적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1894녀부터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뿌리를 내리고 있던 스페인을 내쫓는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자 독립운동을 벌이던 필리핀인들은 미국과 손을 잡고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축출하는 전쟁에 참여한다.  마침내 미국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어서 미국은 같이 손잡고 스페인을 축출했던 필리핀인을 상대로 1898년에 압도적인 무력의 힘으로 살륙을 감행한다.  당시에 미국의 국회에서는 특히 상원에서는 필리핀을 지배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미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 중에 하나가 필리핀은 순진하지만, 자치 능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세한 문명을 가진 백인이 특히 앵글로 색슨인이 무지한 필리핀인을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주장이었다.

영국이 19세기 말에 인도를 병합하는 시기에 접어들어서, 인도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인도는 무슬림인 무굴제국에 의해 지배되던 국가체제를 갖고 있었다.  영국식민당국들은 무슬림과 힌두인들을 분열시키고, 상호 반목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시키려는 전략을 적절히 구사하고있었다.  즉 작은 단위의 마을이나, 지방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통치체제는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곧 의도했는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무슬림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2차세계대전 후에 인도대륙을 파키스탄, 버마를 분리 독립시킴으로서 해결된다.  지금도 방글라데쉬, 인디아, 파키스탄의 갈등과 대립이 격심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갈등일 뿐만 아니라, 식민 강대국들이 이를 조장하고, 지원함으로써 더 커졌다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에 영국은 소수인 무슬림을 지원하여 힌두교들의 독립을 막았던 것이다.

프랑스도 아프리카 중 북부의 서편에 대규모로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도 역시 프랑스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에도 프랑스 내에서 과연 식민지배가 프랑스의 헌법정신과 일치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결론은 지배하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므로 신이 부여한 의무라는 것으로 나온다. 

나는 아직도 종종 서구인들이 우리들에게 순진하다, 친절하다 라는 말을 자주하고 이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에 대해 놀란다.  순진하다와 친절하다라는 말은 합리적인 계산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제대로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구인들에게 순진하다는 표현은 바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킬 줄 알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행동과 안의 감정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1945년 직후에 한국을 지배한 맥아더 장군은 한국민들은 아직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할 때 도 같은 이유였고, 1980년 광민주항쟁때에도 당시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이 한국인은 쥐와 같아 조금만 동요가 있었도 가장 먼저 도망간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우리의 현재는 어떤가?  지나치게 친절하고,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는 거만한 그런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행동과 감정을 표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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