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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2010. 4. 7. 10:52
신경민 앵커가 그만 두던날,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날렸다. 고생했다, 시간되면 마산에 한번 와라.
지금 복잡하다. 나중에 보자라는 식으로 답이 온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에 책도 나오고 해서, 다시 한번 저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한번 오는 것으로 추진했더니, 잘 될 듯하다, 다시 무산되었다.
예전에 경남대 사회학과 학생들의 진로를 위한 강의에 한 번 초대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강의에서도, "화면의 사실과 현장의 진실"에대해 말한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언론게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통해 진실을 파악하는 시각과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적 시각이 유용한다고 강의한 것 같다.
오늘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책은 라디오 뉴스 진행자와 테레비젼 앵커로서 한 클로징을 모아놓으면서, 그 이면에 깔린 그의 생각을 넣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는 국제전문기자로서 활동을 많이하였으므로, 해외의 언론, 정부의 위기대처나 발표방식, 정보의 수집과 해석 등에 대해 꿰 뚫고 있다.
그런 내용들이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우리가 놓쳐버리기 쉬운 사건의 정보, 사실, 진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실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뉴스를 듣기만 하지 말고,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시사 2010. 3. 27. 10:58
어제 밤에 서해해상에서 우리 초계함이 침몰한다는 뉴스를 간간히 보면서, 동시에 누나의 3월을 시청하였다. 필자는 지난 17일에도 3.15아트 센터에서 뮤지칼 "삼월이 오면"을 보았다. 필자는 이미 3.15의거에 대해 필자가 참여한 3.15의거사의 후사 부분을 집필하고, 3월 15일의 사건에 대한 2편의 논문, 그리고 2차 의거와 대강을 노트하여, 한권의 책 [근대마산](2004, 경남대 출판부)를 출간한 바 있다. 또 현재 3.15 50주년 기념사업 분야 중 학술편찬 분과를 맡아 일을 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이에 비해 세세한 사실부터, 역사적 진실을 찾는 제 주력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뮤지칼이나, 드라마는 분명이 부분적 사실에 근거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재 우리가 부딪친 역사적 정신을 되살리려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의 삶이든, 만나서 얘기하면, 그야말로 한편의 장편 대하 소설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하 소설을 만들만한 역사적 배경을 깔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냥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 대한민국의 지배층의 동향, 미국에의 의존도, 주변 세계의 동향을 동시에 파악하여 그 의미를 찾는다면 대하소설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뮤지칼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보리수 다방의 마담-오성원-방직공장 여직공을 축으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누나의 삼월 역시 다방 레지-동생(북마산 방화범으로 몰린 민주당 당직자 자제분)-민주당의 젊은 당원-경비주임이자 당시 김주열의 시체를 유기한 박종표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축으로 삼고 있다. 흥미로왔던 점은 두편 모두 다방의 마담과 레지를 나레이터로 등장시켜, 마산의 역사는 다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진실을 어느정도 보여주고 있다. 신마산의 외교구락부 같은 다방은 강자들의 거래처로, 구마산의 다방들은 서민들의 애환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진실을 담고있다. 뮤지칼이 상대적으로 마산의 떠돌이들을 주축으로 삼은데 비해, 누나의 삼월 역시, 마산의 지식인(민주당의 젊은 당원)과 하층민(레지와 그의 동생), 그러나 아마도 박종표는 마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외부의 억압을 담당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그래서 대결구도를 외부인의 억압과 지식인과 하층민 내부인의 대결구도로 그려놓았다. 어느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내부의 지배자들인 반공청년단, 내부의 정치인들(자유당), 공무원들의 강력한 도움이 있었다는 점도 기억하는 것이좋을 것이다. 반면에 내부의 저항자 그룹 중에 하층민과 학생들이 부각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역사적 진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볼 수있다.
3.15의거에 대한 기록은 김태룡(1962)의 것이 가장 내부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외부자의 관점에서 3월 15일 의거 소식을 서울에서듣고 동아일보 기자로서 취재한 이강현(1960, 새새벽 5월호 소수)의 글은 외부자가 마산에 도착한 16일부터 13여일을 머물면서 취재한 것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외부자의 관점이기는 하지만, 가장 충실한 기록으로 볼 수있다. 마산일보사의 책(1960. 6. 15일까지의 기록을 신문기사와 자료를 중심으로 모은 것)은 당시의 신문 보도를 통한 인쇄된 기록을 수집하여 놓은 것이다. 이들 세가지 자료가 원자료로 볼수 있으며, 그후의 증언과 일기를 읽어보면, 현실은 실은 이번에 나타난 작가의 상상력보다도 더 진실하다는 점을 알 수있다. 상상력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사실감)이 아니라,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느낌과 고뇌, 공포감과 용감성, 이웃에 대한 정의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보다 피비린내, 총성과 고문의 신음소리, 총을 쏠때의 공포감,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양 2010. 3. 18. 10:08
역사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은 항상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은 항상 공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현장의 사실이 드러날 수록 드는 생각이었다. 어제 3.15 아트 센터 대공연장에서 문종근 제작 연출의 창작 뮤지컬 “삼월이 오면이”을 관람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오성원에 대한 기록과 후세의 평가는 그저 하나의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편입시키지는 못하였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시청앞에서 총을 맞고 죽어간 이들 가운데에는 의외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3월 16일부터 28일까지 마산에 머물면서 취재한 기록을 남긴 동아일보 이강현 기자는 “이번에 희생된 7명의 유가족집을 찾아가 보니, 공교롭게도 거의 모두가 조석을 걱정하는 빈한한 가정들이었으며, 그런 환경속에서도 부모들은 가르쳐 보겠다고 가진 고생을 무릅쓰고 피땀을 흘린 집안 뿐이었다”(1960. 4월 10일 발행한 잡지 [새벽] 5월호: 69).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어려운 집안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가장 격렬히 시위에 참여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룡 (1964, 3.15 마산의거의 역사적 고찰, 마산시사 사료집 제 1집, 마산시사 편찬위원회: 259)은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3월 15일 최후까지 저항한 이들은 밤늦게 무학국민학교를 탈출한 50여명의 추산공원으로 올라가자, 창원군청을 파괴하고 돌아오는 데모대와 합류하여, 같이 화장장(자산동)을 지나 서원골을 둘러, 계곡을 따라 내려와서 마포중학교(의신 여중) 교정에 집결하니, 200여명이 남았다. 이들은 “학생과 구두닦이, 직공 등으로 구성된 정예들이다”.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나, 열심히 살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던 이들이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가장 강렬히 희망하는 이들이 격렬히 저항하였고, 또 이들에 의해 3.15는 살아있고, 민주주의는 그 구렁텅이에서 구출된 것이다.
오성원 역시, 고은의 만인보에 등장한다(23 : 191). “살아 있을 때 국숫집 지나가면 국수가 먹고 싶었다 구름을 보면 구름이 되고 싶었다”. 어제 공연에서 오성원이 부른 노래 “빈 몸 하나”의 가사에 구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보리수 다방의 서마담이 성원이에게 국수를 제공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수와 구름. 먹을 것과 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국수와 꿈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까?
오성원은 구두닦이이다. 어제의 공연에서는 주제가로 꼽을 만한 노래로 나는 ‘슈사인 보이’와 ‘구두닦이 헌장’ 중에서 고르고 싶다. 구두 닦이 경력 5년차의 21세 오성원은 “14세 되던 해에 삼촌집을 나와 구두닦이로 자립생활을 하여왔다. 이날 밤 오군도 이 대열에 참여하였다가 총탄에 쓰러진 것이다. 원래 고아이니만치 누구하나 오군의 시체를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알게 된 동료 구두닦이들이 푼돈을 모아 광목도 끊고 베도 사고 관도 가져다가 오군이 어렸을 때 뛰 놀던 산 중턱에다 장례를 치러주었다”(이강현, 1960: 70). ‘담배 파는 10대의 직업 소년 10명은 담배장수 밑천의 한귀를 짤라 관을 샀다. 그들은 경관에 사살된 동료 오성원의 상여를 메였다. 10대 소년의 장열은 눈물 바다가 된 거리를 구비쳐 흘러, ’길가는 나그네여 여기 길잃은 민주주의를 찾으려다, 3월 15일밤 무참히도 떨어진 21년의 꽃봉오리가 누워 있음을 전해다오‘라는 비문이 새겨진 비가 설 무덤을 향하여 올라갔다“(김태룡, 1964:286-287). 1939년생, 창원 팔룡동에서 출생하여 다시 팔룡동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들이 길을 찾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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