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교양 2010. 3. 16. 09:57

최근 슈피겔지의 기사(Spiegel, 2010, "Interview with Defense Expert P.W. Singer, The Soldiers call ite war porn, Mar. 12)에 따르면, 미국이 아프키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는 방식 중에 하나는 무인 비행기를 이용하여 폭격을 하고, 저격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인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미국의 한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직원들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매일 출퇴근하면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에 대해,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전쟁터의 피비린내를 맡지 않고 전쟁을 벌이므로, 이들은 마치 디비털 게임을 하듯이 별로 죄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믿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육체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사격이나 폭격의 목표물은 보다 상세히 보면서 죽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일 사람들이 모습을 확인하고, 죽이고, 그리고 다시 죽었는지 얼굴을 확인하면서, 살인을 하는 것은 설사 피냄새를 맡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폭력의 사회학에서 랜달 콜린스가 관료제적인 폭력을 말하면서, 비행기에서의 폭격, 멀리 버턴을 눌러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직접 죽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므로, 죄책감이 줄어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익숙해진 컴퓨터 게임에 의한 살인이라고 해도,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상황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아직 익숙해진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이제 우리는 인류가 모두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류애를 최고의 도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박경리의 1959년도 작, [표류도]를 읽으면서, 주인공 마돈나 다방의 마담 현희가, 결국 애인 찬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을 보면서, 살인의 기억은 얼마나, 개인의 삶에 각인되어 있는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애인 찬수는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인민군 치하에서 서울대 의과대 정문 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나는 내 얼굴에 핏기아 걷히는 것을 느끼며 정문을 향하여 달음질 쳤다. 정문을 나서는 동시에 나는 찬수가 걸어갔을 왼편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골목길로 H의 옆모습이 막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나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이마 위에 피를 흘리고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는 찬수, 찬수를 안아 일으켰을때 그의 머리는 내무릎 위에 푹 떨어졌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손, 길바닥에 부딪쳐서 산산이 바스라진 시체. 일식처럼 태양은 내 視界에서 꺼져가는 것이다“(6장).

 결국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다방안에서 미국인에게 어떤 다방 손님이 희롱하고 거래하는 말을 듣는 순간이다. 표현은 현희의 관점에서 마치 실존주의 문학에서 처럼 표현되어 있다.
“빈 청동 꽃병을 와락 잡아 당겼다. 오직 최강사의 뒤통수만이 흑점이 되어 뚜렷하게 나타난다.
순간 마돈나의 창문들이 모두 뒤틀리어 공중에서 교차했고, 막막한 속에 시뻘건 불덩어리가 출출 쏟아진다. 뒤통수, 까만 점이 흔들리며 앞으로 넘어진다. 보이지 않는다“(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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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 내 담론의 특징

교양 2010. 3. 16. 07:13

1950년대 후반 서울 중심지의 다방 모습에 대해서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묘사를 볼 수 있다. “정치를 장사하고 다니는 무리들의 수작이나, 예술가라는 골패를 앞가슴에 달고서 한밑천 잡아보자고 드는 족속들이나, 서커스의 재주부리는 원숭이 처럼 정의나 이념같은 것을 붓대로 재주부리는 것 쯤으로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협잡, 국록을 먹는 관공리들의 의자를 싸고 도는 장사 수법, 심지어 똥차에서 쏟아지는 폭리를 노리고 이권을 쟁탈하는 데도 점찮은 무슨 단체의 인사나 무슨 유명인들의 귀부인(?)들이 돈보따리를 안고 다방에서 면담을 하는 것이다”(박경리, 1959/1980, “표류도”, 13장, 박경리 문학전집 12권, 지식산업사).

1960년 마산 남성동 부근의 보리수 다방 부근에서 오상원 이라는 구두닦이를 소개하는 글 속에서 우무석은 다음과 같이 다방을 평가한다.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표상에서 다방이라는 장소이미지는 유달리 남다르다. 다방의 풍경에서 시대별 정서를 찾을 수 있고 특정한 한 세대의 감수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방은 단순한 약속과 만남의 공간만이 아니라 정보교환과 상호소통의 담론구조를 지닌 일종의 아고라였다. 다방이란 공간에서 당대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심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잠재했기에 사회혁명의 바탕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방은 신산스러운 현실 앞에 놓인 절망과 고통에 찬 삶을 정신적으로 서로 위무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다방에서 죽치고 있었을 터”(우무석, 2010, “마산의 다방문화사”, 2. 17일자, 도민일보).

1970년대 후반 마산에는 약 150여개의 다방이 산재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마산시 통계연보, 1979). 이 당시의 다방에 대해 평가하면서 필자는 1979년의 마산민중항쟁을 기록하면서 “적어도 다방이라는 곳이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쉽게 사회적인 정보를 교환하면서 비판적인 사고를 기르는 장소인 것 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이은진, 2008, 1979년 마산의 부마민주항쟁, 불휘: 85).

최근에 한 사회학자가 평가한 우리나라의 다방에 대한 평가를 보면, 프랑스나 영국과 같이 비판적인 공론이 형성되기 보다는 쾌락적인 장소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글을 본 것 같다. 그러나 서양이나, 우리나라라 공통점은 전적으로 공적인 장소도 아니고, 사적인 장소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회색지대는 완전히 공적 지대로 아니고 작은 폐쇄적 공동체도 아닌 전이지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가족을 만나는 장소도 아니며, 그렇다고 직장의 상사와 공적인 일을 의논하는 장소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즉 다방은 집안일의 공적인 행사는 치르기도 한다. 먼 친척이 오거나, 아니면 상견례를 할 때, 아니면 회사에서 직적 상의하기 어려운 것들은 다방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보완적인 기능은 달리 표현하면,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로운 해결을 모색하는 싹이 트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시대의 고민이 모두 모이고,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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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에 나타난 마산의거

교양 2010. 3. 15. 16:08
2006년 3월에 출간된 고은, 만인보 21-23권은 1960년대 전후의 혁명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때 혁명이라 함은 아마도, 1960년 3-4월 혁명과 1961년의 군사 쿠데타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고은 시인께서 그리 생각하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시집 3권에는 반복적으로 쪼는 지속적으로 마산의 열사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김주열과 그 일가를 그리고 있다.  시는 대개 당시 살던 사람들의 감정을 표출하는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김주열에 대해서는  21: 28-30, " 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김주열의 형인 김광렬 21: 238-239, "경찰의 총사격이 이어졌다.  뒷산으로 흩어졌다.  주열은 없고, 광열은 있다."
김주열의 모친인 권찬주 여사 22: 28-29, "그 뒤 죽은 아들이 바다 및 홍합대신 떠 올랐다.  그 어머니에게 죽은 아들도 산 아들이었다."
김주열의 시체를 낚는 모습 21: 276-277, "김주열의 시체였다.  경찰이 던져버린 시체가 26일만에 밀려왔다.  26일만에 떠올랐다.  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어부 김기돈, 22: 26-27, "거룻배가 기우뚱 거렸다".

때로는 시나 문학이 사회과학이상으로 현실을 잘 표현한다고 느낄때가 있다. 역사적 감수성이란 오랜 정신적인 수양이 있어야만 되는 것 같다.  아마 고은 시인은 1960년 3-4월 마산의거를 시대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개인들의 이력을 많이 들여다 보신 것 같다.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열사들은 사후에 너무 우상화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도 사람이었고, 무서웠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부모님들이 그냥 데모를 나가면 나가지 말라고 말리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데모도 하지 않으면, 비겁자가 되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우리를 저렇게 무시하는 데 사내자식이 배운 놈이, 아니 이 시대에서 두발 걷고, 눈을 뜨고 사는 놈이 그러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만인보에는 김효덕의 아버지, 21: 40-41,
김효덕의 어머니, 21: 214-215
김영호의 부친인 김위술, 21: 42-43
김영호(3.15에 사망), 21: 216-217
김영호 (마산 중앙중 3년)의 친구, 22: 25
의규군의 아버지, 21: 62-63
아버지의 염불 (전의규의 부), 21: 224-225
영준의 어머니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21: 220-221
김영준, 22: 103-105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21:60-61
김용실, 22: 66, 23: 168-169
김영길, 22: 77
효덕이, 22: 82-83, 90-91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21: 76-78
노원자 (마산 제일여고), 21: 80-81
김종술 (마산 동중 3년), 22: 19
김용준, 23: 64-65
구두닦이 오성원, 21: 46-47
오성원, 23: 191
박철수 (국민학생 사망), 21: 310-311
유대수, 22: 201-203
두 혼백, 21: 222-223
두 주검, 22: 119
화물차 감옥 (유병호의 경험), 21: 252-254
김평도 (총상), 22: 42-43
옥채금 (김평도의 부인), 23: 289-291

신형사 (마산경찰서 사찰계), 21: 245-246
박종표, 23: 80-81
등 이상이 마산의거와 관련된 인물들을 만인보에 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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