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거되었던 12명 호송 - 통영 부협의회 위원의 한국인 모독발언에 대한 저항 27. 5. 17일자 22명, 마산으로 이감, 통영사건 관계자, 마산 형무소로: 1차 시위에 이어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다시 발생 27. 6. 8일자 통영시위사건, 공판일 결정, 오는 22일 마산지청에서, 27. 11. 11일자
일본에서 해방되고 2개월 후에 태어난 조갑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귀환한 가족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일본의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월간 조선, 1984년 8월호에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 일본 현지 특파 취재"에 많은 노력을 들려서 한국에서 근무했던 총독부 관리들을 주로 일한 협회를 통해 만나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기록물이다. 일본 관리들은 주로, 일본이 한국에 물적 여건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는 것과 인적으로도 교육이나 조직 생활을 통해 근검절약, 절도, 공적인 일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갑제는 내용자체에 대한 반박은 별로 없다. 아마도 자신이 가정생활을 통해서 이런 점을 수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한국인(일본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일제는 조선인이라고 불렀다)들은 상대적으로 이런 점이 부족하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고 있다. 또는 일본관리들의 일부는 한국인 협력자들(우리가 친일파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책임을 넘기고 있다. 즉 친일파들이 일제가 요구한 것을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집행을 해서 한국의 피지배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다는 식이다.
이에 대한 반박 논리로 조갑제는 "그러나 심하게 말한다면 '강간으로 생긴 아들도 유산은 유산이다'는 얘기로 해석될수 있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들이 유산인것 들림없지만 그것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294쪽)라고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는 아무말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읽으면서, 아 당시의 조갑제 나이는 40이 되었지만, 아직 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 질문하면, 이런 일을 당할 수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취재자가 취재를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실 제시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이 없었기에 그랳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병합, 한국인들에게 이미 끓어 오르고 있는 교육열과 실업에의 기풍을 막은 점, 일제를 통해 조선인의 문화적인 역량을 말살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점, 한국인들끼리 분열하도록 통치한 점에 대한 인식을 배우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요즈음의 역사적인 자료는 이미 많이 밝혀져 있어, 오래 전에 배운 사람들은 이런 점을 제대로 알기 어려울 것 같다. 필자도 한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은 항상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되는 것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역사 해석의 고루함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조갑제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갑제의 친일 옹호 논리가 대강 나오고 있다. 즉 친일은 당시의 대세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 당시에 한국땅에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이었다는 논리이다. 이를 욕하지 말자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공동체를 배반하여 사욕을 취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런 공동체는 쉽게 망한다는 점을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만일 친일한 자를 사회적으로 용서한다면, 이런 사회는 자신의 공동체 조국을 팔아 먹는 것을 장려한다고는 볼수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먹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런 공동체는 꼭 유지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더 응집력이 공동체에 먹히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순리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같은 민족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같은 운면을 지닌 것으로 친다면, 적어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처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란 인간성을 말한다. 인간적인 배신,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 같은 말이다. 역사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도둑질이나 독재나, 탄압을 아주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적으로 하는 이들이다. 도둑은 밤에 자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부시대통령은 금욕정신으로 무장하여 아침마다 기도하고, 술도 먹지 않고 담배도 치지 않지만, 열심히 무고한 이락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선 던 것이다. 대부분의 독재자들과 탄압자들은 금욕적인 사람들이었다.
1920년대의 미국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이자,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이를 뒷받침했다.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상품과 인간의 이동을 빠르게 했을뿐 아니라, 정보의 소통의 속도 역시 빠르고, 대량으로 가능케했다. 인간에게는 신체의 이동만이 아니라, 정보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상상 가능하고,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를 처리하여 하루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대의 사회를 한국의 대량소비시대의 사회와비교하는 경우에는 대개 소비자 내구재의 범람과 동시에 자동차를 개별가구가 보유하게 된 것,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수용, 신용카드에 의한 소비, 국내외 여행의 일상화 등을 꼽게 될 것이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80년대, 1990년대의 한국사회와 그 모습이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다(김형곤, ?: 91). 이에 더하여, 혹자는 대량소비에 이어진 경제위기를 연상하면서, 비슷한 점, 혹은 무절제한 소비가 가져온 재앙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점도 많이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민주화,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은 점(물론 노동시간의 단축은 1990년을 전후하여 주로 화이트 칼라 층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주장하여 법률적인 단축은 이루어 졌으나, 실제 공장의 근무시간에서는 줄어들지 않았다), 따라서 여가의 활용이 미국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은 여가의 활용, 특히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시청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가정일을 위한 기계들의 도입(전기다리미, 진공소제기, 그릇세척기, 세탁기, 냉장고 등)은 늦어졌다. 한국은 그보다는 보다 혼합적이다. 중요한 점은 한국의 여가는 텔레비전에 더 많이 의존하였으며, 여성들을 위한 가전제품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원만하였다는 점이다.
1920년대의 미국은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소위 시공간의 압축을 정신적으로 느끼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자동차도 보급되었던 시기이다. 신문과 잡지, 라디오의 등장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여기에는 자동차의 보급으로 촉발된 교외 주택의 광고는 물론이고, 대량소비를 위한 광고도 큰 몫을 차지한다. 당시의 미국은 한편으로는 금주법을 지속시켜, 정치적으로는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기록될 지 몰라도, 광고 문안은 다분히 감성적인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의 미국의 광고보다는 현재의 우리의 광고와 매우 닮아 있다.
"보다 좋은 디자인과 설득적이고 리얼한 사진으로 상품을 소개하면서 당시의 광고 카피라이터는 상품의 특질과 잇점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이 언제나 바라고 있는 욕망인 '젊어지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지지 않고 싶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 등의 것을 상품과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가공의 남녀가 X비누를 사용하였더니, 운명이 바뀌었다든가, 인기 있는 사교계 인사가 눈을 가리고 담배맛을 본다거나, 영화배우 등의 인기인이 광고물품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김형곤, ?: 108).
라디오의 보급은 한편으로 상업적인 소비에 몰두하여 그들의 사회적인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소비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사회나 국가에 대한 공익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세계평화와 같은 이상주의적 사고보다는 현실적 가체에 집착하게 되었다"(김형곤, ?: 117). 그러나 라디의 효과는 단순하기 보다는 하나의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음성정보가 대량으로 보급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따라서 라디오의 보급은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에만 적합한 것만은 아니었고, 표준말의 보급, 말씨나 억양의 전국적인 통일을 향해 나갔고, 사고방식이나, 뉴스의 보급, 뉴스에 대한 해설, 음악의 보급, 쌍방향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의 편성을 통한 청자들의 참여 등을 통해 국가의 사상적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적인 감각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격적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어갔음을 뜻하며, 만약 미국이라는 국가의 통일이 무성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면 라디오와 함께 국가/민족의 시공간적 통일과제가 완성되었다고 볼수 있다"(강현두 외, 1997: 42).
"그보다는 라디오를 통한 국가적 통신망의 구축은 민족국가의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며, 가상공동체로서의 민족국가 개념을 확고히 인식됨으로써 근대적 시민, 혹은 정체의 대상으로 주체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기때문이다"(강현두 외, 1997: 42).
이 시기에 산업 심리학, 게임이론, 심리적인 고민을 담은 소설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심리가 이제 사회과학적 연구대상이자, 조작의 대상으로 떠 오르게 된다. 세상이 공간적으로 동시에 소식이 전해지고, 자동차, 기차, 비행기를 통한 여행이 가능해지고, 신문잡지, 라디오, 영화가 등장하여 정보의 유통이 많아지고, 빨라지자,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들은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강현두, 원용진, 전규찬, 1997, "대중매체의 시공간 재구성과 소비주체 형성: 1920년대 미국의 라디오 방송과 광고를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42, 1: 5-47 김형곤, ?, "1920년대 미국 소비 사회의 형성배경과 영향," [미국사 연구]: 91-120 Sue Bowden and Avner Offer, 1994, "Household appliances and the use of time: the United States and Britain since the 1920s," Economic History Review, XLVII, 4: 725-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