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통영의 폭동사건

역사/1920-29 2010. 3. 12. 07:05

사건의 경과

(1) 경상남도 평의원 김기정이 평의원 석상에서 "조선에서는 보통학교를 증설할 필요가 없으며, 교육도 필요하지 않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나면 사상이 악화되어 위험하므로 학교를 늘릴 필요가 없다" 주장하였다.
1927년 5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금일 조선인의 일반적 심리는 교육의 불급을 가장 한난사로 알뿐 아니라 위정자가 조금만 성의로 노력할 것 같으면 좀더 확충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이때에 그와 반대되는 언행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2) 1차 시위
이에 대해 통영시민은 대회를 열고 규탄하였으며, 성토대회와 진상보고회가 열렸다.
"그 결과 김기정의 도평의회 민선에도 영향이 있어서 낙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다시 이 사람을 관선 평의원으로 정하였었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3) 검거되었던 12명 호송 - 통영 부협의회 위원의 한국인 모독발언에 대한 저항 (중외일보, 1927. 5. 17일자)
"통영서에 제일 먼저 인치되었던 12명은 5월 14일 새벽 90여명의 경관대와 100여명의 재향군인, 소방, 청년단 등이 전후 좌우로 도열한 중에 마산으로 호송되었으며,
검거를 시작한 관헌은 아직도 그 손을 떼이지 않고, 계속하여 14일 오후 5시까지에 다시 여자 3명외 십수명을 피의자로 인치하였는데, 그 후 민중은 통영서와 지방법원 지청, 기타 판검사의 관사 등을 습겨할 형세를 보임으로 경찰은 한층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며,
14일 저녁때에는 마산상업학교 생도 다수가 통영에 돌아와 습격에 참가하였고, 또한 통영 보통학교 어린생도들이 제일선에 서서 돌을 던지는 등 과연 형용치 못한 비장한 광경을 보이었는바,
14일 밤에는 마산 기타의 지방으로 부터 다수한 민중이 응원을 하러 온다는 소문이 있어 일반 형세는 더욱 긴장하였으며,
14일 밤 9시경에 이르러서도 적지 않은 군중이 경찰서 앞에 집합하였으되, 그리 큰일에는 이르지 않았었더라".

(4) 2차 시위
"이러한 일반인의 의사와 감정에 합치되어 가지고 행동한 사람들이 검거되어서 예심에 까지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에 격앙된 것이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이와 같이 격앙된 민심에 피검거자가 단식을 실행함에 그 친척과 우인은 감정이 극도에 이른 것이요.  그 결과는 일찍이 듣기 어려운 파괴적 직접행동이 폭발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동아일보, 1927. 5. 17일자).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그 검속된 12동지를 내 놓으라고 경찰에 반항하다가, 소요죄 및 출판법 위반, 건물 파손 및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중외일보, 1927. 11. 11일자).  죄의 내용으로 보아서, 시위를 하면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경찰서나 기타 사법기관의 건물을 파손하고 저지하는 경찰과 격렬히 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매우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동원된 것으로 보이므로, 통영 민족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2명, 마산으로 이감, 통영사건 관계자, 마산 형무소로: 1차 시위에 이어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 다시 발생 (중외일보, 1927. 6. 8일자)
"5월 26일에 22명을 송국하였다가 6월 5일 아침에 경비선으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22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남성: 황덕윤(아마도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고, 또한 누구 외 몇명할 때 누구가 황덕윤으로 표기되고 있다), 황봉석, , 주경문, 이태원, 김상훈, 김동근, 김영중, 김위조, 김재륜, 김근조, 서상권, 박종한, 배봉지, 염원모, 양동세, 신전회, 문복만 이상 17명, 여성: 박갑이, 김작부, 최봉선 양, 강명환 여사, 주선이 여사 5명.

통영시위사건, 공판일 결정, 오는 22일 마산지청에서, (중외일보, 1927. 11. 11일자)
6월 18일자 기사에 비해, 인원을 황덕윤 외 23명이라고 표현하여, 위의 22명 외에 2명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총 24명이다.  1차 시위 12명, 2차 시위 24명으로 총 36명의 구속자가 발생한 사건이고, 여성도 5명이 포함되고, 피의자들의 성씨가 각기 다른 점으로 보아서, 광범위하게 시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잇다.


이런 통영시민들의 저항이 가능했던 점은 통영이 사전 전에 통영시민들의 잠재된 조직적 동원력과 의식 고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동아일보 1924. 10. 19일자와 같은 운동 내부의 능력에 대한 비판 기사도 실렸지만, 전반적으로는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조직력의 확산이 있었고, 또한 상호간에 비판과 알력이 심할 정도의 규모와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고 역설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영은 아직 암암한 칠야중이다.  같은 전선에선 동료끼리 간간이 싸움을 마지 않는다.  그리고 청년단이 있으나, 우리를 위함이 없을 뿐, 외라 유야무야중에 있고, 노동공제회가 있으나 간판뿐이다.  착취급에 앉은 몇몇이 중임을 맡아있다.  어찌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며,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노력하여 주랴?"(통영의 한 걸인, 조선일보, 1924. 10. 19일자").  중외일본 5월 17일자에 호송하는 피의자들의 연변에 청년단도 포함되어 있어, 여기에서 표현하는 청년단이 1923년에 조직된 청년단인지, 아니면 일본인 거주지역에서 결성된 청년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만일 1923년 이후에 결성된 청년회 중의 하나라면, 이 당시의 청년회 조직은 상당히 친일화된 조직으로 관의 동원조직으로 바뀐 것을 판단할 수 있다.

통영은 1919년 여름 통영청년단이 창립된 이래 활동사진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1923년이 되면서 부터 회원의 활동이 부진해 청년회의사결정 자체가 회원정족수 미달로 계속해서 유회된다(동아일보, 1923. 1. 13일자).  위에 언급된 상황은 바로 이 때의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다가 1925년 2월 18일에 통영청년동맹이 맨먼저 조직하여 혁신을 시작하였고, 이후 통영청년동맹을 근간으로하여 구역별 정비에 들어가서 1926년에는 서부, 동부, 중앙 등으로 나누어서 조직이 완료된다(동아일보, 2월 12, 4. 30, 5. 19, 5. 27일자).  이들이 다시 통합하여 1926년 10월에 연합조직을 결성한다.  이들 단체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젊은 세대들이다.  마산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지역의 새로운 운동세력으로 떠으로 지역사회를 리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와 같은 민족을 모멸하는 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너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김승, 1996, "1920년대 경남지역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청년연맹 결성을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2호: 13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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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저항하여 청년들이 마산을 이끌어가다.

역사/1920-29 2010. 3. 11. 10:03



일제 시대의 마산에서 지역사회를 이끌은 조직은 단연 마산 청년회가 눈에 뜨인다.  눈에 뜨이는 모습은 1926-29년 사이의 중외일보 기사를 읽으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년회는 단순히 청년들의 모임이 아니라, 지역의 다른 조직을 돕고, 지역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고, 또한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선두에 서서 한국지역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지역사회의 문제에는 물론 민족차별에 대한 저항, 독립국가에의 열망, 새로운 세계적인 조류를 파악하려는 노력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산의 지역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이귀원 (1996, "1920년대 전반기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지역과 역사, 1호: 7-34)은 전반기의 흐름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한편 비밀결사운동과 문화 종교운동, 3.1운동에 참여했거나 사립학교나 교회 청년조직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배양했던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문화운동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였으나,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조선인의 경제를 파멸로 몰아가는 식민지 현실에서 자본주의적 실력양성론이라는 문화운동 노선의 무망함을 실망하고, 그 일부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다"(33쪽).  즉 초기의 문화운동, 그리고 후기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흐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1920년 6월경에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적으로 마산구락부가 창립되는 데,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청년회 운동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조직에는 노장년층의 친일자본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전투적 민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청년층과는 융화되기 어려웠다.  이후 청년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1922-23년에 있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1924년 6월에 마산구락부 청년들을 중심으로 마산청년회가 창립된다.  마산청년회는 18세-35세로 연령를 규제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노장년층의 참여를 봉쇄하였다. 마산청년회는 주로 마산구락부 출신들이지만, 상당수는 3.1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의 경력을 가진 전투적 활동가들이며, 사회주의자나 상업자본가도 들어 있었다.  활동 내용은 마산구락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만, 계몽내용에 반제 반봉건, 사회주의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주된 활동은 강연회, 토론회, 웅변대회, 체육대회, 음악연예회, 동화회 등이었다.  현재로 치면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과 유사하다.  오히려 건강한 시민단체의 모습을 풍기고 있다.  1925년에 접어들면, 마산청년회 (회원 90여명), 수양청년회 (1925년 1월 창립, 회원 40여명), 형평 청년회 (1923년 5월 창립, 회원 20여명), 어시공조 청년회 (1924년 7월 창립, 회원 55명)의  4개 단체가 연합하여 마산청년회 연합회를 만들었다.

1920년대 후반기의 활동(1926-29년)은 아래에 중외일보에 보도된 것을 참조하면 된다(송성안, 2007, 일제강점기 중외일보 속의 마산, 마산문화원).
마산청년 토론, 성황리에 개최, 26. 12. 8일자 - 토론 주제: 신여성?
마산토론회 성황, 28. 5. 23일자 - 대중교화에 말이냐 글이냐?
마산청년동맹 임시대회, 28. 5. 25일자
마산청맹, 임시대회, 28. 5. 30일자 - 그동안의 무책임한 운영에 대한 인책사퇴시키고 새로이 시작한다.
마산청년동맹, 웅변대회 준비 28. 6. 17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8. 2. 20일자
마산청년동맹 임시총회, 29. 2. 21일자
마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 29. 2. 24일자
마산청년동맹, 국제부인데이, 기념강연금지, 29. 3. 10일자
마산서 검거한 마산 정명복, 김형윤 창원손조등, 거제도 권오진등 4명을 석방 (3월 8-9일에 검거), 29. 3. 18일자
마산청맹, 정기위원회 반조직, 29. 3. 19일자
마산 청년동맹이 주최하는 마산시민 춘기 대운동회, 준비회 경과, 29. 3. 20일자
마산청맹 정기대회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4. 1일자
마산청맹, 정기집행위원회, 29. 4. 5일자
마산청맹 정총 선언 축문 압수, 29. 4. 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4. 9일자
청맹 간부 구류, 마산서 고등계에서, 29. 4. 15일자 - 김환을 구속, 진주, 동래, 고성의 청년동맹에 축문을 보낸 것
마산청맹, 집행위, 29. 9. 23일자
마산청맹, 추석간담회 금지, 금지 일관의 마산경찰서, 29. 9. 24일자
마산청맹, 재동포 강제귀환 반항과 마산경찰서 고등계 주임의 기괴한 집합금집 이유, 29. 9. 27일자
마산청년동맹 위원회 연기, 경찰의 간섭으로, 29. 10. 19일자
마산청맹, 집행위, 29. 11. 5일자
경남도 청련, 위원회 준비, 29. 11. 16일자 - 29년 6월 이후로 박람회 개최로 당국의 억압이 심해졌다.
공산당원 귀래의 광고첩지도 압수, 이유는 민심소란이다 28. 10. 10일자 - 석방된 공산당원이 청년동맹에서 환영하려는 사건
마산청맹위원회, 29. 8. 13일자

1926년-29년 사이의 청년동맹의 활동을 보면, 일제 경찰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활동을 하였다는 점, 그리고 마산의 여론을 주고하고 있다는 점, 지역의 다른 사회활동도 결국은 청년동맹의 연게망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산의 주도적인 활동은 이외에도 노동운동이 있다.  이것 역시 상당부분은 청년동맹과의 연계속에서 시작되었고, 조직적으로 발전된 요인이 많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노동자와의 연대, 그리고 자본가는 일본인도 있었지만 한인 자본가와도 다투어야 했으며, 보다 더, 계급의식이 있어서 지역내의 활동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이 나서게 되었을까?  필자는 노장년층은 한일 합방을 통하여 변절자도 발생하고, 그 책임감에서 자율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지역사회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새로운 청년운동을 주창한 사람들은 그들의 신분적 배경을 본다면 어느정도 유산자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선진 사상을 학습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으므로, 일제라는 상황이 그들의 앞날의 발전에 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미래의 발전이 가로 막힌 이유는 바로, 일제의 식민지 라는 사회상황이라는 점을 깨달은 결과로 보인다.  청년들이 이제 지역사회의 미래를 개척하는 주인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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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수법의 투표, 일제식의 탄압이 3.15를 불러 일으켰다.

시사 2010. 3. 10. 10:44
어제 오후에 KBS창원 방송에서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하러 갔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한 방송작가가 김주열의 시체사진과 또 다른 사진을 들고 시민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일제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냐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왜냐 하면 3인조 5인조의 상호 감시 투표를 생각해 낸 사람은 공산교육을 받고 그 수법을 모방한 것이고, 김주열을 사살하고, 시체를 유기하여 바다에 넣은 자도 일제시대에 한인을 고문하고 유기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투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마산일보사, 1960, [민주혁명: 승리의 기록, 마산의거와 4월 혁명의 성공(마산일보사)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16-17쪽).
"3.15 정부통령선거의 새벽 동녁은 텃다.  이날 아침 시내 47개 투표구에서는 상오 7시 부터 일제이 투표가 개시되었다.  투표소부근 및 10미터 통로지점에는 새끼줄을 늘려 놓고, 정복경찰관과 완장낀 종사원이 통행인들을 점검하였고, 투표소 경내와 입구부근에는 공무원 완장을 낀 종사원들과 사복경관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일부 투표소에서는 유권자들이 산발적인 투표를 했는가 하면, 일부투표소에서는 삼엄한 분위기속에 조직적인 시간별 방별투표로써 흰 자유당 완장의 남녀노장유권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반월동 제 1투표소의 경우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방별투표가 진행됨으로써 급한 용무로 아침 일찍 투표소에 간 유권자의 개별적인 투표로 거부했고, 번호표도 방장이 장악하고있는 관계로 시간전에는 개별적인 투표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반월동 제 2투표소에서는 산발적인 투표진행을 했으나, 기자의 투표광경 취재의 요청에는 불응했다.  간혹 사복경찰관들의 순찰차량이 오고가고 했는가 하면, 공무원 완장을 종사원들은 '뉴스맨', '후랫슈'를 극도로 저지하면서 투표소 부근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마저, 꺼려하는 경향으로 전체 선거 분위기는 전례없는 공포 속에 몰아넣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야당참관인을 강제축출 한데 대해 소동을 야기시키는 등 어색한 일면도 보였다".

이러한 선거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자유당 조직위원장 이존화다(마산일보사, 1960: 118).  이존화는 "3.15 부정선거 강행에 있어서 3인조 및 5인조 공개투표의 창안자로 일약 유명해졌다.  애당초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그가 자유당의 조직위원장으로 지명되었을 때 자유당 내에서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3인조의 실시로 조직위원장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했고, 이정권의 공신으로 등장했다.  이기붕은 그후 그를 지극히 신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공산교육을 받아온 자다.  남로당원으로서 대구 10.1 폭동 주모자라고까지 알려져 있다.  19세시에 고향인 완주를 떠나 만주에서 봉천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거기에서 공산당식 훈련을 받으며, 공산주의 정신에 침투되었든 자라 한다.  그래도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고 자부하면서 8.15이후 남로당원으로 암약을 해 왔던 것이다.  그후는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6.25 당시에는 겨우 생명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인조도 그의 공산당식 수법이 되살아난 결과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관제공산당 조직의 명수인 자유당의 조직원장까지 되었으니 자유당 안하는 사람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렸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공산당식 수법을 채용하면서까지도 정권을 연장해 보겠다는 자유당의 지긋지긋한 저의는 이미 민의가 그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일까?"(1960. 5. 29일 국제신문을 인용).

김주열을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자도 역시 일제시대의 악덕 경관이었다(사단법인 3.15의거 기념사업회, 2004, 3.15의거사: 394-395).   박종표는 일본 헌병출신이었다. 일정 때 그의 이름은 아라이(新正 )로서 아리이 고조라고 불리웠다. "그에게는 허다한 죄상이 있으나, 그 중에 정장호 학살사건이 유명하다".  1945년 6월 어느날,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정장호의 집에 가서, 정장호를 체포하고, "닷새동안 모진 고문으로 빈사상태에 이르게 만들고"는, 탈옥도주를 가장하여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던지고 말았다.  "집대문간에 들어서자 마자 정장호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정장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저승길로 떠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종표에게 김주열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것은 일제때부터 내려온 경찰의 관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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