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의 정당성: 민중, 민족, 종교

역사/1920-29 2010. 3. 6. 07:35

(1) 신해혁명의 영향

1911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성립시킨 혁명이었지만, 이 혁명의 기본 성격은 만주족이 지배하던 중국을 한족이 다시 그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손문이 직접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과, 북양정권에 의지해야 하는 상태로 바뀐다. 이때 몽골과 티베트 역시 청나라의 멸망은 곧 자신들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독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과 티베트는 민족을 구성하면서도 동시에 티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르 구상하여 몽골의 통치자도 애초에는 티베트에서 온 불교지도자를 내세우고 받아들여진다. 티베트는 당연히 달라이 라마가 국가 지도자가 된다.

(2)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

민족 자결주의가 논의되던, 1차세계대전 후의 세계에서는 지구상의 민족들이 각자 자신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패전국도 승전국도 아니지만, 이미 공화국을 선언한 중국은 제국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폐기, 일본의 21개조 요구 철회, 전쟁 중에 독일이 장악한 산동반도를 약탈한 일본에 대해 산동반도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는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중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의 북양정부는 일본이 만주지역의 철도운영을 위해 군사를 파견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이는 북양정권이 사실상 중국의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는 정권이었기에 그렇다. 이후에도 손문이 죽기 전까지 대개는 한족의 권리를 주창하고 있었다. 즉 일본이 만주와 내몽골로 침투하고, 외몽골이 이미 신해혁명이후에 독립을 선언하고, 티베트에서는 사실상 자치를 하고 있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편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민들이 민족에 기반하여 독립국가가 될 것을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였다.

한반도에서도 1919년에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민족에 기반한 국가 건설로 나아가게 된다. 이 해는 또한 조선왕조의 사실상 독립된 마지막 왕인 고종이 서서함으로써 왕조의 복고에 의한 국가 건설보다는 근대국가인 민족국가를 주창하게 된다. 물론 순종이 1907년에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사실상 일본제국이 만든 괴뢰적인 성격이 강했다. 즉 외교, 군사, 재정 등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권한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에 강압에 의해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엇으므로, 사실상 고종이 마지막 조선의 왕으로 보는 것일 옳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인들은 민족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3)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

볼세비키 혁명은 민중에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즉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 의거한 국가 건설이다. 이에 따라 1920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창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물론 초기 중국의 국민당은 손문의 3민주의와 5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 구성을 계획하므로, 이념적으로는 공산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손문의 사후, 장개석이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북벌을 협력하여 성사시킨 후인 1927년 이후에는 공산당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으로 돌아 선다. 이것이 공산당으로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민중의 국가 건설이념을 전파하고 동조자를 구하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시기에 베트남의 공산당이 지역적 분열(통킨, 안남, 코친 차이나)을 싸우면서 공산당 이념에 의한 프랑스에 대한 독립운동을 주창한다. 역시 볼세비키 혁명의 직접 영향을 받은 몽골과 신장지역 역시 공산혁명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몽골은 직접적으로 이를 성사시키고, 신장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에 의한 국가 건설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인과 한국인들도 공산당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함은 물론이다.

(4) 일본 제국주의의 인종적 정당성 주창

일본은 기본적으로 이미 장악하고 있던 한반도, 만주, 산동반도, 대만을 넘어서, 소위 만몽지역까지 넘나 보게 된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화북지방까지 나아가게 되고, 중국 전역을 침략하는 것이 그들의 군사전략이었다. 다만, 이들이 한반도, 만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념적 전략이었고, 그 역사적 사실에 관계없이 이 지역의 많은 이들이 이에 동조하게 된다. 후에 일본제국주의는 더 나아가 아시아인 또는 황색인종을 대신하는 지위로까지 이념을 확장하고 있다.

아무튼 일본의 제국주의는 인종에 기반하여 제국의 침략 확장 정책으로 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제국주의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 건설운동의 해외팽창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본다면, 민족주의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수 있다. 1920년대는 현재의 국가가 나온 역사적 기원이 발생한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동아시아 지역은 민족, 종교, 민중적 이념, 인종 등의 요인들이 착종하면서 국가 건설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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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은 사회의 견실함을 시험한다.

역사/1920-29 2010. 3. 4. 07:39

아이티와 칠레에 지진이 발생했다.  규모나 지진의 강도 면에서는 칠레가 강했고, 피해면에서는 아이티가 심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나, 간과하고 있는 점은 지진은 자연재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능력을 시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마산의 2003년 태퐁 매미가 덮쳐서 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해였을 때 공동체의 위기를 거론하였다.  즉 피해자체도 문제지만, 피해에 대처하는 공무원(당시의 마산시 시장의 행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을조직(공식적으로는 수방단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있고, 아마도 민방위조직기 가동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이 일차적으로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고, 이어서 동네 자체에서도 자발적인 대처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사후의 대처방식은 이후의 재해와 재난과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 문제는 다시 발생할 가능성만 높여 놓았다.

1923년 9월 1일 정오의 2분전에 일본의 동경 인근에 발생한 규모 7.9 규모의 지진은 사회가 지닌 죄의식, 피해의식, 가해의식 등 무의식적 역사에서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이때의 지진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 약 13만명 정도이 죽음, 이후의 화재, 쓰나미 등의 피해로 이어졌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1) 해일의 위험, 후지산의 폭발가능성 등 자연재해의 후속타가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 (2) 1910년대 이후에 생겨난 호황과 자유주의적 사회풍토로 사람들의 생활이 방탕해져서 하늘이 천벌을 내렸다는 생각, (3) 교도소에 갖힌 사람들이 풀려나와서 약탈과 강도를 일삼고 있다는 소문, (4) 1923년 6월경에 적발한 사회주의자 음모 사건과 연결시켜서,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소란을 여기할 것이라는 소문, (5)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1918년 쌀 소동사건, 1919년의 독립운동, 이미 일본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는 10만여명에 달하는 한국인(당시 일본 당국자들은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일합방전에는 한국인이라고 불렀었다), 특히 관동지역인근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2만여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감 등으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즉 조선인의 약탈에 대해서는 지진발생후 3시간만에 동경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손잡고 공격한다" 내용이었고, 이어서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당일 오후 7시경부터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공격한다"는 각종 내용이 누군가의 공개적인 소문 살포와 입소문으로 삽시간에 퍼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근의 조선인들이 공사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온다, 무기를 들었다, 떼를 지어서 몰려 다닌다, 강도, 약탈, 강간, 투독(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등의 소문으로 처져나갔다.  이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신문에 부분적으로는 진실이라는 식으로 보도되었다.  대개는 2-3일동안에 이 소문에 의해 약 6천여명이 살해당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누가 한국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본어 발음을 시키거나, 수염을 기른 사람, 키가 크고, 광대뼈가 나온 사람, 쌍꺼풀이 지지 않은 사람 등을 골랐다고 한다.  죽인 당사자들은 자경단이라고 하여, 마을 자체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죽여졌다고 하나, 이당시는 이미 군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계엄시기였으므로, 군인과 헌병, 경찰이 동조하거나 방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실상이다.

아무튼 역사에서 6천여명이상의 사람이 2-3일 사이에 소문에 의거하여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평상시에 지니고있는 사회의 원죄를 떠올린다.  즉 비상시에는 사람들이 이런정도 잔인할 수 있는 사회관계가 평상시에는 사회적 틀(facade)에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이티의 지진에 이은 무권력상태, 대통령니 도망가고, 약탈이 일어나고 하는 상황을 보면,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인 연대나 공동체의식의 정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 마산에서 2003년에 희생당한 8명의 매미 피해자들은 마산시민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마산사람들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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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행복

교양 2010. 3. 3. 13:00

2월말에 마산 문화방송으로부터 행복에 관한 캠페인성 광고에 한 꼭지 나올 것을 부탁받았다. 내가 별로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는데, 무엇으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어, 나의 하루 일과중 가장 그래도 만족스러운 상태, 아니 무엇인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순간은 언제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아 그래, 내가 움직일 때야! 나는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 움직인다. 다래(애완견)을 데리고 동네의 골목을 다니건, 아니면 목욕탕을 가거나, 무학산에 오르거나 아니면 그냥 집안에서 아이들 방이나 부엌이나를 지나치면서 말을 걸고,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고,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규칙적으로는 학교를 오가면서 걸어다닌다. 학교 내에서도 도서관을 뒷길을 통해 가거나, 점심을 먹으로 멀리 낮선 곳을 찾아다니거나, 그런 식이다. 이럴 때에는 가능하면 천천히 걷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나를 아는 이들이 있으면 천천히 걷는 것은 어색하다. 그래서 낯선 곳을 찾는다.

그래서 일단 주제를 길을 걷기로 정했다. 그렇다고 행복이 생기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행복은 무엇인가? 그저 우연히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인가? 그냥 만족스러운 상태, 무엇인가? 만족스럽다고, 그것은 허위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돈많이 버세요가 우리의 인사가 되더니, 이제는 행복하세요가 인사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고 사회가 행복을 그리 중하게 여긴다거나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보면 사회적인 행복의 조건을 망각시키는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학회가 지난해 9월에 행복한 관한 심포지움을 개최하여 이를 탐구한 일이 있다. 사회적인 행복의 조건을 탐구하는 자리였다.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니다. 아래의 행복에 대한 몇가지 정의를 참조하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에게 행복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 주는 그것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김우창, 2009).
루소에게는 행복의 상태는 “생의 充溢感, 절대적인 내적 일체감, 함께하는 친밀감, 근접한 주위 환경과의 조화되고 막힘없는 연결감, 생생하고 직접적인 체험으로 모든 가능한 욕망의 자연스러운 실현”을 포함한다(김우창, 2009).
"이제 경주에서 주어지는 포상은 지구의 아름다움, 측정할 수 없는 충만함, 또한 생물권이 만들고 우리 고유의 것이기도 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 속에 구현된 감정“을 행복의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Weber, 2009: 129).

마산 문화방송 FM 98.9의 오전 8시 57분에 한 40초 가량 가량 방송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우창, 2009, “행복의 이념: 사적 행복과 공적 행복”, 한국사회학회 주최, 행복사회와 문화정책의 방향, 서울 프레스 센터, 9월 29일에 발표된 글
Andreas Weber, 2008/2009, 자연이 경제다 (프로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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