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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20-29 2010. 3. 3. 09:35
일본은 1910년대 특히 1차세계대전에서 국가간 무역이 어려워지면서 각국은 어쩔수 없이 국ㄱ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 일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쟁 당사국들을 상대로 국내 공산품들을 수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산업이 발전하고, 더구나 선박을 구성하는 중요 부품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다다랐다. 이어서 섬유산업이 급성장하고, 많은 농촌의 이농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시에서의 쌀값 급등 현상에 직면하자,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를 쌀 공급기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단 초기에는 대만으로부터 쌀을 수입하지만, 곧 이어서 한반도에서 수리사업, 치수사업, 경지정리, 비료의 투입 등이 이루어지면서, 쌀 생산은 급증하고, 일본 쌀값의 1/3이하로서 일본에 수입된다. 이로서 일본의 농민들은 더구나 소작농들은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단일이유는 아니다. 이미 일본의 소작농들은 가혹한 소작료와 적은 농지 규모에 시달리고 있었다. 즉 생산량의 1/2을 지주에게, 그리고 1/4을 생산비용으로 나가서 실제 수익은 1/4선에 불과하였고, 이는 도시의 하층노동자 계급에 비해서도 1/2정도의 수준에 불과하였다. 이미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이민을 금지하엿고, 농산물 수입도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농촌은 과잉잉구, 과잉생산에 시달리게 된다. 지주들은 이에 대응하여, 기계화, 광작화, 소작인들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갔지만, 소작농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그리고 전후 불황에 허덕이며, 노동운동 활성화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이들과 지식인 집단이 합세하여, 소작인 조합이 발생하여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된다.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결국 이러한 농민의 스트레스르 풀기 위한 하나의 출로가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해외팽창에의 욕구를 가진 해외군부(관동군, 조선반도의 일본군), 국수주의적 우익세력들이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재벌(자이바츠)들에 대항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다음 2개의 사례는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기타 잇키 (北 一輝), 1923,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서 일본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1단계는 일본의 기존 엘리트를 깨끗이 일소하고 천황과 인민의 직접 관계에 기초한 체제로 대체한다. 2단계는 100만엔이상되는 개인재산을 몰수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며, 10만엔이상되는 개인 소유 토지를 압류하고, 재분배한다. 천황은 황실재산을 포기한다. 궁극적인 목적으로 일본은 국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 부국 (영국, 러시아)으로부터 정의를 지켜 서양에 대항하여 아시아 국가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Beasley, 1990: 213-214).
(2) 이노우에 닛쇼(井上 日召, 1886-1967)의 血盟團(게쓰메이단)은 금융가와 산업가들을 선정하여 암살함으로써 농민의 천년왕국을 이룩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Beasley, 1990: 214).
일본의 파시즘의 형성은 다분히 농업파시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1920년대를 통하여 일본정부는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 불간섭 주의를 고수하였고, 이에 대해 비교적 대기업들도 성장은 더디었지만, 합병을 통하여 규모를 키웠고, 독점력을 강화시켜 해외로 진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고, 국가의 개입이 오히려 무역을 방해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감소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일본의 파시즘의 길은 농업과 농민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W. G. Beasley, 1990/1996, The Rise of Modern Japan 일본 근현대사 (을유문화사) 중 10장 군인과 우익: 1918-1933을 참조 Seymour A. Broadbridge, 1989, "Aspects of economic and social policy in Japan, 1868-1945", Peter Mathias and Sidney Pollard eds.,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Europe, Vol. VI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06-1145 今井淸一, 1974, 大正デモクラシ- (中公文庫)
역사/1920-29 2010. 3. 2. 07:56
19세기 말까지, 그리고 테일러가 노동자들을 선발할 때 그들의 태도를 점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업무 능력, 실적을 중시하고, 적자생존의 논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단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장 내외부의 사정은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고 채용하고, 평가하고, 해고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내부의 사정은 공장이 대규모화, 기계화,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면서, 이미 공장은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지겨운 단순 작업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장은 창의성도, 자신의 성과를 그대로 인정받으면서 평가에 반영되는 체제도 아니었고, 그래서 노동자나 경영자들 모두 이러한 노동자의 자발성 상실이 작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법은 물론이고, 산업심리학자들의 적성검사나 IQ검사 등이 등장하였고, 이후에는 엘튼 메이요의 공장내 사회관계의 중요성까지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내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1차세계대전당시의 전쟁 전략에서 병사들의 심리적인 요소가 고려되지 않아 많은 희생자와 전쟁이 불필요하게 장기화되었던 점에도서 알 수 있다.
공장내에서의 노동자들의 태도를 문제삼는 것은 단순히 태도 검사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정도는 노동자들에 대한 부분적인 소속감을 고취방향으로 이루어 지기도 했다. 즉 성과공유제, 이익분배제, 일부 선진적인 공장에서는 주식의 배분까지도 이루어졌다. 이런 성과공유제도는 노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경영자들이 노동자들의 헌신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경영자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였으므로, 대부분은 과거의 가부장적인 또는 가족적인 전략이 더 유효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탄광, 철강, 철도 등에서 나타났듯이,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하나의 공장 마을을 이루고 주택과 상점을 공유하는 공장거주체제에서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연대가 손쉬워 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력하게 나타났다(한겨레 신문, 1996. 1. 20일자, 1920년대 미국판 파업전야, Matewan 영화소개 - 이 영화는 Matewan이라는 연탄탄광에서 1920년 5월 19일에 발생한 총격전에 의해 회사측의 탐정회사 7명과 노동자측을 위해 노력하던 시장과 세리프가 죽은 사건). 따라서 자동차의 보급, 노동자들의 소일거리의 등장, 신분상승기회의증대는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해치고, 경영자들의 논리가 통하게 되는 기반을 이루게된다.
경영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노동자의 태도를 검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노동자들 사이, 아니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사이에서도 공산주의니, 이중조합주의니, 황색노조, 회사노조, 어용노조 등의 논란이 끊임 제기되고, 이를 기반으로 사용자과 대결하고, 조직내부의 이반자들을 숙청하는 양상이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인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노동조건은 어느정도 향상되었으나, 노동조합의 조직율은 거의 절반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John L. Lewis의 전기(Saul Alinsky, 1970, John L. Lewis: An Unauthorized Biograpgy)는 비교적 미화되었으나, 다른 쪽의 해석에서는 (Alan Singer, ?, "Communists and Coal Miners: Rank-and-file Organizing in the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during 1920s", Science and Society: 132-157)는 루이스를 독재자, 무자비한 조직운영자로 묘사되고 있다.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의 미국은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공장노동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루이스는 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무시하고, 자신만 믿고 따르면,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식의 당시의 마피아 스타일의 조직운영을 하였고, 여기에 그가 공화당을 추종하면서 사회적으로 공산주의자 낙인찍기에 동조하여, 자신에게 저항하는 동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으면, 거의 40년간 노조를 장악하였다. 여기에는 사용자와의 저항을 위해 노조들끼리 연대하자는 것도 거부하고, 우선적으로 자신에 대해 적대적인 내부부터 뿌리 뽑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루이스의 조직은 (광부노조) 1920년대 동안에 거의 절반이라로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Reinhard Bendix, 1956,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Ideologies of management in the course of industrialization (New York: Harper Torchbooks)
역사/1920-29 2010. 3. 1. 12:02
산업합리화의 물결은 한편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문화산업을 만들어냈지만, 공장내의 상황은 오히려 탈숙련화, 그리고 지배체제의 관료화로 말미암아 노동자의 자율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또한 1910년대의 노동운동의 물결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호황과 민주적 정치체제의 등장으로 개인적인 취업기회와 상승이동(화이트 칼라가 될 기회)가 증대함으로써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신들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체성의 상실은 공장내의 자율성과 숙련의 상실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노동자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사라지고, 사회적인 문화에 휠쓸리는 결과는 낳게 된다. 이는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들의 저치를 개선하기 보다는 물질소비적인 문화에 휩쓸리면서 노동자들의 단결도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1차세계대전 이후의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과 더불어 경제적 공항과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남동 유럽지역의 이민에 대해 더욱 심화되었고, 아울러 대내외적으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고립주의와 보호주의는 한편으로는 일반평등한 선거권에 기초한 정부수립에 의해 새로운 신분상승을 노리는 각국의 노동자들에 의해서도 추동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되면서, 제국주의세력들은 서로간에 경쟁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자본가와 사회민주주의자의 협조와 거대한 양의 미국 달러의 유입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유럽 자본주의는 간신히 재기하기 시작했다"(포스터, 1956: 73).
대부분의 나라들이 대중의 인기를 배경으로 노동자의 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활용하는 데 반하여, 미국과 영국은 시장의 원칙과 국가의 경찰기구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미국의 경우에는 회사조합이 극성을 부리고, 영국에서는 법률상 조합에 대해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고용주가 자금을 대서 직접 조직하고, 간부직을 차지하는 어용조합은 1886년에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 졌다...1927년에는 그것이 900개로 증가하였고, 약 100만 명의 노동자를 가입시켰다. 이들 어용조합은 교묘한 반조합기구의 일부로 대규모의 스파이체제, 회사의 깡패와 밀정, 직장과 산업도시에서의 회사의 테러리즘을 갖추고 있었다"(포스터, 1956: 88).
영국은 1926년의 총파업을 계기로 고용주들은 반노동조합적인 법안을 만들기 시작한다. 1927년에 통과된 이 법안의 내용은 우리에게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들이다. "총파업과 동정파업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비합법적 파업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자는 벌금이나 2년이상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대중 피켓팅은 금지되었고, 보통의 피켓팅도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손해에 관한 민사소송의 지불의무를 부담하기 위해 조합기금이 조성되었다. 공공시설의 조합은 TUC (노동조합회의) 혹은 노동당에 가입할 수 없게 되었다. 조합은 파업파괴에 대한 처벌권을 박탈당했다. 조합이 노동당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할 권리도 엄격하게 제한당했다"(포스터, 1956: 102).
물론 같은 시기에 러시아에서도 조합은 국가가 이미 노동자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논리에 따라 노동조합을 국가의 하부기구로 전환시켜 놓게 된다. 아무튼 세계적으로 보면 1920년대는 노동조합의 숫자가 줄어들고,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되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산업체가 이제 1920년대 들어서 발생하기 시작하고, 극동아시아 지역은 상대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늦게 그리고 약하게 받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세력들의 공세가 강하지 않아으므로, 노동자 운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 문헌 William Z. Foster, 1956/1987, 세계노동운동사 II (백산 서당) Jürgen Kocha, 1980, White Collar Workers in America 1890-1940: A Social-political History in International Perspective (London: Sage Publications) John Kelly, 1988, Trade Unions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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