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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00-1919 2010. 2. 23. 12:01
1910년대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국내의 기존 사회 신분은 심각한 동요 현상을 보인다. 즉 과거가 폐지되고, 토지조사 사업으로 이익을 본자도 있겠지만, 일단 기존의 토지를 기반으로 한 양반층의 재편성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토지를 기반으로 지역에서 안정적인 신분층으로 존재하던 대주지 계층은 계층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가족이나 혈족 내에서는 과거에는 관료진출을 통해 출세를 위한 학문에서, 일단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해외 유학을 선호하게 된다. 이때 많은 양반 대지주의 자제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신학문에 접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조말의 양반층이 학문하는 태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인 대학에서 학업에 임하게 된다. 즉 공무를 완료한 후에 특별한 직업 보장이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러사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이들은 확실한 직업과 위세를 갖는데 실패하게 된다. 1910년이전만 해도, 유학이라는 것은 관에 의한 국비 유학으로 모두, 기존의 관료나 국가체제에 봉사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므로, 미래안정성이 보장되므로, 고민할 필요는 적은 편이었다.
여기에 일제의 통치 정책은 특히 수세정책은 초기에 주세, 연초세, 가옥세를 신설하여 징수하였는데, 아직 근대적인 공장채제가 발달하기 전이라서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제조하여 자가소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는 양반지주계층들이 주세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 총독부는 징세와 수세를 위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강압적으로 독려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따라서 과서에 수령에 의해 징수되던 마을 단위의 징세에서 이제는 가가호호방식으로 바뀌면서, 공동체적인 연대성이 약화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위생을 중시한다고 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끌어내서어 이를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즉 가족의 권위가 말살되고 이제는 개개인이 각자의 위생을 책임지고, 이를 국가가 공인해 주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세무공무원을 두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여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고, 교육기회와 기업기회는 제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역사 유적의 말살과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는 박람회, 박물관의 설립 등이 이어진다. 또한 일제는 초기에 단행된 사회적 간접 기반시설을 위해 토지의 수탈(자진 헌납)과 동시에 노력 동원을 강제하게 된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점에 대해 일본 제국의 자금이 직접 한반도의 항구, 철도, 도로 등의 건설에 사용되었다고 강조하면서, 식민지에 대해 일본이 오히려 희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반도의 자원을 수탈하고, 일제의 제품을 판매하는 루트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제는 또한 1910년대는 내내, 무력을 앞세워서, 한국인들을 통치하였다. 무력 통치는 기존의 권위 체계를 무너뜨려서, 공동체 의식이다, 사회적 신성을 무너뜨려, 긍정적으로는 현실의 냉혹성과 과학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고 볼수도 있지만, 사회적 공동체성을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노인들에 대한 존경심의 상실, 무력을 앞세우는 일제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자신의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기존의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요인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가져왔고, 1900년전후로 시작된 민족의식이 1907-9년의 의병으로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아직은 근대화된 의식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이 컸었다고 보여진다. 비로서 1910년대의 방황과 1919년의 독립운동을 기점으로하여, 한국인들은 근대적인 의식으로 깨어날 수 있었다고 볼수 있다. 독립운동은 한국인들의 광범위한 참여, 기존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세로운 사회적 권위와 공동체 의식이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선이, ?, "초기 자유시 담당층의 정체성 모색과 그 의미," 국제 어문, 26집: 91-112 신지연, 2007, "재현의 언어와 최남선의 산문형 시", : 43-74
역사/1900-1919 2010. 2. 22. 17:39
마산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2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있다. 과거의 조계지역인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과,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 지역이 그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한국인이 전혀 상업활동을 하지 않거나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사회는 한국인과 일본인 혼재되어 사업을 하고 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사업면에서는 한국인이 비교적 구마산에서 과거의 상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1910년대에는 이미 창고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어시장이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과거의 명성인 원산과 강경을 이어지는 중개항구 또는 인근지역의 물산을 집산하고 분배하는 기능의 상당부분이 약화될 수 밖에 없는 사정에 처해 있게된다. 즉 세금은 이미 금납화로 바뀌었고, 강경과 원산의 중개기능은 이미 개항장으로바뀜에 따라 해외의 세력이 장악하는 계기가 되고,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그리고 마산선의 철도 개설은 아직 자동차가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고 하더라도, 항구를 기반으로 하는 또는 강길의 배를 중심으로 하는 운송기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마산포는 신마산에 건설된 철도정거장과 마산항의 일본항구로서의 기능은 새로운 상업기회를 가져왔다. 물론 진해가 일본의 요항으로 군사기지화함으로써 진해로 일본인들이 어느정도 이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마산은 중요한 일본무역항으로서, 그리고 일본인 거주사회의 중심지로서 정착되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문의 발행, 일본인들의 자치기구들, 국가 권력기구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돕기 위한 세관, 금융기관,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또한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학교, 병원, 일본인들의 절이나 신사 등이 세워졌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인들의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요정이나 창녀촌, 영화관, 목욕탕 들이 들어서고, 도로의 개설, 다리의 건설, 가로등, 전기의 공급, 상수도 시설의 등장, 도서관, 벚꽃의 식목, 일본술의 제조(아직 막걸리는 상품화되기전이었다), 인근에 유원지를 건설하고(공원) 등등의 근대적인 시설을 급속도로 공급한다.
실제로 마산에 191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마산에서 한국인과 같이 놀거나 교류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사업면에서는 한국인들의 상권에 침투하여 일본의 수입품을 판매하고, 한국의 물산을 일본에 수출하고, 한국인 사업가들을 통하여 예속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등의 행태는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에 구마산을 지배한 일본인 등장하고, 특히 대토지 소유자는 구마산에 그리고 신마산에도 등장하고, 대규모 건설업자나, 부산의 금융을 지배하던 일본인이 마산에도 장악을 시도하는 장면이 여럿이 등장한다. 마산의 금융은 구마산이건, 신마산이건 모두 일본인이 거의 완전히 장악한다. 전당포나 작은 금융기관까지도 모두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마산에서 거부가 된 이들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 한반도 일본인 사회를 상당한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국의 본국 일본인 국가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상당히 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용호, 1999, "마산개항백년: 근대화 1세기 향토 유사", 1월 18일자, 1월 25일자, 경남신문 (신마산 조계지역, 1915년대 마산시가지) 허정도, 2001, "20세기 초 마산 도시공간구조의 복원적 연구: 1912년을 기준으로", 4월 19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세미나 발표문 허정도와 이규성, 2002, "일제강점기 원마산의 도시공간 변천과정 연구: 1912년부터 1945년까지", 건축역사연구, 11권 2호: 57-74
역사/1900-1919 2010. 2. 22. 13:34
인도에서 가장 소프트웨어가 발달한 지역은 남중부 지역이다. 근처에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곳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이다. 즉 정치의 중심지인 델리, 경제의 중심지인 뭄바이가 아닌 천민들만이 사는 곳에서 가장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7년 12월에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곳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천민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공장의노동자로 고용하여 평등한 조건아래에서 노동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감동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근처는 세계적으로 콜센터로 유명하고, 소프트웨어의 개발력도 인정받고 있다. 즉 인도는 지금 천민들의 열정으로 경제발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중국과 인도의 미래 경제발전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본다. 나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중요한 점은 국민누구나가 평등한 조건에서 공평하게 일을 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한 요건이라고 본다. 겉으로 보면 인도가 더 민주적인 제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직업선택이나 경제활동 면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완고하게 남아 있다. 물론 법률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카스트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는 천민을 멸시하고 직업세습, 멸시하는 직업이 남아 있다. 반면에 중국은 공산당이 사회의 중요한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혜를 받는 층들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통속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속에서 그동안 사회평등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 특히 직업면에서는 천대받는 직업이 거의 없고,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대한 열망이 무척 강한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는 천민자본주의적인 요소는 남아 잇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중국이 인도보다는 앞서서 경제성장을 이룰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1910년대를 본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경기도의 수도권, 그리고는 평안남도와 경상남도가 손꼽힌다. 조선의 역사에서 본다는 평안도와 경남지역은 가장 소외받는 지역이었다. 평안남도 지역은 이후에 기독교를 일찍받아들이고, 근대 산업이 발전하는 지역으로 변신한다. 물론 독립자강운동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경상남도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이주하여 발달시킨 부산과 마산을 축으로 상공업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산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1910년대에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민족자본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시기에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경제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그래도 마산은 상대적으로 지주계급보다는 상공인세력이 강했고, 기독교나, 일본의 외래 종교가 일찍 이입되어 정착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봉건적인 차별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열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아도, 이루는 지나치게 자신의 기득권을고집하는 경향이 심함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사회는 혁신이 나타나지 못하고, 정체되게 마련이다. 차별없이 기회를 주고,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제도나 관행이 확립된 지역에서만이 모험, 진취성, 혁신성이 나타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참고문헌
주익종, 1994,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 경제학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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