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색 도시 마산의 독립만세운동

역사/1900-1919 2010. 2. 17. 08:04
1919년 3-4월에 걸친 독립만세운동은 경남지역에 전국에 비해서 본다면, 수도권, 서북지역 다음으로 격렬하게 발생하였다.  국권이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저항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경남 지역에 격렬하고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은 특이한 현상이다.  반면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호남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점은 설명을 요한다.  1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저항운동의 지도가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기존의 설명들은 대개 전통적인 저항운동의 흔적을 살피면서, 저항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 토지수탈과 같은 경제적 이권의 상실, 일제의 무단 통치, 서울지역과 연계된 조직망(기독교, 유림, 지식인 그룹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망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이 이러한 설명들은 실제로 발생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지역의 특성이나, 구조적인 요인에서 행위로 나아간 사실을 설명할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다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특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보다 전국적인 아니면, 일본제국주의의 대응 능력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경남을 비롯한 마산 지역은 상대적으로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시기에 전국적으로 권력의 핵심지역이라기 보다는 변방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변방성은 자신의 이익은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자립심을 길렀고, 대신 일제의 경제적 이권 침략에 대응하여 그 대응능력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05년이후에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일본제국은 마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은 점을 감안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식민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토지조사 사업, 가옥세 주세 연초세와 같은 근대적 세제의 도입, 철도건설을 위해 토지와 노력의 수탈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수탈은 근대화와 동시에 오게 되어 마산은 구마산과 신마산이 거의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상호의 격차와 차별을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면서 거주하게된다.  여기에 일본제국의 진해 요항의 해군함대와 포병대대, 일본육군의 군수물자 항구, 일본과의 무역을 전관하는 항구라는 특징을 지니게  되어, 무력침탈과 무역물자의 이동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가장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 

마산은 상대적으로 유림의 세력이 약하고, 기독교 계통이 일찍 들어오고, 어시장과 샛강항구를 통해 일용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 이들을 상대로 한 야학이 발달되어 있어 근대적인 사상과 동시에 근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수치상으로는 마산의 3월 두척산, 추산정, 그리고 시장에서의 2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은 학교의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어느 사회운동이 다 그렇듯이 초기의 온건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과 후기의 폭력적인 운동을 주도한 세력을 다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과격한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상대적으로 항구의 노동자들(부두, 운송), 근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마산외에도 진동, 함안, 합천의 만세운동이 격렬하였지만, 그 구호는 같다고 하더라도, 지역적인 발생구조나 동인은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다.  농촌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마을이나 씨족 구조간의 경쟁, 유림의 영향력, 서울 운동조직과의 연계성 등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입장에서 보면, 대한제국 유민들의 항거는 비교적 온건한 항거였고, 갈길이 바쁜 일제의 침략 단계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1915년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의 산동반도 영토,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고, 중국을 상대로 21개조 조약을 통해 만주와 몽고를 침탈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미국과는 이미 중국에서의 권한을 양해받은 바 있다.  1918년에는 시베리아에 7만명을 출병시켜 광범위한 러이사 영토에서 침략을 일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이미 1차세계대전의 마무리 협상을 통해 조선인민들의 민족자결의 희망을 무산시키고, 일본의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어느정도 한반도에서의 저항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약 8천여명의 희생자가 나기는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이고, 한반도의 저항을 봉쇄한 셈이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미 경제부흥, 산업의 성장, 민권의식의 고양에 따른 근대적인 정당체제의 확립, 선거권의 확산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더 강한 억압을 취하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저항 정도로 치부하고 전쟁에 가까운 내전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즉 의병봉기와 같은 전쟁상태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독립만세운동이 근대적인 국가를 마련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운동의 방식은 전 근대적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

1910년대 조선인이 본 일본의 발전

역사/1900-1919 2010. 2. 16. 11:38
(1) 이인직, 1910, [자유종]에 부인들끼리 시국 토론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
"일본도 삼십년전 형편이 우리나라보다 우심하여 혹 천하대세라 혹 자국전도라 말하는 이는 미친자라, 괴악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인류로 치지 않더니, 점점 연설이 크게 벌리매 전도하는 교인같이 거리거리 떠나니 민족사세라, 이삼인 못거지라도 술잔을 대하기 전에 소회를 말하고 마시니 전국 남녀들이 십여년을 한담도 끊고 자담도 끊고 언필칭 국가라, 민족이라 하더니 지금 동양에 제일 제이되는 일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 관심을 가치면 미친사람이라고 하다고, 30년전부터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술집에서, 한담이나 자담도 끊고, 오직 민족사세, 국가, 민족을 말하더니, 강국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2) 하와이 호놀루루 기독학원, 1919년 8월, [대한독립혈전기]에 수록된
합중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국회 임원 일동의, 1919년 4월 14-16일에 쓴 글 중에
"세계대전이 개시되기 전에 덕, 아 등 모든 구라파 각국들이 권력이 의보다 승하고, 약한자의 고기를 강한자가 먹고 살찐다는 망령된 뜻을 가지고 교만한 태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실패를 당하고, 그들의 상설같던 국위가 지금은 변하여 다만 무력한 한 정치기관에 불과하고, 그들의 망령된 몽상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는 수합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대(일본)의 정부는 근간 구라파에서 꺼꾸러진 전제정부와 같은 욕망과 불의한 뜻을 버리지 못하니, 만일 그대의 백성들이 적이 총명과 지각성이 있어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같을 진데, 그대는 이 정책을 바꾸며 그대의 정부를 위하여 존귀스럽고 안락이 자재한 공화의 참뜻을 모방하기로 힘쓸 터이라.  만일 그대가 지금 사용하는 프루시아 정책을 그대로 계속할진대, 그대의 나라도 응당 멀지 아니하여 그대의 표준되는 구라파 몇나라와 같은 참화를 받게 되리라".

일본의 지각있는 민중들에게 호소하는 형태의 글이다.  일본은 실은 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미국과 거의 비슷하게 경제적 번영과 제국주의적 야욕을 달성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경제적 성장을 구가하여 미국의 민중들은 안락을 취하고, 자국 중심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나더라도 오히려 애국주의에 호소하여 거의 해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한인 독립가들은 일본에 대해 제국주의 정책을 버리라고 호소하고 있다.  독일을 예로 들면서.
:

히로시마 1910년대 조선인의 노역흔적들

역사/1900-1919 2010. 2. 16. 11:21
필자는 1996년 2월 14일에 히로시마에 계시는 타키오 에이지 선생(인권도서관, 히로시마 청구문고)의 집에 가서, 한센병의 역사, 일본 부락인들의 생활, 한인 징용에 관한 자료를 소개 받고 아루 저녁 잔 일이 있다.  이분은 스스로 자료를 모아서 한정본으로 자료집을 출간하고 계셨다.  1910년대 조선인들이 히로시마 부근에서 노역한 흔적들을 모은 자료가 있어서 사진으로 스캔해서 올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