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개인, 浮游하는 대중의 형성

역사/1900-1919 2010. 2. 16. 07:16
1차세계대전이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인민의 대량 희생을 야기하고, 이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주의, 복지문제가 등장하였다면,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체제, 대량 소비사회가 나타났다.  이러한 대량 생산과 소비는 포드의 T자동차의 년간 1백만대 이상 판매, 집보다도 차의 소유를 우선 원하는 세태가 나타났다.  적어도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전략의 고수로 적어도 1917년 전쟁 개입을 하기 전까지는 유럽의 전쟁물자를 공급하고, 유럽의 보호주의와 해상봉쇄를 통해 생산력을 늘리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국내는 1차세계대전의 피해로부터 한옆에 물러나 있으면서, 소비사회의 도래를 향유하는 입장이었다.

대량생산은 물질적인 면에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자본도 19세기 말을 통해 합병과 독점체제를 궂히고 있었고, 광고, 박람회, 놀이터, 영화, 소설, 춤과 노래 등이 흥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산업생산국이자, 경제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완성하는 시기라고 보면된다. 이 시기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유리한 조건으로서 민족국가를 통한 민주주의와 전쟁에 필요한 총력전 동원, 대량생산에 따른 산업합리화와 소비능력의 제고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한층 드높일 수 있는 시기였고, 공장주나 경영주의 입장에서는 합리화에 따른 댓가를 노동자들에게 강요해야 하는 입장에서 충돌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고통과 부유층의 놀이가 동시에 등장하는 시기였지만, 소위 경영, 판매, 재무, 기술개발, 회계와 법률, 의료, 등의 분야에서 소위 중산층의 획기적으로 팽창되던 시기이다.  이들은 참정권, 남녀 평등과 여성해방, 고급문화의 향유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의 머리와 치마는 짧아지고, 바지 차림이 등장하며, 얼굴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여성의 벗은 모습이 서서히 영화(무성)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춤의 시대였던 1910년대(미국의 경우)는 탱고와 같은 좀더 육감적이고, 템포가 빠른 춤이 유행하고, 소설에서도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가 등장한다.  물론 이에 대해 사회나 정치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판매금지하는 세태, 술을 금지하는 법안, 표현물에 대한 사후적 검열, 미국에 대한 애국심의 고양, 타민족에 대한 경멸(인종전시관을 통해 다른 열등민족을 구경하는 전시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이는 하나의 국가사회적인 희스테리 현상으로 나타났다.

19세기 말에 프로이드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에 이를 통한 교육이론, 인간 세뇌이론 등이 교육과 소설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가하면, 반면에 전쟁 놀이에서는 아직 인간의 사기, 사회적인 속성 등이 고려되지 않은채, 전쟁전략을 세우고 있고 그대로 실천되었다.  따라서 일차 세계대전에서의 민중의 희생은 전력자원으로서의 인적자원의 형태로만 고려되곴고, 아직 인간의 내면적 능력을 감안한 전략은 선보이지 못했다.  심리소설의 등장은 의식의 흐름, 고독한 인간, 차별받는 인간, 인간성의 해방을 부르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한편으로는 휩쓸리는 개인들과 대중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결국 기존의 공동체인 가족, 마을, 술집에서 얼굴을 마주대하는 동료들의 영향력보다는, 영화, 신문과 소설, 방송, 공연 등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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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은 공장에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1900-1919 2010. 2. 15. 10:54
1차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국가간의 전쟁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대량샐상무기에 의해 민중의 대량 죽음,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한 군수역량과 이념적 동원이 필요하기에 국가내부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국민 동원능력, 산업 역량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그래서 1차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능력, 대외 무역 루트가 봉쇄된 가운데 국가들의 산업역량이 최대한 개발된 시기였다.  국가의 재정능력은 대내적인 저축과 희생니마, 징세능력과 과세 부담의 증가는 물론이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생활고, 국가의 재정 착취능력, 국민들의 국가의 희생요구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어야 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이미 해상봉쇄가 이루어지고, 각 나라들이 자기들의 국채 발행을 통해 해외 자금을 조달하고, 보호무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기이기에, 각 나라들은 최대한 생상량을 늘려, 군수장비는 물론이거니와, 민수물자의 수급에도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에 각 국가의 산업체들은 과거에 수입에 의존하던 산업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영국이 이 시기에 섬유산업의 쇄퇴를 가져오고, 일본이 섬유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일본응 이 시기에 특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독일이 점령한 영토를 가볍게 쟁탈하고, 섬유 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영국의 쇠퇴와 일본의 일등국가로의 발돋움이 완성된 것이다.  각 국가들은 이제 인민들의 필수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체제로 들어가고 이를 위해 산업의 기계화, 합리화, 대규모화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성공한 국가들은 미래의 강자가 되었고, 이를 수행하지 못한 국가들은 쇠퇴의 길을 가게되는 분수령이 된 시기이다.

또 하나의 산업체내의 갈등은 계급간의 갈등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량생산체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숙련노동자는 점차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대신, 반숙련노동자나, 미숙련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자로 참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숙련노동자들의 저항, 미숙련노동자들의 착취에 대한 항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 전에 시작되었던 노동자들의 저항은, 1차대전 기간과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맞이하여, 전세계적으로 노동조건의 향상(특히 8시간노동자가 미국의 전시기간에 군수물자 생산 산업에 도입되고, 러시아의 2월혁명 후에 곧바로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제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8시간 노동제를 주창하게 된다), 작업장내에서의 억압에 대한 불만 토로, 공장관리운동, 공장 소유운동등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이에 대해 비단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불란서 등에서도 공장 관리운동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미국에서도 자비로운 사업주에 의해 선도적으로 부분적으로 도입되게 된다.  이제 노동운동은 단지 작업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기업내의 복지, 즉 노동자 식당, 노동자 주택, 노동자 건강 보험(산업재해), 퇴직기금 등이 도입되는 계기가 된다.  공장이나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노동자 복지제도도 이제 서서히 도입하려는 움직임과 실제의 도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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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중성

역사/1900-1919 2010. 2. 13. 21:19
최근에 토요타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일본인들을 특징짓는 이중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일본의 기업들은 소비자가 흠이 있다고 가져온 물건에 대해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곧 고쳐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개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고치게 된다.  그리고 하나 하나 비용을 받거나, 따져서 고쳐주게 된다.  일본인을 말할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안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를 말한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가서 겪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친절한 미소이면서 동시에 돌아서면 아주 차거운 표정들이다.  아무도 걸들떠 보지도 않으면서도, 직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근대사중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만몽, 그리고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린 시베리아 출병이다.  이는 1918년에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외교에서의 이중전략이 시작된 시점으로 친다는 점이다.  이때 이중전략이라는 것은 이미 한국의 경우에는 1904-5년의 러일전쟁시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취했던 이중적인 정책에서 드러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열강들에게는 1918년 러시아 출병을 통해 드러난다.  즉 미국의 랜싱국무부 장관과 미국 주재일 일본대사 사이에 체결된 중국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권보장을 보호받는 조약(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의 문호개방 조약이라고도 표현한다)을 말한다.  러시아와는 이미 1908년에 만몽지역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보장받았고, 러시아 혁명중에는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와 만주철도회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상황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통해 1918년의 러시아 출병,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에도 남아서 (약 7만명) 거의 1923년정도까지 싸우다가, 곧바로 다른 나라에 앞서서 소련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는다(1926년).  이때부터 일본은 미국과도 갈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이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컫듯이 일등국가가 되었다.  즉 1차세계대전후에 해군 군축을 논의하면서 미국, 영국의 톤수가 5, 그리고 일본이 3의 비율로 세번째로 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은 소위 일등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하면서, 바로 그 전날에는 미국과 평화를 논하던 일본에게 당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의 이중성은 세계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일본은 대개 전쟁을 일으킨 후에 선전포고를 감행하는 관행을 지닌 것 같다.

일본의 내부를 보면 이러한 이중성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1910년대의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분석한 것을 보면, 일본은 처음부터 국가 지상주의를 가르치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에 더하여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을 가르친다.  따라서 사회성을 기를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일본의 교육에서도 경제학이나 국제관계학 같은 것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태도를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오로지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식으로 배우게 된다.  물론 이와 배치되는 경향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사 해외에서 배운 사람들도 다시 일본에 돌아와서는 대개 국가의 중요성을 개인보다 더 강조하고, 사회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이 소위 일등국민이 된 후에도 바뀌지 않은 채 지금껏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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