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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900-1919 2010. 2. 12. 23:03
신해혁명은 중국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정을 수립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1911년에 무창에서 일어난 무장군인들의 도움을 받은 혁명세력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들은 내부의 각종 혁명세력들이 외부 중국인들의 도움을 얻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한편 청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받은 군부가 반란편과 타협을 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반란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로써 청왕조는 아편전쟁이후 쇠약해진 틈을 타, 만주족을 무너뜨리려는 중화민족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다. 중화 한족들은 청왕조가 흥했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청왕조가 쇠약해진 이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그리고 의화단 사건을 통해 외세에 지리멸렬한 청왕조를 보고, 1904-5년의 로일 전쟁시기에는 자국에서 발생한 전쟁에서 단지 중립을 지키면서 다른 나라끼리의 전쟁터로 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중국인민들의 희생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는 처지를 보면서 오랑캐 왕조인 청왕조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나갔다.
청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19세기 후반기에 이미 청일 전쟁의 패배후에 근대화의 의욕을 불태우고, 해외에 거의 2만명가까이를 보내어 훈련시키고,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변법자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 특히 해외에 내보낸 국비 유학생들이 대부분 혁명운동에 가담하였으니, 국비로 청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되어 버린셈이다. 1906년에는 과거제도를 없애 과거의 신사세력의 싹을 없애고 보다 근대적인 관료총원을 시도하였다. 군인의 경우에는 팔기군을 개편하고, 근대적인 군대로 만들면서 군벌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군벌의 존재는 러시아와 다른 특이한 형태이다. 즉 러시아의 군대는 절대적으로 중앙의 군수지원을 받고 명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청나라의 군벌은 마치 지역의 깡패조직처럼, 작은 지역 단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면서, 세금을 거두고, 명령권을 가지고 세력을 불려나가고있었다. 결국 청의 마지막 왕조는 가장 큰 군벌인 북양군벌인 원세개에 의존하려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청왕조나 중화민국을 팽게치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1차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에게 독일의 이권을 전부 넘기고, 러시아 혁명기간에는 중국군이 오히려 일본군의 지휘아래로 들어가 일본군 7만여명이 내몽고, 만주, 연해주에서 마음껏 러시아 적군과 대적하게 만들어 준다.
중국은 한편으로 오랑캐 정권을 한족 정권으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외세와의 대결을 통해 국가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된다. 손문은 심지어 만주를 포기하는 방안을 강구할 정도로 위험하게 한족 위주의 중화민국을 구상하였다. 일본은 이중적인 외교전략을 통해 한편으로 일본 재벌의 자금과 군부내의 정부부서를 통해 중국의 혁명세력을 손을 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나 원세개 북경정부를 통해 혁명을 공격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두개의 중국을 만들고, 그 틈을 타 만주와 몽고를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이는 2007년 10월 1일자 아사히 신문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중국내의 각종 지역적 혁명조직들과 상인세력들이 서서히자라고 있었고, 해외의 손문과 같은 중국 통일 세력들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중국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혁명조직이 부재하고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문의 3민주의는 민권, 민주, 민생은 당시의 이론을 쉽게 통합시킨 이론이라고 볼수 있다. 국권을 수립하는 것, 그리고 민주까지는 드러낼 수 있었지만, 민생이론은 사회주의나 미국의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된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조지 소로의 이론, 레닌의 러시아 혁명을 소화한 이론이다. 아무튼 손문은 무장봉기, 해외자금을 활용한 국내 혁명지원, 이론화를 통해 혁명에 헌신하였다.
역사/1900-1919 2010. 2. 12. 12:01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배경으로 일어난 혁명이다. 이는 혁명의 이념면에서나, 그 조직 면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지도적인 위치에 볼세빅이라는 지식인 그룹, 또는 직업적 혁명가 그룹이 존재하고 이들이 혁명의 리더로서 이끌어 간 데 문제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의 참전국가들에게는 이미 전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최초의전쟁이었던 만큼, 민중의 힘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었다. 단순히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싸움이었과 후방에서도 물자생산면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전쟁에서의 죽음을 정당할 수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있어야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미국도 군수물자 생산 분야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고, 영국이나 독일은 노동의무제를 통해서 노력 동원을 강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평상시에 정상적으로 지급되던 식량 배급이 중지됨으로써 결국 2월혁명이 발생하고야 말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2월혁명의 최초의 성과는 공장내에서는 8시간 노동제의 도입,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가 혁명적 상황을 매개로 도입되었다는 점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운동의 고양과 억압의 과정에서 도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전쟁이 갖는 국민동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장위원회의 도입은 조금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이미 공장에서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조직되어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무엇이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형식상으로 보면,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만든 조직이기는 하지만, 실은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의 탄압이 극심하였으므로,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기능했다기보다는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노동자 소비에트는 정치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공장위원회는 공식적으로 공장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구성된 것이다. 공장주인이 있었지만, 공장주인이 공장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운영하는 데 감독기구,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장치를 만든 것이 공장위원회이다. 이런 조직은 현재의 유럽연합에서 도입하고 있는 work council과 유사하다.
그러나 항상 제도가 도입되어도 기존의 관습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공장의 운영은 실은 주인이나 경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인간적인 위계적인 질서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 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중간 감독자(현장 감독자)가 실질적인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현장 감독자는 임금의 결정, 해고의 결정 등 사실상 주인과도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사실상, 노동자들의 현장에서의 불만은 현장 감독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차별, 무시에 있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관행에 대해 현장감독자를 단순히 기술 지도원의 위치로 격하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도 노동조합을 구성하여 자신들도 노동자이므로 노동조합에 가입시켜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비롯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해방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볼세비키들의 정권장악, 내전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의 방어가 우선이었고,이를 위해서는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력의 증강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전시사회주의, 내전, 신경제계획을 통해서 공장내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보당하고, 다시 과거의 공장주, 기술자, 중간감독자들의 복귀를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게되고, 실제로 이를 실행한다.
결국 노동자 관리, 노동자 소유,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노동자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나 제도의 도입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을 줄수는 없는 것일까이다. 대가는 공장의 소유주가 파산하거나, 국가 권력이 더이상 공장 소유주를 지챙해주지 못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에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공장에 대한 노동자 관리가 이루어 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서도 최근에 진주에서 버스회사가 파산상태에 이르자 버스회사의 종업원들이 인수하여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공장이 성공한 사례를 모르고 있다. 경향신문과 서울 신문이 아나도 사원지주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사례를 보면, work council은 종업원을 대표하면서 이사회에 참석하고, 감독위원회를 구성하여, 회사의 운영에 적극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관행이 독일의 패전이후에 독일 대자본들의 군국주의화 경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운영되고 독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도 누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1900-1919 2010. 2. 11. 16:47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민중이 혁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볼세비키는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에서, 즉각적인 전쟁의 중단, 그리고 토지의 처분을 각 농민위원회에 맡기는 것을 10월 혁명의 첫날에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들은 전쟁터에 나가 죽음에 몰려 있는 병사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뭉쳐있는 농민계층을 향한 것이었다. 혁명은 병사와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이루어 졌으나, 노동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공장의 관리를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법률적인 효력을 발하는 결정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결정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은 볼세비키들이 민중들의 욕구를 면밀하게 특히, 레닌이 파악한 결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지도층이나, 관료들, 왕조들, 유산계층, 유식자들은 논란을 많이 하나, 민중들의 즉각적인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2월혁명을 군대에서 맞이한 사람들이 받은 첫번째 통신은 권력이 바뀌었으니, 왕조가 아닌 새로운 임시정부에 복종하라는 것이었고, 두번 째 명령은 군인들을 억압하지 말고 자유를 주라는 것(침을 뱉거나, 담배를 피운는 것, 계급을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호명하는 것 등)이었고, 세번째 명령은 군의 최고 지휘는 장교가 아닌 소비에트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대는 동요하지 않고, 이 명령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령을 누가 내리느냐가 불명확한 상황, 그리고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명령계통이 불확실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지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볼세비키가 그토록, 독일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나중에 강화조약을 맺는 것은(1918년에 독일이 이미 정복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것)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거나, 혁명의 와중에서 내외부의 적을 동시에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모자라거나 하는 문제보다도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1917년 혁명의 열기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우선이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이를 통해서 혁명이 성공했다.
물론 토지의 분배는 이미 19세기 말의 농지개혁이나, 러시아 고유의 미르라는 농민 공동체를 통해서 형식적으로는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농지를 각 개인들에게 나누는 형태를 염두에 둔 농민들의 욕구를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정책에서는 농토를 즉각적으로 농민 개개인에게 나누기 보다는 각 지역의 농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들이 대토지 소유자의 농토를 압수하고, 공유지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대토지 소유자들에게만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가져온다. 또한 실제로 많은 농민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정당이름) 당에 가입하게 된 것은 농토의 부족과 동시에 농장주나 국가의 가렴주구, 신분상의 차별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아무튼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농토의 분배에대한 정책을 확정하여 선언하였다.
공장은 이미 공장관리위원회나, 노동자 소비에트에 의해 많은 부분이 장악된 상태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병사소비에트와 더불어 가장 선두에 서서 러시아 혁명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혁명의 비극은 이들 혁명적 노동자들이 내외부적인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전쟁과 혁명과 내전의 기간중에 노동자가 줄어들고, 따라서 혁명적 의식을 가진 볼세비키들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는 Chris Harman같은 영국의 사회주의자 역사학자가 해석하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혁명이 사라졌는가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숫자상으로는 볼세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세력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듦으로써 혁명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혁명이란 한편으로는 제도로서 완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으면, 혁명의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국가 권력을 잡았으나, 이를 운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어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국가 체제를 구성하는 이들의 특히 관료들과 군대를 다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려워서 결국은 특히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 타협하게 된다. 물론 내전 기간의 전시 경제체제를 지나 신경제프로그램을 통해서 재건을 시도할 때에도 트로츠키와 레닌을 비롯한 국가를 책임진 이들은 결국 과거의 기술자, 군인전략가, 관료들을 재 기용한다. 결국 이들을 재대로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혁명은 배신되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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