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의외성과 필연성

역사/1900-1919 2010. 2. 11. 15:38
러시아혁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설사 혁명을 의도하고 디자인한 사람들이나 역사가들의 설명은 항상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 특히, 러시아 혁명과 같은 당사자들은 혁명이 발발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적어서, 대부분, 대중 봉기를 반대하고 회의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1917년 여성의 날에 벌어진 대규모의 봉기는 당시 혁명에서 가장 앞장선 볼세비키 조차도, 이러한 대중봉기의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Leon Trotsky, 1930, The Russian Revolution에 서술된 것에 의하면).  이날의 봉기를 성공시킨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여성의 날, 여성 노동자, 그러나 상당수의 남성 중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별로 확신하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에의 참여는 실은 1차세계대전에 참여하고 있는 남성 군인들과의 연대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차 세계대전은 특히 대규모 살상무기가 사용되었던 전쟁이었고, 특히 러시아는 전쟁에서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전쟁에의 물자 보급이 거의 끊기고, 군인들에 명령에 복종치 않으면, 즉석에서 처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실제 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에 5백만명에 달하는 군인들의 희생이 뛰따랐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남성들의 의미없는 죽음과 이를 강요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은 어찌보면, 이들의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야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3.15의거때 희생당하고, 고문당하는 학생들을 둔 자녀들을 위하여, 1차 의거와 2차 의거 사이에서 고통을 받은 가족들, 특히 희생당한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은 3월 25일의 마산시위에 대거 나서게 된다.  물론 이런식의 해석에는 러시아 혁명이 우연히 발생하였다는 점이나, 순수한 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도 보면,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2월혁명에서는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이 이루어지는 데, 이때에도, 니콜라이 2세는 거의 국가의 통치력을 잃고 그저 사생활만 영위하고 있었고, 거의 바깥 사정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 목욕하고, 손님맞이하고, 산보다니고, 놀고 쉬는 그런 날들을 보냈다.  그들의 측근에서는 그에게 사태의 심각성이나, 사태의 진전에 대해 제대로된 정보를 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은 우리가 3.15의거에서 이승만이 후에 물러날때나, 물러 난 후에 스스로 자인하고, 또는 이승만을 숭배하는 이들이 지어낸 이승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승만을 둘러 싸고 있는 이들이 정보를 차단하고, 이승만에게 아부한 것이 이승만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근거와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실은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미 1905년의 혁명을 통해 민중들의 권력이 어느정도 확인되었고, 왕조의 무능도 1904-0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드러난 상태였다. 이때 두마를 통해서 민중들의 대표를 통해 왕조를 제어하거나, 왕조가 민중들과 협력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틀은 만들어진 셈이다.  왕조는 이를 이용하기는 커녕, 주어진 기회도 잡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억압하고, 국가의 능력은 사라지고, 1차세계대전에서도 연일 패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당연히 민중들은 약해진 왕조를 본 이후에는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왕조는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상승하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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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의 현장

역사/1900-1919 2010. 2. 11. 10:23
1982년 초에 미국 LA의  Westwood(그곳 한인들은 西林이라고 부른다)에서 처음 본 영화가 Reds이다.  이 영화는 "세계를 뒤흔든 10일: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현장기록"(1919/1986, 두레)의 저자 John Reed 개인에 대한 영화이다.  그는 미국 오레곤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바드대를 나와, 언론인을 하면서 멕시코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리드가 1917년 2월혁명이후에 러시아의 뻬뜨로 그라드에서 혁명의 현장을 보도하고, 결국에는 참여하고, 방어하고, 미국에 돌아와서는 미국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굼꾸다가, 다시 러시아로 가서는 혁명의 배반을 관찰하고는 절망하면서 33살의 나이로 1920년에 죽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여러기록들이 있지만, 현장성의 측면에서는 이 책이 단연 압도적인 것 같다.  당시의 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동적이다.  감동적이라는 표현은 혁명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기에 그렇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2월 혁명의 발생, 그리고 혁명의 성공 직후부터는 혁명의 배반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혁명을 폄하하는 책들은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의 순간에 그들의 행동, 생각, 이념, 동지애를 보여주는 것은 드문 편인데, 이 책의 저자는 당시에 돌아다니던, 팜프렛, 벽보를 수집하고, 기자신분으로 자유롭게 이쪽 저쪽 편을 넘나들면서, 풍경을 관찰하고,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는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직접 총을 들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그와 그의 부인 (아니 애인)의 이야기가 감동깊게 묘사된다. 러사이아에서의 활약보다는 미국에서의 탄압이 더욱 리드의 고립감이나, 인간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글이 미국에서 반미국적이고 반역에 해당하고, 선동죄에 해당하여, 기소당하고, 모멸당하고, 실패하고, 결국,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서 러시아로 다시 건너가는 과정을 겪는다.  돌아올 때도 핀란드에서 검거당하자, 미국 정부는 이를 기뻐하고, 리드를 구출해 주려 하지 않는다.

책은 결국, 10월 혁명을 다루고 있다. 1, 2장은 배경, 3장은 10월 21-24일, 4장은 혁명의 성공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정부가 붕괴된 10월 25일, 5장 10월 26일, 6장 10월 27일, 7장 10월 28일, 8장 10월 29일-30일, 9장 10월 31일, 10장 11월 1일, 11장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만일 책 제목에 나온 10일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10월 23일-11월 1일까지를 다룬 것으로 보면 된다.  당시 볼세빅은 왕조와 이후에 수립된 케렌스키 정부로부터 만이 아니라, 관료, 군대, 동료 온건 사회주의자들, 농민사회주의자들, 심지어는 낭만적인 안정을 바라는 노동자들까지도 볼세비키의 혁명을 적대적으로 보거나, 적어도 협력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는 결국 방해하는 과정까지 나아간다.  볼세비키를 뭉치게 한 것은 전선에서 죽어가는 병사들과 이들의 가족들, 그리고 노동자 소비에트 조직이었고, 이것도 주로 러시아의 수도인 뻬떼스그라드에서 고립된 채였다.

"유산계급의 대부분은 혁명보다는 차라리 독일군을 더 좋아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의 러시아인의 가정에서는 거의 언제나 저녁 식탁의 화제가 법과 질서를 가져다 주는 독일군의 진격이었다"(37쪽).
"전화국을 방어하던 융커들에게, 대부분이 귀족의 자제로 그들의 사랑하는 짜르체제를 회복하기위해 싸우고 있던 젊은 융커들에게 탄약상자를 날라주고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던 이 여자들(교환양들)의 경험은 얼마나 낭만적이었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노동자, 농민들이며 '무지한 사람들'일 뿐이었다"(177쪽).

그러나 리드는 혁명이 왜 성공했는지, 그  진행과정을 명확하게 현장에서 판단한다. 

"극장에서, 광장에서, 학교에서, 클럽에서, 소비에트 집회장에서, 조합본부에서, 병영에서, 전선의 참호속에서, 마을 광장에서, 공장에서의 무수한 집회에서 강연과 논쟁과 연설이 있었다.  푸찔로프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4만의 노동자들이, 그가 사회민주당이든, 사회혁명당이든 무정부주의자이든 누구든지 간에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인가!  몇달동안 뻬뜨로그라드에서,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공공의 연단이 되었다"(42쪽).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의 발언:
"병사들은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알려달라.  콘스탄티노플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러시아를 위해서인가?  민주주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본가라는 도둑을 위해서인가?  내가 혁명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내게 증명해 줄 수 있다면 극형으로 위협하지 않아도 나는 자발적으로 나가 싸울 것이다"(49쪽).

"광대한 러시아의 도처에서 수많은 노동자, 농민, 병사, 수병들이 현명하게 사태를 이해하고 선택하려고 애쓰며, 그리하여 만장일치로 경의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것이 러시아혁명이었다"(150쪽).

"볼셰비키가 성공한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기층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현실화하고 구체제를 산산히 파괴하는 일에 민중을 끌여들여 무너져 내리는 폐허와 연기 속에서 새로운 것의 뼈대를 민중과 일치협력하여 구축했던 데 있었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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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운의 "창원장날",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

교양 2010. 2. 8. 14:59
어제 최헌섭 박사님이 이끌어주는 동행이라는 제목의 옛 길 걷기 모임에 참여하였다.  진해 웅동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나라 근대 유산의 한나로서, 수원지에 대해 책을 쓰고 싶다고 최헌섭 박사님이 말한다.   수원지는 대개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식수로 공급하기 위해 축조되기 시작한 것 같다.  마산에도 추산동, 팔룡산 등지에 수원지가 있었던 것으로, 그리고 아마도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못 들은 지는 몰라도, 산호동 뒷산에도 있었던 것으로 얘기한 것 같다.
진해에도, 웅동 수원지가 있고, 여좌동에도 수원지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원에는 지금도 진해시민들이 사용하는 성주 수원지, 그리고 또 하나의 성주 수원지는 수자원공사에서 창원공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려오다가, 김소운이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창원 장날"을 묘사한 수필에 군인(아니 경찰인가, 아무튼 수원지를 경비서는 사람)이 경화역에 쌀을 사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진해에도 수원지가 내가 위해 서술한 것 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김소운이 지적한 수원지가 어디인가를 다시 살펴보니, 이것은 규모 면에서 제법 큰 성주수원지를 가리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걷기 모임을 하다보면, 본인들이 기억하는 것과 실제와 혼동되는 현상이 가끔 발생한다.  점심을 먹으러 삼포로 향했다.  이곳이 삼포로 가는 길의 소재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황석영의 삼포로 가는 길, 그리고 영화를 떠올렸고, 사람들은 삼포로 가는 길의 노래를 떠올렸다.  내가 대학시절에 읽은 소설이고, 영화이기에 깊게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다.  물론 노래도 좋아하지만, 이는 나중에 나왔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설을 연상하면서 노래를 지은 것으로 추측했었다.  아직도 확실히 모르겠다.  그러나 노랫말을 지은이는 진해의 삼포를 생각하면 삼로로 가는 길의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아마도 황석영의 소설에 감천, 기차역, 삼포 등이 등장하여, 혹시 마산 내서읍의 감천, 중간의 기차역, 마산이나 창원, 그리고 진해의 삼포로 연상은 하였으나, 황석영이 마산에 온 사실을 들은 적이 없어서, 잘못된 상상일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튼 진해의 삼포는 바닷가이기는 하지만, 산을 넘어서서 들어가야 되는 곳이므로, 노랫말의 삼포와는 어울리고, 이곳은 어업을 주로 하여 경제생활을 하므로, 이곳에 가서 살 궁리를 하는 것도 이치에 닿는 것 같다.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삼포로 가면, 건설공사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데 내가 가본 삼포는 1960-70년에 공사가 있었을 지는 몰라도, 그리 큰 공사가 있을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랫말과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른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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