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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17-18세기 2009. 1. 30. 12:50
유럽이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부세계를 찾아나서게 되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험과 정보는 이들의 세계관을 바꾸었다. 유럽 대륙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세의 종교는 더 이상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 이들에게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되지 못하였다. 즉 가톨릭, 아니 가톨릭을 정화시키거나, 시대의 변화에 적합하게 변형시킨 개인 중심의 종교들은 신대륙, 아시아 대륙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흡수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경험 그 자체가 곧바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항해를 통해 직접 동양과 교류를 하기 전에도 아라비아와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이나 인도와 교류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우연하게 한 경험이었고, 많은 살마들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항해술이 발달하고, 해외 물자가 들어오고, 해외의 사람들, 동물과 식물, 새로운 기호식품들, 그림과 음악 들이 들어오자 유럽인들은 기존의 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더 나아가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달은 우주로 인간의 육체내부의 작은 것 까지 볼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존의 종교적 지식체계가 주장하던 신의 영역이 인간의 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고, 신의 주장을 검증할 수있게 된 것이다. 과거의 신이 주장하던 우주와 지구의 피조물에 대한 이론, 지리적으로 나누던 천상과 지상의 개념들, 하느님이 창조한 우주에 대한 개념들이 모두 검증받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상당수의 지식은 이제 상호간에 공유될 수 있는 기술적, 제도적, 정치적, 사회적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기술적으로는 인쇄술의 발달이 곧 지식의 보급을 가져오게 하고, 제도적으로는 대학의 발달, 각종 연구자들의 조직, 카페와 공적인 식당의 등장, 그리고 상당수의 군주들은 과거의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과학에 근거한 세계관을 장려하게 된다.
보편적인 세계관을 향한 유럽인들의 노력은 결국, 라틴어를 넘어서는 각 나라의 언어의 표준화 작업, 수학적 언어를 통한 보편적인 의사소통매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시도, 종교적인 세계관을 대체하기 위한 보편적 철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신의 영역에서 연역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경험에 근거하여 귀납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고, 장거리 상업의 발달은 소식을 전하고 광고하는 신문의 발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보고하고 공유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인 잡지의 등장, 보험과 은행과, 증권거래소의 등장을 가져오게 한다. 장거리 상업혁명은 현대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관행과 제도의 기본적인 만들어 내었다고 보면된다. 말하자면 새로운(근대적인) 인간의 등장이다. 일하는 노역과 눈 앞의 현실을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측할 수있는 자가 필요한 사회가 등장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역사/17-18세기 2009. 1. 29. 13:24
지난 구정 설명절에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1620년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타고 간 Mayflower호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북아메리카의 뉴잉글랜드지방에 청교도들(영국 국교회를 반대하는 종교도)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때 설명중에 하나는 당시 북미대륙에는 인디언이 5천만이 살고 있었고, 유럽인들은 2천명정도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501년인가에 최초로 아프리카의 서부해안가에서 브라질 지역으로 흑인 노예가 팔려가기 시작했다고 전하기는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가의 흑인들이 미국 신대륙으로 본격적으로 판매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 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팔려갔을까?
아메리카 신대륙은 미지의 땅이었고, 이곳에서는 광활한 토지에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고국에서 채무노예의 상태로서 밀려서 떠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유럽의 고국을 떠나 앞서 본 종교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곧 미지의 대륙에서 농장 주인이 되고, 이들 농장 주인들은 현지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을 노예로 사용하여 브라질 부근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이어서 은광, 그리고 캐리비안 연안과 부미 대륙에서는 사탕수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에 열대 기후에 강하고, 질병을 잘 견디는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기 시작한다. 1700년대에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현재 추정치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1명의 노예가 오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는 3명정도의 인명 희생이 따랐다고 한다. 즉 노예를 잡는 전쟁, 내륙에서 잡은 노예를 항구까지 행진시키고, 항구에 보관하고, 배를 태워 보내고, 새로운 지역에 도착한 노예들이 현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3명의 희생 후에 1명의 노예가 팔릴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 사학자들이 계산하는 1천2백만(과거에는 1천 5백만명이라고 추정하였다)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위해서 약 4천 8배만명의 아프리카 인들이 잡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생산인구의 감소, 전쟁 능력의 약화가 이루어져서 결국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식민지화되고 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아프리카 내부의 균열, 상호 전투를 부추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아프리카는 결국 유럽의 식민제국이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노예를 많이 잡은 부족, 노예로 많이 잡힌 부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상호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수 있다(유럽 중부 콩고, 앙골라, 나이지리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서부 중부 연안국가들).
노예들의 활용은 산업혁명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점차 과거보다 많은 노동을 하고, 휴식시간을 짧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업혁명 전단계에서 지구상의 노동자들은 더욱 많은 착취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역사/17-18세기 2009. 1. 28. 15:07
역사를 배우면서 항상 떠나지 않는 의문은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느냐? 라는 초보적인 질문에서부터 서양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지구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영향을 강요하게 되었느냐에 있다. 중세의 서양이 종교에 의해 지배되던 세상이라면, 르네상스를 거치고, 지구상으로 개척이 이루어지면서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간단하게 서술하고,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서 외우는 것의 이면에는 상당한 진통과 역사의 반동이 진행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구상의 탐험은 물론 해외 식민지 개척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차적인 동기이기는 하지만, 항해술의 발달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라는 동기가 중요하게 된 이면에는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왕조들의 국가 재정 확보, 이를 통해 전쟁능력의 고양,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전쟁에 의한 영토 침략의 유혹이 존재했을 것이다. 혹자는 전쟁에 의해 국가가 형성되었고, 국가는 전쟁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고 까지 평하기도 한다. 아무튼 서양의 17-18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이러한 전쟁은 대부분 왕조들간의 영토야욕을 툴러싼 전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전쟁이나 종교전쟁, 징집된 군인들에 의한 전쟁은 아니었다. 상비군이거나 또는 용병이거나 대부분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조선의 경우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예를 들면 임진왜란과 같은 경우에는 농민들을 아무런 급여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는 형태였거나, 아니면 왜군의 경우에는 조선을 정복하여 그 약탈품을 소유하게끔 하여 군인들을 독려하였다. 물론 당시에 참여한 명나라군들은 급여를 주는 군인들이었다.
부의 축적에의 갈망이 곧바로 과학적인 사상의 보급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아이디어는 한편으로 절대주의 국가체제나 로마 교황청의 명목상의 허가를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국가 지배의 신성함을 보장받는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아이디어는 국가 지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전쟁무기나, 전쟁에 소요되는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산업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11600-1700년대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종교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과학적 세계관이 세속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종교재판을 통해 사상과 표현을 통제하는 한편, 건축물이나 무기, 길, 항구, 터널 등의 건설을 위해서는 과학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종교나 세계관에 대한 갈등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서, 종교전쟁의 폐해는 일반인들까지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따돌림을 행하게 된다. 사회적인 따돌림과 희생양은 사회적인 격변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사람들이 느낀 사회격변(생산성의 발달, 도시의 등장, 사회적 격차의 심화, 지식의 보급에 의한 종교적 권위의 상실)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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