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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009. 1. 3. 17:31
유럽 중세의 역사는 비판의 의미를 지닌 중세봉건사회라는 표현에서부터, 암흑시대라는 표현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인 평가가 등장한다. 즉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농노제도와 봉걵건제도에 딸린 영주가 농노들이 결호낳기 전에 처녀와 미리 잠자리를 같이 한다거나, 흑사병, 마녀사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십자군 전쟁, 농업혁명, 도시의 등장, 기사도(궁정사회), 직업장인의 등장, 분업과 동시에 원거리 무역의 발전과 내지 무역의 등장, 한자 동맹, 바이킹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 정착 등을 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평가 또는 관찰의 뒤에 있는 보다 깊은 사회구조적 변화의 동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후 사학자들은 중세 온난화 현상을 주장한다. 즉 80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현재의 기후보다 1도가량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간할 수 있는 땅의 증대를 가져왔고, 농산물이 풍성하게 수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북쪽에서는 바다가 얼음에서 녹고, 유빙의 한계가 극지방으로 밀려감으로써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들와 그린랜드 나아가 현재의 캐나다 북동부지방까지 진출했다는 점, 덴마크인들은 노르만디와 영국 방향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느 점을 지적한다. 즉 중세의 온난화시기는 농업의 풍요로음과 동시에 바이킹들이 적극적으로 바다에서 활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든다.
동서양의 관계, 더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서부 유럽과 중국과의 교류라는 측면,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이슬람 권인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관계까지 넣고본다면, 중국이나 이글람 권보다도 열등한 문명을 지니고있던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거쳐 이들 두개의 문명권보다도 앞선 문명을 구가하는 과정이 이 중세에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현재의 유럽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겠다.
중국은 11세기에 거란과 여진을 밀어내고, 다시 훈족을 밀어내어 간접적으로 유럽에 파급효과를 준다. 특히 훈족은 앞선 시대의 북방에서 내려오는 민족이동을 야기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의 한 요인이 된다. 거란과 금나라 역시 유럽의 문명과 대면하여 최초로 중국을 소개하는 민족이 된다. 이후 1200년대들어서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유럽의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한편으로는 흑해를 장악하던 라틴 문명과 충돌을 일으키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대륙내의 교역의 안전성을 보장하여, 지중해 연안의 장거리 무역이 더욱활발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한다. 베니스가 현재 크로아티아 연안을 거쳐, 그리스 연안, 흑해까지 진출하여 사실상 유럽의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지중해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유럽은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1000년대 말부터 막강한 사라센 제국과 겨눈다. 이는 내부적으로 중앙집권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과 힘을 합치고, 유럽의 봉건적인 내부 무장 세력들의 힘을 결합시켜 외부로 향하게 하는 의도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과 수학이 발달한 이슬람의 문명과 본격적인 교류를 통해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과의 문명 접촉은 직접적으로는 흑사병의 창궐, 종교재판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럽의 중세 역사를 통해 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혼란을 감수하고라도, 이를 수용하여 앞으로의 발전의 전략을 삼는 것이 역사의 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 2009. 1. 3. 14:52
고려시대를 읽노라면, 태조 왕건의 웅대한 기상과 동시에 중국에 기대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등장,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 1200년대 들어 무너져 버린 고려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고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제국이라는 성격과 동시에 거란과 금의 침입,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시달린 허약한 나라라는 두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겹쳐온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고려시대는 세계적으로 바다라 열린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열린 바다를 매개로 해서, 중국의 송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초기에는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개경에 들어와서 무역을 했다는 사실, 그래서 개경에는 낙타와 코끼리도 보였다는 점, 우리나라 성씨중 외래에서 귀화한 성씨가 반정도 인데, 그중 다시 반정도가 고려시대때 귀화한 성씨라는 점(고려때 귀환한 사람들이 지은 사대부 문학가으로서는 변안열, 이자란, 설손, 설장수, 설순 등이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변은 뚫려있어서 사실상, 사람들은 넘나들면서 세력다툼을 벌리고 있었다는 점 등을 알수 있다. 물론 최근에는 진도에서 항몽의 기지로 사용된 성에서 발견된 기와와 같은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어 아마도 삼별초의 일부가 오키나와(유구)로 피난했을 가능성을 말하고있다.
고려 초기의 거란과 진나라(금나라)가 서양에서 중국을 부르는 이름인 Cathay(China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전에는 Cathay즉 거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영토를 불렀다. 거란은 중국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밀려나서 서양인들에게 중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와 Chin(현재 중국을 부르는 명칭인 China는 진나라에서 시작했다)으로 시작했다는 점은 당시에 중국에 대해서 서양으로 그 지리적 존재가 부각되던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본격적으로 마르코폴로가 1300년경 원나라의 북경에 체류한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알려지지만, 아무튼 서양과 동양이 본격적으로 만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Korea(고려, 현재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라는 명칭도 그리고 Japan(일본은 원래 닛폰이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는 불리운다)이라는 명칭도 서양에 들어갔다.
고려시기가 한편으로는 중국대륙과 일본으로 부터 밀려오는 세력들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라고 평가할 수도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에 맞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고, 만주의 벌판을 넘나들면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도를 한 역사로도 기록된다. 또한 중앙국가 체제가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날씨가 온화한 시기적인 잇점,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잇점을 살려 지방농민들은 비록 고립적이기는 했지만, 생산력을 많이 발달시킨 시기였다. 아쉽게도 1200년대이후의 원나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만신창이 되었지만, 지방의 신층사대부들이 고려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마산은 고려시대의 끝자락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운반하던 배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마산의 명칭도 원나라의 말을 기르던 산(아마도 자산동 또는 산호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산포는 산호동 방향을 일컫는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김해에서는 김해에서 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말을 길렀다고 말한다. 마산은 배를 모아서 거제를 거쳐 일본 대마도 규슈로 출발하던 기지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산이 출발기지였으므로, 이곳에 2차레엘 걸쳐 중국의 남쪽 사람들, 원나라 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적어도 3만명 정도가 모였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시사 2008. 12. 26. 12:24
지난 화요일 12월 23일 모처럼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장사익의 소리를 들었다.
나이 59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라서 음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오르지 않으면 오르지 않는데로, 젖어들게하는 목소리다.
나중에 들으니, 장사익씨가 2월 25일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의 축하공연에 등장한 모양이다. 동서양의 화합을 위하여 동양의 음을 들려주려 등장한 것으로 신문에서는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소리와는 거리가 먼 느낌으로 토로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장사익을 소리가 끝난 후에 관객들과 같이 어울리며 막걸리를 드는 사람, 서민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그의 텁텁한 소리, 그리고 나에게는 동료 교수님이 애초에 나에게 장사익을 소개하면서 그의 웃은죄를 들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난 허허바다 음반을 하나 사서 들어보고 장사익의 소리에 빠진 사람이다. 웃은 죄의 가사는 "즈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한모금 달라기에 샘물떠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안뜬대두, 난모르오, 웃은 죄밖에"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웃에게 그냥지내듯이 지내는 사람에게 평양성에 대해서는 아무얘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면서, 이념적 억압을 지적하고 있는 가사이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이념대결로 몰고가면서 경제위기를 넘어가려는 상황에서 장사익의 감정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다고 답할 것이다. 거짓과 사기, 진심이 사라져버린 세상을 탓할 수 밖에 없다고 답할 것 같다.
공연은 죽음, 삶, 희망의 3부로 되어 있다. 역시 죽음이 가장 강렬한 느낌을 주고, 희망은 가벼운 느낌을 준다. 희망을 얘기하기에는 너무너 세상이 가벼워지고, 진심이 없어서 일 것이다. 그 정도에서 끝낸 것이 맞는 것 같다. 죽음에서는 아버지에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이 생각났다. 차가운 땅에 뭍어두고 나서는 심정, 뜨거운 화로에 넣고 단 한시간만에 한줌의 재로 변한 어머님의 육신이 생각났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장사익의 가사는 아버지가 찾아오는 것을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 놓는 감정으로 표현한 것 같다. 죽음에 대해 얘기살 수 있는 자는 이미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타악기와 현악기, 그리고 재즈 피아노, 트럼펫이 어울려 울림의 공감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처음에는 재즈, 그리고 조금후에 야니의 퓨젼스타일이 떠올랐다. 소리꾼에게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 감명을 주는 것 같다. 그의 말은 적은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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