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적인 것의 등장

역사/17-18세기 2009. 1. 22. 16:05
오늘 아침 신문에 해외에 있는 한국 무역관에서 조사한 한국의 제품과 다른 나라 제품에 대해 구입자들이 지불하려고 하는 가격이 나왔다. 한국 제품을 100달러에 구입하는 것이라면, 독일 제품은 같은 제품에 대해 독일 것이기때문에 150달러를 지불하고도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건 제조 능력은 세계적으로 독일이 제일 앞서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필자도 독일 오스나부룩에서 2002-3년도에 13개월간 생활한 경험이 있다.  독일 사람들은 행동도 기계처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정과 눈물이 많고, 한편으로는 사적인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법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라는 점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하면 엄격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면을 강조한다. 현재 한국 방송공사 사장하는 이병순을 말할때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신경질적인 냉혹함"(내부의 의견)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기본적으로 여러종류의 통치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프러시아를 가장 기반이 되는 나라로 여긴다.  이는 프러시아가 현재의 독일 영토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서가 아니라, 프러시아의 역사적인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프러시아의 영토는 실은 1300년경에 발트해 연안(현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랜드 북부 등)의 영토에 기반하여 시작된 나라이다.  그러나 후에 브랜덴 부르그와 합치고,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가지면서 독일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 우리가 보통 독일이라고 하면 대개는 프러시아를 가리키고 있다.  예를 들어 한 독일인이 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였다고 하면, 이는 브랜덴 브루그 사람(프러시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러시아가 현재의 독일 영토를 장악하면서, 현재의 강대국 독일을 만든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는 프러시아의 1600년대 특히 1700년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은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다.  해외 식민지 개척에도 뒤졌고,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에도 뒤늦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1700년대의 프러시아는 고문의 근절,법의 지배, 관료제, 상비군, 의무교육제도, 철학, 문화가 꽃 핀 나라로 기억된다.  헤겔, 칸트 등의 철학자가 생각난다.  이를 서양에서는 계몽군주제의 등장으로 치부한다.  1700년대 이후에 독일에는 계몽군주가 등장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를 표현하기를 오전에는 스파르타, 오후에는 아테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즉 한편으로는 근검절약, 강인한 심성, 절제와 중용의 심성을 가졌으면서도, 대화와 관용, 창조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독일은 1600년대 초반의 30년 종교전쟁이후에 스웨덴에 패하여 현재의 베르린 지역에서 현재의 러시아의 칼리닌 그라드(발트해 연안)로 수도를 옮기는 치욕을 겪는다.  그러나 치욕을 거울삼아, 대 반전을 꾀한다.  Frederik William(대 선후)가 집권하면서, 상비군을 갖추고, 절대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즉 자신의 치욕을 거울삼아 대반전을 꾀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 외부의 이질적인 개신교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활력으로 삼는 정책은 독일의 활력이 냉정한 문화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독일은 1800년대 초반에 나폴레옹에게 배패한 후에도, 리를 거울삼아 농노 해방, 유대인들의 해방, 자치권의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한다.  우리의 경우에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면 오히려 감추기 바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나라를 만드릭 위해서 오히려 외부에 개방하고, 신분 해방을 통해 사회의 활력을 찾은 점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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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규칙이 확립되었다.

역사/17-18세기 2009. 1. 21. 11:35

1600년경은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전기가 마감되고, 왜와 청나라의 침략으로 조선후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는 조세 자료와 신분에 관한 자료가 망실됨에 따라 국가가 국민들에게 거두어 들일수있는 재정은 더욱 악화되나, 반면에 신분자료의 망실은 신분제도의 동요가 일어나서 자산에 의해 신분상승이 일어나고, 재산이 없으면 양반이라도 신분 하락을 겪던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외부의 침략에 의해 내부의 개혁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아 국가 융성기라고 부를 정도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상대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다고는 하나, 이는 세계사적인 흐름에 비후어 보면 발달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와의 연계는 청나라, 왜, 유구 열도정도 만이 관에 의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므로, 이웃의 일본이나 청나라도 쇄국정책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부분적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외부의 정보에 어두웠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유럽대륙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을 개척한 상태에서 대량으로 상품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때 해외 식민지는 동인도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왕실과 국가가 세운 주식회사의 형태로 진출하지만, 이들 회사는 토지 점유, 군 고용, 독점 무역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의사 국가의 형태를 취한다.  포루투갈, 스페인의 시대를 끝내면서 1600년경에는 네덜란드가 공화정의 형태로 스페인 왕실로부터 독립하고,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간다.  이어 영국이 1600년대를 거치면서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의 실험을 거치면서 왕권을 제약하고,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한다.  프랑스는 절대주의 국가로서 중농, 중상주의 국가를 만들어 간다.  국가는 단순히 한 나라의 인민들의 생산물을 수취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국가가 하나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시기이다.  여기에서 국제적인 통용화폐인 은이 남아메리카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은행-> 은을 다루는 상점).

유럽대륙은 상대적으로 내부적인 전쟁과 식민지 전쟁을 동시에 치루는 전쟁의 시기를 거친다.  전쟁의 방식은 겉으로는 내부의 왕권을 둘러싼 전쟁, 왕의 권력과 귀족간의 내전, 해외식민지 쟁탈전의 양상, 종교전쟁의 형태를 띤다.  유럽대륙의 지배체제는 왕정, 공작령, 후작령과 같은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띤 것, 도시국가 체제, 수도원과 가톨릭 교구가 지배하는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혹자는 유롭대륙은 약 200여개 이상의 통치단위로 나위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잦은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이러한 작은 단위들이 본격적으로 통합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유럽은 국가간의 전쟁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이데올로기가 각 나라에서 그것이 가톨릭이건, 루터교, 또는 캘빈교, 청교도 등의 형태로 공유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어느정도의 규칙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물론 전쟁은 대부분 용병들에 의한 전쟁이므로, 왕정간의 전쟁이지, 국민들간의 전쟁은 아니었다(종교전쟁의 경우에는 인민들간의 살륙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따라서 전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전쟁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용병들과 전쟁 무기, 재정 능력에 따른 전쟁이었으므로,  비교적 서로간에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또한 아직 국경선이 획정되지 않은 시기에는 인민들은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식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면전의 양상을 띠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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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두려워 한 조선전기

역사 2009. 1. 16. 16:12

조선의 탄생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설된 상황에서
이미 여진족, 왜구, 홍건족의 침입으로 약화된 고려왕조 대신에 국가 재건의 차원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한반도의 경우에 좁은 국토라서 쉽게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너질 왕조가 너무 오래 버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아마도 지방이나, 상업의 약화가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조선 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문화나 재정이 튼튼한 국가체제를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웃나라나 서구의 역사에 빗대어 보거나, 원나라 지배이전의 고려시기의 해양상업의 발달에 비추어 본다면 퇴보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계가 고려 왕의 명령을 어기도 모처럼 만에 찾아온 중국 대륙과의 호쾌한 전투를 마다하여 유약한 이성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성분이나 그의 경력을 보면 한반도의 변경을 오가면서 여진족, 홍건족, 왜구를 물리치면서 지역을 누빈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약한 그릇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다만 명나라를 섬기고,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삼음으로써, 국민들의 개방적인 기상이 취약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명나라만 하여도 남송을 이어받은 명나라는 초기에는 해양상업에 대해 금지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동아시아(남중국해) 해상 무역권을 발달시켰다.  물론 우리나라도 소극적으로 이 때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무역을 한 흔적이 있고, 심지어는 태조때에는 태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도 있다.  물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들 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무역을 청해와서 한 소극적인 무역이었다.

그러라 조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공포, 삼별초 난에 대한 해상 세력에 대한 공포감이 강하여 해상무역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세종때 대마도를 정벌하면서도 왜구가 한반도를 공격할 것에 우려를 심히 하였다.  물론 조선조에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고려말에 비해서는 왜구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왜구는 이때(설사 일본의 공식적인 나라와는 구분한다고 하여도) 중국의 해상도시는 물론이거니와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중국도 1300년대후반과 1400년대 초반을 통해 동남아의 말라카, 인도의 갤리컷에 진출하였다.  조선만 여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조선전기의 역사에서 서구의 르네상스, 지구상의 발견, 상업의 부흥 등의 근대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안에 고려때까지만 해도 왕성했던 무역과 제국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세종조의 시기에 나타났던 문예부흥, 국가 기틀의 마련이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는 너무 좁은 평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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