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한 세상은 혈연을 강조한다.

역사/17-18세기 2009. 2. 11. 17:18
1600년대 후반부터 조선 사회는 핵가족의 형태보다는 확대가족의 형태를 띠고, 장자상속제도를 확립한다.  당시 국가는 외부의 침입에 대해 무력해지고, 신분보다는 경제력이 더욱 중요해지자, 신분은 경제력에 의해 구입이 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전쟁은 인간에게 적나라하게 그들의 직접적인 실력이 가장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백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경제력만이 그들의 운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국가가 하는 말은 허언이고, 국가의 말을 따르다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게 된다고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천민들과 상민들은 국가가 전쟁때문에 백성들의 인력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상민과 천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양반의 지위를 요구한다.  양반들은 국가 위기시에 군역과 세금 납부가 면제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국가는 양반에 의존하는 것이 많지 않다.  국가는 상민와 천민들의 신분 상승을 미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독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양반도 백성들에게 퉁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가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더구나 1600년대 말과 1700년대 초에는 빈번한 이상 기후로 인해 작황이 좋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하고, 백성들은 이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국가의 통치 범위를 이탈하게 된다.  국가는 좁아진 과세대상를 보전하기 위해 양반을 파는 것을 장려하는 수 밖에 없게된다.  국가 재정은 사실상, 양반신분을 파는 것과 무역과 상업 독점, 부역을 통해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게 된다.

양반들은 이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양반들끼리의 통혼, 가족 범위를 넓힘으로써 사회적인 불안에 대응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대가족 제도와 장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열연을 통한 재산 보존이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집안의 노비가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나 천민의 신분은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즉 신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예속관계로서 종속적인 신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상당한 정도의 화폐관계나 상업적인 이해관계가 경제관계의 주류로서 자리잡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호적도 발전되고, 양반의 지위로 부르는 명칭도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용하게 된다.  즉 19세기 초반에 이르르면 전국민의 70% 이상이 양반신분을 획득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호적도 대부분 이때 작성되게 된다.  진성 양반들은 양반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노력하게 되나, 이 역시 더욱 많은 비용이 들고, 상당수의 양반들은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조달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신분에서 사실상 탈락하게 된다.  이들은 서당에서 한문선생으로, 아니면 공부를 더해서 한약을 팔 거나, 아니면 의원으로 전업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지방의 공무원 출신들이나 해외에 나들이 할 수 있는 신분에 있는 사람들,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양반신분으로 상승하면서 사회적인 주도 세력으로 움트는 현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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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제와 도덕경제를 뚫고 나오는 상품경제의 싹들

역사/17-18세기 2009. 2. 10. 16:19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 국가 조공체계나 도덕경제를 벗어나서, 유랑하는 백성들이 나타나고, 이들은 국가의 조공이나 공동체를 벗어나고, 그렇다고 자연경제에서도 살지 못하는 유랑민화한 집단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자연이상의 빈번함, 그래서 나타나는 식량의 부족,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 압력의 강화, 아무튼 살기 힘들어진 생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토지생산력을 높이고, 경작지를 넓히고, 새로운 구황작물을 도입하여는 시도도 있었고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민화를 떨쳐낼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농경지의 광작화, 집약적 농업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의 집약적 필요성, 신분체제의 와해, 국가의 감시체제와 약화, 지방 탐관오리들의 횡포 등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1700녀대 후반 들어서면 아주 자연스럽게 임노동자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 시초는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임노동자군은 또한 화폐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정부에 내는 세금, 그리고 군역과 부역을 대신하는 사람을 사서 쓸수 있는 제도, 또는 포나 쌀로서 내는 방식의 등장, 정부의 일에 대해서도 일용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키는 방식의 등장은 임금 노동자의 등장을 염두에 둔 정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도시 지역, 특히 서울 지역은 이미 1700년대를 넘어서면 약 20만의 인구가 밀집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상당수는 임금 노동으로 그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촌의 경우에도 전문적으로 임금노동만으로 생계를 영위한 사람들이 발생할 정도로 임금노동의 수요는 상당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점은 임금노동의 존재가, 아니 무산자층의 존재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발전의 단초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임금 노동은 화폐 소득을 매개로 하여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구매아여야 하므로 자연히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5일장이 서고, 행상들이 많아지고, 고정적인 상점들도 들어섬으로써 상품 경제는 어느정도 발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적인 수요 정도로는 대량생산이나, 표준화된 상품을 생산하여 대량으로 판매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명히 보부상과 같은 아니면 보다 국제적인 무역을 행하는 상인들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생산에 직접 나선 것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미약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초기 단계의 화폐, 이에 따른 국제 국내적인 시장의 형성, 화폐의 원재료를 생산해내기 위한 광산의 개발, 국가와 양반수요를 위한 전문적인 생산체제의 구축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보이나,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것은 아직 부족했다고 보여진다.  즉 의복생산의 단계로 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는 의복생산은 자족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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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독점 능력이 국가 능력이었다.

역사/17-18세기 2009. 2. 9. 17:11
서양사에서 식민지라는 것은 사실상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서구가 그 외의 나라에 대해서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국가체제에 통합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에는 물론 국가도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하였지만, 동인도 회사 또는 서인도 회사라는 형태로 식민지에 가서 무역을 독점하는 형태였다.  물론 이 회사는 무력까지 사용하고, 무역지의 인민까지 지배하는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본국정부가 식민지를 직접 지배하는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무역형태를 보면, 일본의 공세적인 조선무역(아마도 청나라와의  중계무역을 통하기도 했을 것이다)과 네델란드와 독점적인 무역을 통해 조선과 중국과의 무역이익을 취하는 형태를 갖고 있었다.  물론 네델란드의 입장에서도 일본과의 무역을 상호간의 독점적 성격에 의해 막대한 차익을 낼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영국와 네델란드가 조선과의 무역을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지하고 자신들을 통하여 서구의 물품이 거래되도록 하여 자신들은 중간이익을 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은 일본을 통하여 네델란드가 필요로하는 물품을 수출하였고, 일본은 다시 이를 네델란드에 되팔았던 것이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은을 직접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은을 유입시켜 쉽게 교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조선와 왜 간의 교역 결제수단인 은을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왜의 은을 통해서 청과 왜의 무역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은 이미 은을 통해 국제 무역의 결제를 행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청나라와는 공식적인 사행과 변경무역을 통해, 그리고 밀무역(황해를 건너는 바다와 만주 국경선지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물품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는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의 유목민적 성격에 의해 무역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기도 하였지만, 청나라가 서구와의 무역을 엄금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을 허용되었으므로, 매우 활발하였던 것이다.  특히 황해 연안은 중국 대륙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무역로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손쉽게 청나라의 무역선들 (특히 강남의 무역선)이 조선반도의 잔라도 연안에 많이 출몰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래무역에 대한 불안감이 이미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으로 발생하여 가능하면 무역 역시, 국가의 통제하에 그것도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무역상인들만이 독점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무역에 필요한 물품의 국내 교환이 손쉽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전시기에 비해서는 시장거래되는 상품이 늘어다고 하여도 역시, 절대량에 있어서는 대규모 무역을 수행하기에는 적합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는 사이에 조선은 국제적인 무역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었고, 상대적으로 원격지 무역에 의해 발달이 가능한 국내 생산체제의 활성화도 더디게 진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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