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의 세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19세기 2009. 3. 1. 16:35
1800년대에 나타난 역사적인 고민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1890년대 프랑스에서 나타난 드레퓨스 사건에서 나타난 국방부의 조사 은폐, 은폐를 역으로 이용하여 국가 주의를 강화하고 군인의 명예와 사기를 이유로 거짓을 진실로 꾸미고, 진실을 옹호하는 이들을(에밀졸라) 벌을 가하는 행태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서구 열강들이 지구에 독점적인 무역구조를 다투어서 만들어 내는 와중에 유럽에서 보면 극동에 해당하는 조선반도는 살며시 피해나간 이유도 궁금하다.  혹자는 조선반도는 노력에 비해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고 여겼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혹자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충분히 수탈할 수 있는 구조(중개무역)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무역구조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니면 중국과 일본을 대결하기에도 아직은 벅착 지정학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조선은 외세에 대해 봉쇄조치를 취했다가는 곧이어 무차별적으로 개방되는 상황을 맞게된다.  아니 조선은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중국을 통해서 외세와의 교섭을 위탁하거나, 아니면 왕의 측근에 외국인 고문을 임명하여 부족한 외교 교섭능력을 보완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조선왕조는 중국의존, 아니면 외국인 고문을 통해 외교 고섭을 선호하였고, 그 전략도 부국강병전략이라기 보다는 다른 외세를 이용하여 다급한 외세에 대처하려는 전략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믿을 외세가 없었다는 점이다.  믿을 외세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외교적인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국을 믿다가 일본을 믿다가 러시아를 믿다가 미국을 믿다가 그리고는 모두 당했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에서 1991년에 시작된 지방자치제도를 초기에는 모두들 민주주의 학교의 역할을 하리라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곧 일년도 되지 않아 지역토호들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역할 아니면 중앙의 지배에 대해서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기능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교육장이라고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나라에서 1950년에 이승만이 실시한 지방자치,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한 지방자치제도를 보면 곧 드러나는 데도 우리는 너무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수식에 속아 넘어 갔다.  나는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도 1800년대의 고민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한다고 본다.  민주, 자유, 공화라는 모두 별개의 말이라는 점이다.  민주는 하나의 정치적인 제도를 가리키며, 자유는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개념이며, 공화는 권력의 주체에 대한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반자유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독재(전제정), 반자유주의적 공화정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  현재의 우리의 경우는 경제적 자유, 그리고 시민적 억압이 민주주의(국민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라는 정당성을 바탕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혹자는 이럴 때 계몽군주적인 자유주의를 제시하기도 한다. 무식한 국민, 자유와 민주를 누릴 능력이 없는 인민에게는 전제적이나 독재정이 옳다는 것이다.  물론 현명한 군주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정조나 세종에 의한 시민적 자유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고민을 위해 역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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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세계는 무너졌다.

역사/17-18세기 2009. 2. 13. 16:47
유럽 역사와 조선의 역사를 비교하면, 특히 근세의 경우에 유럽에는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는 점과 조선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의 1400-1500년대에는 왜구의 침입, 1500년말의 일본, 1600년대초중의 후금과 청의 침입이 있었지만, 실은 상대적으로 해외에서의 침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혹자는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상호 강화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본다는 전쟁이 적었다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편안하였을 지도 모르지만, 국가 능력의 측면에서는 국가 능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아무튼 1600년대 중반 조선의 국가는 몰락하였다.  과세자료와 신분자료의 망실은 국가를 유지시키는 세금부과와 군역과 부역을 부과하는 능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오게 된다.  물론 양반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스스로 의병을 일으키거나 하면서 자신들의 실질적인 지배를 강화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몰락은 신분질서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질서, 자신들이 경제력을 궁극적으로 보호해 줄수 있는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므로, 양반들도 과거의 국가질서로의 복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질서는 과거와 같을 수는 없다.  이미 백성들은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백성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먼저 도망쳤으며, 위기에 그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왜, 명나라, 후금과 청나라 군대의 장기간 백성들과 접촉하므로써 조선의 국왕이 아닌 다른 세력들의 국가 능력을 경험하게 된 상황이다.  왜군은 마치 자신들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처럼 조선의 인민들을 애초에는 돌보는 정치를 하기도 하였고, 명나라는 은을 이용한 화폐를 사용하고, 명나라 상인들이 들어와 명나라 군인들을 위해 물건을 팔고, 이에 더해 조선에서도 은광산을 발굴하여 은을 이용하여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발달된 명나라의 옷감이나 지식이 넘처 들어오게 된다.  이후 후금과 청나라를 통해 임금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목격한 백성들은 이제 조선의 백성을 우습게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자신의 국왕에 의지할수 없는 백성들은 자신들의 능력, 아니면 가족, 아니면 해외 강대국의 세력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이미 중국과 일본은 서구와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천주교나 과학적인 지식과 지도, 문물이 들어와 있었고, 이것이 해외와의 접촉을 통해 조선조 사회에 유입되게 된다.  국제무역을 위해 청나라 말이나, 일본말, 여진의 말을 배우는 자는 쉽게 돈을 벌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글을 좀 알아서 일찍 의학이나 약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제 의사나 약사가 되어 돈을 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강이나, 도로가에서 일을 하는 상대적으로 상업에 일찍 눈을 뜨게 된 사람들도 새로운 사업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사업기회와 생존 양식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게 된것이다.  개인들의 인격 양성을 위한 4서 3경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잘 알 수 있는 지식, 해외의 문물이 돌아가는 것을 알려 줄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게 된 셈이다.  양반은 돈을 주고 사면 되므로 돈을 버는 것이 우선인 계층이 나타난다.  아마도 이들은 상대적으로 몰락한 양반층이나 중인 계급(기술, 하위 관료층)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들을 서구에서 말하는 부르주아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국가를 장악하려는 시도, 아니면 적어도 국왕이나 양반신분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법률 집행이나 부분적인 자산 독점을 넘어설 수있는 정치적인 힘을 가졌느냐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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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의 경제적 성장과 붕당정치

역사/17-18세기 2009. 2. 12. 14:49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1750년경에는 이미 양반이라는 계층의 혈연적 세습이 거의 의미가 사라진 시기였다.  평민들은 자신들의 직업적 지위를 이용하여 화폐경제의 이점을 살려서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이들 재산을 기반으로 양반이라는 지위를 사들일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안으로는 부지런함으로 인해 농사를 지어서 농토를 확장하는 것, 역관 등과 같이 국제적인 무역 기회를 이용하여 상업활동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것, 국내 교역이 늘어감에 따라 교통 수송에 종사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법, 국내의 거래에 참가하여 이익을 내는 것,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어 이익을 취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농토 또는 자신들의 직위에 기반하여 백성들을 착취할 수있는 공식적 지위에 오를 경우에만 재산을 증식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공식적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노력, 노비, 의관, 예절 등과 같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시키기 위해 소모되는 비용이 너무너 컸기 때문에 생산보다는 소비적인 요소가 많았다.  물론 양반은 각종 조세나 부역으로 면제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상민 보다는 적게 국가에 수탈당하지 않는 유리함이 있었으나,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이 양반의 지위를 이미 구축하였으므로, 국가도 양반에 대한 특혜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경제적 자산가 세력의 등장의 정치적 세력화의 한 양상으로 붕당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붕당은 특정 집단이 공직을 장악하여 이를 이용하여 각종 이권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거 경제적인 이익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각 붕당간에 다툼이 각 붕당의 경제적인 이익에 기반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은 과도한 주장으로 보여진다.  조선조 초기에 국왕은 개국공신세력과 권력을 공유하여햐 했기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재야 유학 세력을 정치와 관료조직에 투입시켜 개국공신 세력들 견제하려 하였다.  이는 아마도 15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동인, 서인 등과 같은 세력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각 세력들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특정한 이념적 정책적 대결을 하기 보다는 상당한 정도, 주자학적 세계관의 범위내에서 개인들의 생활에 관련된 이슈를 가지고 대결을 벌이는 양상이었다.  어찌 보면 종교적인 요소를 갖고 국가 정치를 이념투쟁을 하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가 국가 정치를 장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 것과 같다.

따라서 흥미롭게도 임진왜란 당시 이이(율곡)은 서인이었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1590년 일본을 다녀온 서인출신의 통신사는 일본의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하였고,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은 실은 유성룡을 등에 업고 출세하였다고 가장한다면 동인 출신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경남 지역의 경우에는 동인출신 (또는 남명학파의 북인)들이 왜병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을 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즉 이기 이원론에서 기를 강조하는 서인들이 실제로는 전쟁에서는 강력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600년대 이후에도 남인 북인의 대결에서도 역시 국가의 정책보다는 (특히 국방) 왕위계승과 예절 문제가 항상 정치적인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정치는 붕당이라는 것을 통해 국왕의 전제를 견제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국가 정책의 발달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특히 인조반정이후 남인의 득세는 소중화주의로 흘러, 오히려 왜와 청나라의 성장을 애써 무시하기까지 정책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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